천보성

 


'''천보성의 감독직 / 기타 직책 역임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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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성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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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199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
팀 창단

'''천보성(1982~1984)'''

김용국(1985~1993)
'''LG 트윈스 등번호 76번'''
김충(1987~1989)

'''천보성(1993~1999)'''

김성근(2001~2002)


이름
천보성(千普成 / Bo-sung Chun)
생년월일
1953년 1월 1일 (71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경상북도 영천시
출신학교
삼덕초 - 경북중[1] - 경북고 - 한양대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
소속팀
롯데 자이언트 (1976~1977)
성무 야구단 (1978~1980)
삼성 라이온즈 (1982~1984)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수비코치 (1986~1990)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1993)
LG 트윈스 1군 수비코치 (1994~1996)
LG 트윈스 감독대행 (1996)
LG 트윈스 감독 (1997~1999)
한양대학교 감독 (2004~2012)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선수 시절
3. 지도자 경력
3.2. LG 트윈스 감독 시절
4. 이후
5. 한양대학교 야구부 입시 비리 사건
6. 근황
7. 여담
8.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소속의 선수 및 LG 트윈스 감독.
선수로 1번(1982) 감독으로 2번(1997, 1998)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준우승.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경북고 시절 명성을 날리던 유격수였다. 1971년에 그와 고3 동기생이던 남우식, 정현발 등은 사상 초유의 고교 대회 전관왕 신화를 쓴다. 즉,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것인데, 고교 대회가 토너먼트로 치뤄지니까 거의 전승을 한 것이다.[2] 그 뒤, 경북고등학교의 신화를 쓴 동료들과 함께 운동부 육성에 적극적이라 스카우트를 적극적으로 하던 한양대학교에 입학한다.[3] 졸업 무렵에는 당시 창단한 실업 야구단 롯데 자이언트[4]에 입단, 공군 군 복무를 거쳐 프로 출범 직전에 은퇴하고 롯데호텔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2.2. 프로 선수 시절


프로 출범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는데, 그의 동기인 남우식이 일찌감치 야구계를 떠나(1980년 은퇴) 직장인이 된 반면.[5] 그는 다시금 그라운드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1982년 고향 팀인 삼성에 입단해서 3년 간 선수 생활을 한다. 그해 3월 27일 벌어진 원년 개막전에는 삼성의 1회초 공격에서 1번타자로 출전, 청룡 선발투수 이길환의 초구를 쳐 뜬공으로 아웃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타자로서 제1구를 치고, 첫번째 아웃카운트를 기록한 것.
다만, 이미 출범 당시 32세의 선수에게 두터웠던 삼성의 선수층은 주전 자리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주전 자리를 잡지 못했다지만, 충분히 당시 프로야구 팬들의 뇌리에 남을정도로 이름이 회자됐고 활약을 했다. 당시 막강한 삼성 라이온즈 타선의 수많은 거포 중 하나로, 이만수, 김성래, 박승호같은 숨막히는 거포라인 안에서도 나름 활약했으며, 특히 찬스에 강했다

3. 지도자 경력



3.1. 삼성 라이온즈-LG 트윈스 코치 시절


1986년 삼성 라이온즈의 수비코치로 변신한다. 당시 프로 선수 출신 최초의 코치 2인 중 1명이었다.[6]
그 뒤 1990년대 초에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는데, 이 과정에서 삼성과 마찰을 빚고 결별했다. 1992년 10월에 귀국한 그는 이광환 감독이 이끄는 LG 트윈스의 코치로 부임한다.
그러나 LG의 전성기와 함께했지만, 그와 이광환 감독 간에 불화가 있었다고 한다. 송구홍의 2루수 기용 문제, 심재학의 투수 전향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고 하며, 결국 이 갈등과 성적 부진이 원인이 되어 이광환 감독은 1996 시즌 중 해임됐고, 후임으로 그가 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3.2. LG 트윈스 감독 시절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1997년 정규시즌에서 1위 해태 타이거즈와 1.5게임 차 뒤진 2위를 기록하면서 LG의 전성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과시한다.[7] 그러나 PO에서 4위로 준PO을 뚫고 올라온 삼성에게 2승 후에 2패하면서 고전하다가 5차전을 잡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기는 한다. 그러나 힘이 다 빠진 상태라 해태에게 1승 4패로 패배.[8]
삼성이 유독 독기를 품고 덤빈 데는 1997년 어린이날 대구 경기에서 삼성에게 대패하면서 그가 부정배트 시비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게 양 팀의 감정 싸움으로 번지면서 나중에는 백인천 삼성 감독과 LG의 외국인 코치 조 알바레즈 간의 몸싸움까지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는 백인천과 천보성 개인의 사이를 벌어 놓았고, 사제지간이던 김용달 당시 LG 코치와 백인천의 관계도 이 때 틀어지게 된다.
1998년에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지도력을 보여 준다. 당시 이상훈의 해외 진출, 임선동의 태업[9]으로 인해 약화된 투수력을 잘 추스리면서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PO에서 삼성을 3승 1패로 꺾고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당시 현대 유니콘스는 선발 전원이 10승 투수였던 괴물 팀. 결국 4승 2패로 패한다.[10] 하지만,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팀을 올려놓은 공로로 재계약에 성공한다.
그러나 1999년, 팀의 세대교체를 이유로 심재학의 투수 전향[11], 김광삼, 김상태의 로테이션 기용을 승부수로 걸고 시즌을 시작하지만, 사상 최악의 타고투저 시즌에 경험이 부족한 3명의 선발은 그야말로 배팅볼 투수였고, 투수진이 무너진 상황에서 자연히 팀 성적도 무너졌다. 여기에 트레이드 문제를 두고 프런트와 갈등까지 빚으면서 팀 성적은 추락을 거듭한다. 최종적으로 1999년에 LG가 기록한 성적이 매직리그 3위인데, 4위인 쌍방울이 재정난으로 주전선수를 모두 팔아치운 최악의 전력을 가지던 것을 비춰볼 때, 그냥 꼴찌나 다름없는 성적이었고 결국 사임한 후 이광은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여기에는 트레이드 시도와 신인 중용으로 인한 기존 선수들의 반발도 한 원인이었다고 전한다.[12]

