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 the Brac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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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틴즈의 데뷔 앨범. 2002년 10월 발매.
사진은 영국이 아니라 90년대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때 불어닥친 시위대에 맞서는 전경대의 모습인데 피트 도허티가 신문에서 본 걸 오려가지고 저렇게 꾸민 것이라 한다. 값싸고 충실한 인디 정신(..)이지만 이제는 개러지 락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저 앨범 커버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게 사실.
당시 런던에서 리버틴즈에 대한 열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 세대 비틀즈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소문이 났던 수준이다. 이 데뷔 앨범 하나로. 물론 저 말은 그냥 추측으로만 끝났다.
이제는 개리지 락계의 모던 클래식이 돼버린 앨범.
도허티 커리어상 최고의 평을 받는 앨범이나 차트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는 #35를 차지하고는 내려갔는데 발매 당시만 해도 언더에서 더 알아주다 보니 메인스트림 진출 직전이라 그렇다. 그 이후에 리버틴즈가 본격적으로 거의 아이돌화 되는 유명세를 타면서 드디어 빛을 보게 되고 온갖 리버틴즈를 위시한 인디 록밴드들이 속출하면서 이제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참고로 이 년 후 발매한 재결합 이전 마지막이자 두 번째 앨범은 '''차트 1위를 찍는다.'''
'''그런데 발매 당시부터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꾸준하게 팔리긴 해서 결국 1년만에 UK Gold (10만장)을 확정했다.'''
이 앨범이 발매될 당시 영국은 사회정치적으로 노동당이 정권을 말아먹던 시기였으며 계급 빈부격차는 갈수록만 늘어나는 경제불황 시대였다. 대처 시절 이후 가장 데모가 빈발하던 때이기도 하고, 잉글랜드라는 나라는 70년대 이후로 이만큼 늙었다고 절실히 느끼던 적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음악적으로, 영국은 정말 가난했다.''' 아예 락의 몰락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실제로 팝이 미친듯이 잘 나갔다. 링크된 게 브리트니 스피어스라는 것이 보여주듯 영국 뿐 만 아니라 미국도 락 쪽은 가난했다. 똑같이 몰락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말라깽이 뉴욕 양키 5명들이 바로 이 때 등장한다.
그래서 모두들 스트록스에 열광했다. 스타일을 떠나서, 스트록스의 음악은 단순함이 그 힘이었다. 킬러 후크가 없어도 멜로디라인을 만들어내는 이 신비한 분위기의 음악에 모두들 놀란 것이다. 이 때 가장 놀란 것이 "그 무언가"를 표현해내려고 했던 온갖 런던의 아마추어 신인 밴드들.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들, 그것도 뉴욕 출신이라는 일말의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정통 양키(..)라는 데에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음악 언론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상 2000년대 들어오자 락도 팝도 미국한테 다 놓치게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Is This It발매 시점을 전후한 2002~2003년경 영국 인디가 스트록스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기형적인 현상으로 이어진다.[3] '''리버틴즈도 당연히 이 심상치 않은 괴물 신인들이 전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NME는 2001년, 스트록스가 모든 것의 답이라고 말함으로써 영국 음악의 사실상 항복선언을 한다.[4]
스트록스가 2001년말 2002년초 첫유럽투어를 돌며 런던에 상륙했을 때 관중 속에는 19살, 20살짜리 청년 도허티와 배럿이 있었다.[5] 맨날 원룸에 처박혀 가진거라곤 기타가 전부며 굶던 그들은[6] 이 시기 레코드 계약도 못 맺어가지고 데모를 미친듯이 찍어내며 되는대로 아무 레코드사나 여기저기 찔러대며 고군분투하던 중이었다.
