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민(포수)

 




'''김정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4'''

''''''LG 트윈스''' 등번호 12번'''
나진균
(1992)

'''김정민
(1993~2006)
'''

최승준
(2007)
최승준
(2007)

'''김정민
(2008~2010)
'''

심광호
(2011~2012)
''''''LG 트윈스''' 등번호 73번'''
양상문
(2002~2003)

'''김정민
(2011~)
'''

현역


<colbgcolor=#c30452><colcolor=#fff> '''LG 트윈스 No. 73'''
'''김정민
金正敏'''
'''생년월일'''
1970년 3월 15일
'''출신지'''
[image] 대전광역시 동구
'''학력'''
대전가양초 - 한밭중 - [image] 천안북일고 - [image] 영남대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3년 2차 1라운드(전체 4번, LG)
'''소속팀'''
[image] [image] LG 트윈스 (1993~2006, 2008~2010)
'''지도자'''
[image] LG 트윈스 1군 배터리코치 (2011)
[image] LG 트윈스 2군 배터리코치 (2012~2014)
[image] [image] LG 트윈스 1군 배터리코치 (2014~2018)
[image] LG 트윈스 2군 배터리코치 (2019~2020)
[image] LG 트윈스 1군 배터리코치 (2021~)
'''프런트'''
[image] LG 트윈스 스카우트 (2007)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1994)
1. 개요
2. 현역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연도별 성적
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LG 트윈스포수이자, 現 LG 트윈스 1군 배터리코치.

2. 현역 선수 시절


[image]
현역 선수 시절.
대전가양초, 한밭중, 천안북일고, 영남대를 졸업하고 1993년 LG 트윈스에 입단, 포수 수비와 리드 등은 훌륭한 편이었으며, 특히 프레이밍은 발군이었지만 아쉽게도 타격은 약한 편이었고, 이 때문에 1990년에 입단한 선배 김동수와, 1998년에 데뷔한 후배 조인성이라는 대형급 포수들 사이에 끼어서 백업 포수로서 활약하다가 2006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식[1]까지 가진 후 스카우트로 일했다. 스카우터로 일하면서 그가 눈여겨본 포수가 김태군이었다. 그러나 부족해진 포수 자원을 메우기 위해 김재박 감독의 권유로 복귀했다. 조인성의 안습적인 경기 운영과 프런트의 막장 행보[2]로 주전 내지 1군 백업 포수로 출전하여 LG의 상승세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2009년 5월 20일 무등야구장에서의 기아와의 경기때 정성훈의 안타때 주루 플레이를 하다가 비가와 미끄러워진 그라운드에서 3루를 잘못 밟고 넘어져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리고 이 날 경기가 김정민의 현역으로써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이후 조인성과 교체되어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게 된 결과 원래부터 좋지않은 아킬레스 건이 끊어져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 덕분에 LG 팬들은 죽을맛이다... 실제로 LG의 2009년 성적은 초반 하위권을 맴돌다가, 김정민을 주전 포수로 기용하자 급격히 승률이 상승하기 시작, 2위까지 올라갔으나, 부상 후 다시 조인성이 마스크를 쓰자 7위까지 추락하였다.[3][4] 일부에서는 김재박이 남긴 명언인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를 몸소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조인성과 김정민을 우규민을 예로 들어 비교하자면, 조인성과 배터리를 짤 때의 우규민은 '불규민'이 되었지만 김정민과 배터리를 짤 때의 우규민은 말 그대로 ''''미스터 제로''''가 된다. 그 만큼 리드가 좋았다는 것.
프로생활 16년동안 통산 홈런은 단 14개. 그러나, 1994년 9월 8일 잠실에서 열린 해태전에서 2점 끝내기 홈런을 쳐서 팀 승리에 공헌했다. 그 홈런은 선동열KBO 리그에서 11년간 맞은 28개의 홈런 중 하나였으며, '''선동열한국프로야구에서 맞은 유일한 끝내기 홈런이었다.''' 이 홈런으로 LG는 한국시리즈 직행 매직넘버를 1로 줄였고 다음 날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지었다.
재활에 성공하여 2010 시즌부터 다시 현역으로 뛰는 듯했었다. 그러나 '''레어템이었던 잉경을 얻은 조인성이 각성해 버리는 바람에'''[5] 잊혀졌고 2군에만 쭉 머물다가 '''현역에서 또 다시 은퇴했다.''' 그의 현역 시절 등번호인 12번은 2010 시즌 후 LG에 오게 된 심광호에게 넘어갔다.