4. 이후


그 뒤 KBO의 경기운영위원으로 있으면서,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대학야구연맹의 창립을 주도했던 그는 2004년 모교인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2012년경까지 감독으로 재직하였다. 나름대로 성과를 낸 감독이었기 때문에 프로 감독으로 한 번은 더 기회가 올 법도 한데, 그 기회가 잘 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1년 야구 월드컵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예선 라운드는 5승 2패로 2라운드에 진출했으나, 여기서 2승 5패의 성적을 거두며 6위로 광탈했다.

5. 한양대학교 야구부 입시 비리 사건


2012년 8월 20일 한양대학교 야구부 입시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기사 게다가 이와 별도로 학생들에게서 전지훈련비를 요구한 사실이 드러나, 이미 사건이 터지기 전인 동년 5월에 한양대학교에서 해임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 사건으로 김한근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프로야구계에서도, 본인에게도 흑역사 확정. 정삼흠, 지명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다 자수한 이광은과 함께 LG 출신 아마야구 지도자의 삼대 흑역사로 남을 것은 확실하며, 더 이상 야구계에서 그의 모습을 볼 일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천보성 본인은 이 사건 이후로 부인이 투신 자살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13] 장례는 조문객은 물론 빈소도 차리지 않고 유가족들끼리 바로 다음 날 발인을 마쳤다.
2013년 2월, 징역 2년과 추징금 6,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6. 근황


출소 후에는 사회인야구 동호인과 여자 야구선수에게 야구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고 한다.

7. 여담


  • 인터뷰 영상을 보면 목소리가 걸걸하다.

8.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삼성 라이온즈
36
90
.267
24
6
0
0
10
13
2
11
.333
.343
1983
71
174
.247
43
8
1
6
25
23
3
17
.408
.313
1984
64
180
.217
39
8
0
2
20
20
5
21
.294
.299
<color=#373a3c> '''KBO 통산'''
(3시즌)
171
444
.239
106
22
1
8
55
56
10
49
.347
.313
[1] 현재 경운중학교(대구)[2] 실제 전승은 아닌데, 그 이유는 승자 결승에서 한 번 패배했으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돌아왔다.[3] 얼마나 적극적이었냐면 천보성의 경우 체육학과 정원 초과로 입학이 어려워질거 같자, 학교측에서 그나마 비슷한 계통인 '''무용과'''로 인원을 배정해서 입학시켰을 정도. 이러한 대학들의 관행은 훗날 1980~1990년대에 대학 농구리그의 인기를 중심으로 법학, 경영학, 통계학, 신문방송학 등 체육계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전공에까지 정원을 편법으로 넣으며 절정을 달하게 되었다가 논란 끝에 폐지되었다.[4] 현재의 프로 팀 롯데 자이언츠의 전신.[5] 남우식은 결국 푸르밀(옛 롯데우유)의 CEO에 오르니, 그의 선택도 충분히 대단했다.[6] 다른 1명은 롯데 자이언츠의 김성관[7] 바로 전 해인 1996년에 2차 1번 지명권을 두고 OB 베어스와 꼴찌 경쟁을 하던 추태를 벌였기 때문에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과시했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8] 이해의 해태에 패넌트레이스 10승8패로 앞섰다.[9] 해외진출 문제로 이미 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 법원의 중재로 '2년후 이적'을 조건으로 1997년 입단했고, 2년차가 되자 대놓고서 깽판을 시전했다.[10] LG는 이당시에 현대에 패넌트레이스에서 11승7패로 우위였다.[11] 아이러니하게도 이광환 감독이 이를 실행하려고 할 때, 가장 반대한 것이 그였다.[12] 뒤에 알려진 바로는 김동수김기태의 맞교환, 김재현양준혁의 맞교환을 추진했다고 한다. #[13] 이순철의 케이스처럼 천보성도 한양대학교에서 부인과 알게 되어 결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