음악적 성과는 없었지만 벌써부터 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사실상 그들이 워낙에 잘 생기고 허우대도 좋다보니까 그 인상에 반한 여자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벌써 스토커나 그루피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팬들 집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공연하러 다니면 모두들 그들의 음악을 즐겼고, 칭찬해주었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그리고 본인들도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은, 아직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즉 부족하다는 것, 널리고 널린 기타 잡고 노래 좀 부른다던 영국에 넘쳐나는 밴드 중 하나라는 것 뿐, 여기서 만족하면 끝장난다는 위기 의식이었다. 피트와 칼은 프론트맨으로서 그런 '''책임의식을 혹독하게 느끼고 있었다.''' 스트록스가 곧 대세였던 이 시절, 그들은 2001년경의 Rough Enough Stuff라는 다섯곡짜리 저음질 레코뎅 세션을 통해 잘 드러났듯이 줄리안 카사블랑카스를 따라하기 위해 칼 배럿은 I Get Along을 아주 귀찮은듯이 중얼중얼 불른다.[7]
피트 도허티는 한 술 더 떠서 프랭크 시나트라 스타일로 Music When The Lights Go Out을 불렀다. 답이 없는 망버틴즈 시기.
2001년경 밴드 숙소에서 팬들과 함께. 위쪽 찬장에 피트가 신문에서 오려놓은 향후 앨범 커버가 될 사진이 보인다.
절실하게 레코드사를 찾아 헤매던 그들은 2002년 6월 드디어 '''스트록스와 같은 소속'''[8] 인 러프 트레이드와 계약을 따낸다.[9] 사장이자 앨런 맥기와 함께 이 바닥의 발마당이자 대부인 제프 트래비스[10] 가 이들과 계약하는 데 결정적으로 찬성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들을 '''영국판 스트록스'''로 보고 있었던 것. 그러나 간부진 중 후에 1965저였던 제임스 레코드를 설립하게 될 비교적 젊은 매니앤디아컷은 얘들은 한 탕 거하게 할 애들이다하고 예상했다고. 아무튼 당시 분위기가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지금 영국 록에 체면 치레해주는 정도만 되어라...'''정도였는데.'''
때는 Is This it이 발매되고 1년 남짓되가고 월드컵도 끝난 2002년 10월. 도허티와 배럿 일당이 만든 12곡짜리 신보 LP가 런던을 강타한다. UK차트 40에 들긴 했지만 #35라는 다소 실망스런 수치. 그런데 사람들은 피트와 칼에 대해 무수히 떠드는 진기한 일이 벌어진다. 이상한 소문이 돌았는데, 그 시작은 '''지금 동런던[11] 에 땟국물 흐르는 누더기 차림의 4인방이 요 일년간 여느 쩌리 밴드들이 떠들고 다녔듯이 자기네들이 영국의 스트록스랍시고 떠들고 다닌다'''로 시작한다. 그런데 몇 달 후, '''영국의 스트록스라고 떠들던 애들이 실은 자기네들은 스트록스를 시시하다고 생각하더라'''[12] 로 바뀐다. 그리고 2003년, '''NME의 편집장 크리씨 뮤리슨[13] 이 사설로 현재 누더기 차림의 밴드가 런던 내에서 스트록스를 압도하고 있다'''고 말하며 불과 몇년 전 그들이 스스로 선언한 스트록스 담론을 취소한다. '''여기서 누더기 차림의 밴드란 당연히 리버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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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앨범 발매 직후 NME 커버에 서며. 리버틴즈가 활동하던 2002부터 2004년까지 NME는 판매부수가 3배로 뛰어오르는데 농담이 아니라 이 당시 리버틴즈가 안 등장하는 때가 없었다.
Is This It과 Turn on the Bright Lights 같은 개러지 명반들과 달리, Up The Bracket은 그 시작부터가 아예 달랐던 앨범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귀찮아 하는 듯한 허세 가득한 허무 따위는 하나도 없는, 열정으로 넘치는 런던 노동계층의 서사시였던 것이다. 매체들의 평가에서 잘 드러나듯, '''Up the Bracket은 분명 개러지 락의 조류에 속한 앨범이면서도 정서적으로는 Definitely Maybe같은 브릿팝 클래식에 더 가까운 상반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즉, 굉장히 '''영국적'''인 음악이었던 것이다. 앞의 두 앨범이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혹은 퇴폐미의 정점을 찍는 그런 스타일이었다면, 리버틴즈는 허무의 감정이라곤 티끌도 없는 오히려 그 정반대, 똘끼 충만한 패기와 청춘이 담긴, 신인들만이 낼 수 있던 앨범이었다. 같은 개러지에 속하되 그 정반대를 달렸다고 할 수 있는, '''제대로 영국적인 "그 무언가"를 표현해냈던 데뷔 앨범인 것.'''