3. 지도자 시절


[image]
2011년부터 LG의 1군 배터리 코치를 맡게 되었고[6], 김기태 감독 부임 이후에는 2군 배터리코치로 보직을 옮겼다가 2014 시즌 중 양상문 감독 부임 이후 코치진 교체를 통해 장광호 배터리코치와 맞바꿔 1군 배터리코치로 올라왔다.
2015년부터 LG의 주전 포수를 차지한 유강남이 시간이 갈수록 수비 쪽에서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2018년 들어 유강남이 눈뜨고 봐줄 수 없는 도루 저지 능력과 가망없는 블로킹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투수들의 볼배합이 완전히 읽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김정민의 영향도 분명히 있을 것인데, 홀로 욕을 안 먹고 있다.[7] 물론 이 시즌 후로 김정민은 다시 2군 배터리코치가 되었다.
2020 시즌 후 세리자와 유지가 SK 와이번스로 떠나자 2년 만에 1군 배터리코치로 복귀했다. 2군 배터리코치는 조인성이 맡는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출루율
장타율
1993
LG
61
67
0.254
17
4
0
0
5
5
0
3
1
0.292
0.313
1994
57
121
0.281
34
5
1
3
17
12
0
10
1
0.341
0.413
1995
23
21
0.190
4
0
0
0
1
2
0
0
0
0.191
0.190
1996
25
62
0.323
20
2
0
1
7
11
1
5
2
0.391
0.403
1997
7
18
0.222
4
0
0
0
0
0
0
0
0
0.222
0.222
1998
1
0
-
0
0
0
0
0
1
0
0
1
1.000
-
1999
55
103
0.233
24
5
1
1
9
11
0
8
0
0.286
0.330
2000
102
202
0.238
48
9
1
2
22
18
2
20
3
0.310
0.322
2001
61
108
0.259
28
4
1
0
12
8
0
7
1
0.310
0.315
2002
32
37
0.216
8
3
0
0
4
3
0
2
0
0.256
0.297
2003
9
9
0.333
3
1
0
0
0
0
0
0
0
0.333
0.444
2004
61
97
0.268
26
3
0
1
15
10
0
1
1
0.275
0.330
2005
79
186
0.274
51
9
0
5
29
19
0
7
6
0.318
0.403
2006
26
21
0.048
1
0
0
0
0
3
0
0
1
0.091
0.048
2008
71
155
0.303
47
6
0
1
17
11
1
14
3
0.370
0.361
2009
26
50
0.320
16
2
0
0
4
8
0
12
1
0.453
0.360
<color=#373a3c> '''KBO 통산'''
(16시즌)
696
1257
0.263
331
53
4
14
142
122
4
89
21
0.320
0.345

5. 관련 문서


[1] 이 은퇴식은 '''후배'''인 서용빈과 함께 치뤄진 은퇴식이다.[2] 2008년 6월, 안 그래도 적던 포수 자원을 한꺼번에 2명(최승환, 이성열)이나 두산 베어스에 넘겨줬다. 물론, 트레이드 이후 둘 다 '''폭발'''.[3] 실력도 실력이지만 여러 이야기에 의하면 김정민은 후배들에게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 더 컸다.[4] 참고로 이 시즌 김정민과는 달리 조인성은 경기중에 영 좋지못한 일을 겪는가 하면 죄잉여라고 한창 까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주전포수가 되었으니, DTD는 가속화되어 그 시즌 LG는 7위로 추락했다.[5] 실제로 조인성은 2010시즌에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6] 현역 시절 포수리드에 뛰어나고, 고참선수로서 팀에 본보기가 되는 김정민이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1군 코치가 된것을 반기는 팬들이 많았다. 그것 말고도 2010시즌을 끝으로 철밥통 배터리 코치가 해임된 것도 김정민 코치를 더 반기는 원인중 하나였다.[7] 물론 유강남 본인의 부상때문에 송구, 블로킹 능력이 떨어진 것도 있지만 김정민 코치의 대처가 딱히 보이지 않아 대책이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