외로움과 고독, 첫사랑과 이별, 그리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가난과 마약 중독에 대한 회한.
'''갈 길 잃어버린 영국의 청춘들에게 바치는 약간 아프지만 희망을 놓지 않는 찬가''', 이것이 바로 Up the Bracket이라는 앨범이 가지는 상징성이다. 리버틴즈가 지금은 퇴폐와 마약, 막장의 대명사같은 이미지지만 초기 데뷔 당시만큼은 주변의 개러지 밴드들과는 차별화된 개성이 두드러지는 점도 바로 희망을 놓지 않는 이런 열정적인 자세였던 것.
리버틴즈는 두 앨범 모두 클래시의 믹 존스가 프로듀서로도 활약해 유명한데 믹 존스가 프로듀스하는 스타일이 방관한채 내비두거나 자기도 기타 하나 잡고 같이 반주 넣으면서 '''수십개씩 녹음해서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 고르기(..)'''. 원래는 스웨이드의 기타리스트 버나드 버틀러가 프로듀서였는데 조니 마와 함께 영국 기타계의 신동이라 불리우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완벽주의자였던 버나드와 피트의 공존은 곧 '''전쟁'''의 시작이었다. 리버틴즈의 데뷔 싱글 'What a Waster'는 버나드 버틀러가 프로듀스하였는데 후에 데뷔 앨범의 프로듀서가 믹 존스로 바뀐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둘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2003년에 싱글 'Don't Look Back into The Sun'의 프로듀싱에 버나드 버틀러가 다시 배정됐는데 피트 도허티는 녹음 내내 얼굴도 안 비추다가 마지막에 곡의 프로듀싱을 다 완성시켜놓자 나타나서는 '''"그럼 이제 노래 부를테니까 제 보컬 입혀주세요"'''하고서는 20분 동안 두세번 녹음하고는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버나드 버틀러는 후에 "하여튼 피트 도허티는 진상이다"라고 회고하였고 피트 도허티는 "'Don't Look Back into The Sun'은 순수한 리버틴즈 스타일 곡이다. 나와 칼이 만든 곡인데 버나드 버틀러는 너무 조종하려 든다."고 일갈했다. 그에 비해 믹 존스에 대해 말하길 "그는 완전 내 스타일이다. 우리가 녹음하면 그는 심지어 녹음실 안까지 와서 노래에 맞춰 춤도 췄다. 진짜 빌어먹을 노인네 맘에 든다."(..)
앰프를 최대로 높여 찢어질 듯한 톤을 내면서도 꾸준히 찰랑거리는 리듬 기타와 짧지만 강렬한 솔로와 타브를 동반한 리드기타 그리고 동시에 두 기타가 만나는 전형적인 펑크 코드 사운드, 보컬 트레이닝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한 울듯말듯하다가도 고성방가 수준의 괴성을 질러대는 피트 도허티의 흐물거리는 보컬스타일, 딱딱 들어맞는 드럼 비트와 베이스의 리듬 섹션까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및 인디/개러지 락에 입문하기 위해서 반드시 들어야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앨범 중 하나다.
결론적으로 기타 두 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로큰롤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조합으로 이루어진 앨범이다. 신디, 키보드, 피아노, 현악기나 이펙트 등 아무것도 없다. 그냥 펑크/락 그 자체.
'''전곡 도허티-바랏 작사,작곡이다.'''
첫번째 싱글 컷. 리버틴즈를 대표하는 곡.
항목 참고
두 번째 싱글 컷.
역시나 가사가 좋다고 알려진 곡이나 여지없이 너무나 영국적이다. 코러스가 중독성 있는데 묘하게 서정적이다. 도입부의 도허티의 비명(..)은 단순한 비명이 아니라 'Get Out of it!'하고 외치는 거다. 녹음 전날 술을 너무 먹어서 혀가 꼬여서 그렇게 됐다 하는데 프로듀서인 믹 존스는 그걸 보고 '녀석, 재밌네 ㅋ.'하면서 껄껄 웃었다는데 칼 배럿은 기가 막혔다 한다. 역시나 전형적인 리버틴즈 곡.
리버틴즈의 데뷔 앨범. 2002년 10월 발매.
사진은 영국이 아니라 90년대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때 불어닥친 시위대에 맞서는 전경대의 모습인데 피트 도허티가 신문에서 본 걸 오려가지고 저렇게 꾸민 것이라 한다. 값싸고 충실한 인디 정신(..)이지만 이제는 개러지 락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저 앨범 커버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게 사실.
1. 개요
'''이런 앨범이 있기에 우리 영국은 무너지지 않는다. 피트 도허티는 신이다.'''
'''NME'''
뉴욕에서 앞마당까지 처들어온 '''Is This It에 대한 런던의 대답'''. 스트록스에 대항하라고 내놨더니 스트록스와 함께 인디 씬을 이끌게 된 견인차 역할을 한 앨범. 특이점으로는, 당시 초기 개러지 락에 허무함과 공허감의 정서가 짙게 깔린 것과 달리, 오히려 '''브릿팝 정서'''가 가미된 앨범이라는 점.'''Definitely Maybe 이후 최고.'''
PopMatters
당시 런던에서 리버틴즈에 대한 열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 세대 비틀즈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소문이 났던 수준이다. 이 데뷔 앨범 하나로. 물론 저 말은 그냥 추측으로만 끝났다.
이제는 개리지 락계의 모던 클래식이 돼버린 앨범.
2. 평가 및 판매량
도허티 커리어상 최고의 평을 받는 앨범이나 차트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는 #35를 차지하고는 내려갔는데 발매 당시만 해도 언더에서 더 알아주다 보니 메인스트림 진출 직전이라 그렇다. 그 이후에 리버틴즈가 본격적으로 거의 아이돌화 되는 유명세를 타면서 드디어 빛을 보게 되고 온갖 리버틴즈를 위시한 인디 록밴드들이 속출하면서 이제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참고로 이 년 후 발매한 재결합 이전 마지막이자 두 번째 앨범은 '''차트 1위를 찍는다.'''
'''그런데 발매 당시부터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꾸준하게 팔리긴 해서 결국 1년만에 UK Gold (10만장)을 확정했다.'''
3. 배경
이 앨범이 발매될 당시 영국은 사회정치적으로 노동당이 정권을 말아먹던 시기였으며 계급 빈부격차는 갈수록만 늘어나는 경제불황 시대였다. 대처 시절 이후 가장 데모가 빈발하던 때이기도 하고, 잉글랜드라는 나라는 70년대 이후로 이만큼 늙었다고 절실히 느끼던 적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음악적으로, 영국은 정말 가난했다.''' 아예 락의 몰락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실제로 팝이 미친듯이 잘 나갔다. 링크된 게 브리트니 스피어스라는 것이 보여주듯 영국 뿐 만 아니라 미국도 락 쪽은 가난했다. 똑같이 몰락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말라깽이 뉴욕 양키 5명들이 바로 이 때 등장한다.
그래서 모두들 스트록스에 열광했다. 스타일을 떠나서, 스트록스의 음악은 단순함이 그 힘이었다. 킬러 후크가 없어도 멜로디라인을 만들어내는 이 신비한 분위기의 음악에 모두들 놀란 것이다. 이 때 가장 놀란 것이 "그 무언가"를 표현해내려고 했던 온갖 런던의 아마추어 신인 밴드들.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들, 그것도 뉴욕 출신이라는 일말의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정통 양키(..)라는 데에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음악 언론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상 2000년대 들어오자 락도 팝도 미국한테 다 놓치게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Is This It발매 시점을 전후한 2002~2003년경 영국 인디가 스트록스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기형적인 현상으로 이어진다.[3] '''리버틴즈도 당연히 이 심상치 않은 괴물 신인들이 전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NME는 2001년, 스트록스가 모든 것의 답이라고 말함으로써 영국 음악의 사실상 항복선언을 한다.[4]
스트록스가 2001년말 2002년초 첫유럽투어를 돌며 런던에 상륙했을 때 관중 속에는 19살, 20살짜리 청년 도허티와 배럿이 있었다.[5] 맨날 원룸에 처박혀 가진거라곤 기타가 전부며 굶던 그들은[6] 이 시기 레코드 계약도 못 맺어가지고 데모를 미친듯이 찍어내며 되는대로 아무 레코드사나 여기저기 찔러대며 고군분투하던 중이었다.
음악적 성과는 없었지만 벌써부터 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사실상 그들이 워낙에 잘 생기고 허우대도 좋다보니까 그 인상에 반한 여자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벌써 스토커나 그루피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팬들 집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공연하러 다니면 모두들 그들의 음악을 즐겼고, 칭찬해주었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그리고 본인들도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은, 아직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즉 부족하다는 것, 널리고 널린 기타 잡고 노래 좀 부른다던 영국에 넘쳐나는 밴드 중 하나라는 것 뿐, 여기서 만족하면 끝장난다는 위기 의식이었다. 피트와 칼은 프론트맨으로서 그런 '''책임의식을 혹독하게 느끼고 있었다.''' 스트록스가 곧 대세였던 이 시절, 그들은 2001년경의 Rough Enough Stuff라는 다섯곡짜리 저음질 레코뎅 세션을 통해 잘 드러났듯이 줄리안 카사블랑카스를 따라하기 위해 칼 배럿은 I Get Along을 아주 귀찮은듯이 중얼중얼 불른다.[7]
피트 도허티는 한 술 더 떠서 프랭크 시나트라 스타일로 Music When The Lights Go Out을 불렀다. 답이 없는 망버틴즈 시기.
2001년경 밴드 숙소에서 팬들과 함께. 위쪽 찬장에 피트가 신문에서 오려놓은 향후 앨범 커버가 될 사진이 보인다.
절실하게 레코드사를 찾아 헤매던 그들은 2002년 6월 드디어 '''스트록스와 같은 소속'''[8] 인 러프 트레이드와 계약을 따낸다.[9] 사장이자 앨런 맥기와 함께 이 바닥의 발마당이자 대부인 제프 트래비스[10] 가 이들과 계약하는 데 결정적으로 찬성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들을 '''영국판 스트록스'''로 보고 있었던 것. 그러나 간부진 중 후에 1965저였던 제임스 레코드를 설립하게 될 비교적 젊은 매니앤디아컷은 얘들은 한 탕 거하게 할 애들이다하고 예상했다고. 아무튼 당시 분위기가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지금 영국 록에 체면 치레해주는 정도만 되어라...'''정도였는데.'''
때는 Is This it이 발매되고 1년 남짓되가고 월드컵도 끝난 2002년 10월. 도허티와 배럿 일당이 만든 12곡짜리 신보 LP가 런던을 강타한다. UK차트 40에 들긴 했지만 #35라는 다소 실망스런 수치. 그런데 사람들은 피트와 칼에 대해 무수히 떠드는 진기한 일이 벌어진다. 이상한 소문이 돌았는데, 그 시작은 '''지금 동런던[11] 에 땟국물 흐르는 누더기 차림의 4인방이 요 일년간 여느 쩌리 밴드들이 떠들고 다녔듯이 자기네들이 영국의 스트록스랍시고 떠들고 다닌다'''로 시작한다. 그런데 몇 달 후, '''영국의 스트록스라고 떠들던 애들이 실은 자기네들은 스트록스를 시시하다고 생각하더라'''[12] 로 바뀐다. 그리고 2003년, '''NME의 편집장 크리씨 뮤리슨[13] 이 사설로 현재 누더기 차림의 밴드가 런던 내에서 스트록스를 압도하고 있다'''고 말하며 불과 몇년 전 그들이 스스로 선언한 스트록스 담론을 취소한다. '''여기서 누더기 차림의 밴드란 당연히 리버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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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앨범 발매 직후 NME 커버에 서며. 리버틴즈가 활동하던 2002부터 2004년까지 NME는 판매부수가 3배로 뛰어오르는데 농담이 아니라 이 당시 리버틴즈가 안 등장하는 때가 없었다.
Is This It과 Turn on the Bright Lights 같은 개러지 명반들과 달리, Up The Bracket은 그 시작부터가 아예 달랐던 앨범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귀찮아 하는 듯한 허세 가득한 허무 따위는 하나도 없는, 열정으로 넘치는 런던 노동계층의 서사시였던 것이다. 매체들의 평가에서 잘 드러나듯, '''Up the Bracket은 분명 개러지 락의 조류에 속한 앨범이면서도 정서적으로는 Definitely Maybe같은 브릿팝 클래식에 더 가까운 상반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즉, 굉장히 '''영국적'''인 음악이었던 것이다. 앞의 두 앨범이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혹은 퇴폐미의 정점을 찍는 그런 스타일이었다면, 리버틴즈는 허무의 감정이라곤 티끌도 없는 오히려 그 정반대, 똘끼 충만한 패기와 청춘이 담긴, 신인들만이 낼 수 있던 앨범이었다. 같은 개러지에 속하되 그 정반대를 달렸다고 할 수 있는, '''제대로 영국적인 "그 무언가"를 표현해냈던 데뷔 앨범인 것.'''
외로움과 고독, 첫사랑과 이별, 그리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가난과 마약 중독에 대한 회한.
'''갈 길 잃어버린 영국의 청춘들에게 바치는 약간 아프지만 희망을 놓지 않는 찬가''', 이것이 바로 Up the Bracket이라는 앨범이 가지는 상징성이다. 리버틴즈가 지금은 퇴폐와 마약, 막장의 대명사같은 이미지지만 초기 데뷔 당시만큼은 주변의 개러지 밴드들과는 차별화된 개성이 두드러지는 점도 바로 희망을 놓지 않는 이런 열정적인 자세였던 것.
리버틴즈는 두 앨범 모두 클래시의 믹 존스가 프로듀서로도 활약해 유명한데 믹 존스가 프로듀스하는 스타일이 방관한채 내비두거나 자기도 기타 하나 잡고 같이 반주 넣으면서 '''수십개씩 녹음해서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 고르기(..)'''. 원래는 스웨이드의 기타리스트 버나드 버틀러가 프로듀서였는데 조니 마와 함께 영국 기타계의 신동이라 불리우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완벽주의자였던 버나드와 피트의 공존은 곧 '''전쟁'''의 시작이었다. 리버틴즈의 데뷔 싱글 'What a Waster'는 버나드 버틀러가 프로듀스하였는데 후에 데뷔 앨범의 프로듀서가 믹 존스로 바뀐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둘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2003년에 싱글 'Don't Look Back into The Sun'의 프로듀싱에 버나드 버틀러가 다시 배정됐는데 피트 도허티는 녹음 내내 얼굴도 안 비추다가 마지막에 곡의 프로듀싱을 다 완성시켜놓자 나타나서는 '''"그럼 이제 노래 부를테니까 제 보컬 입혀주세요"'''하고서는 20분 동안 두세번 녹음하고는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버나드 버틀러는 후에 "하여튼 피트 도허티는 진상이다"라고 회고하였고 피트 도허티는 "'Don't Look Back into The Sun'은 순수한 리버틴즈 스타일 곡이다. 나와 칼이 만든 곡인데 버나드 버틀러는 너무 조종하려 든다."고 일갈했다. 그에 비해 믹 존스에 대해 말하길 "그는 완전 내 스타일이다. 우리가 녹음하면 그는 심지어 녹음실 안까지 와서 노래에 맞춰 춤도 췄다. 진짜 빌어먹을 노인네 맘에 든다."(..)
앰프를 최대로 높여 찢어질 듯한 톤을 내면서도 꾸준히 찰랑거리는 리듬 기타와 짧지만 강렬한 솔로와 타브를 동반한 리드기타 그리고 동시에 두 기타가 만나는 전형적인 펑크 코드 사운드, 보컬 트레이닝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한 울듯말듯하다가도 고성방가 수준의 괴성을 질러대는 피트 도허티의 흐물거리는 보컬스타일, 딱딱 들어맞는 드럼 비트와 베이스의 리듬 섹션까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및 인디/개러지 락에 입문하기 위해서 반드시 들어야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앨범 중 하나다.
결론적으로 기타 두 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로큰롤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조합으로 이루어진 앨범이다. 신디, 키보드, 피아노, 현악기나 이펙트 등 아무것도 없다. 그냥 펑크/락 그 자체.
4. 트랙 리스트
'''전곡 도허티-바랏 작사,작곡이다.'''
- Vertigo
- Death On The Stairs
- Horrorshow
첫번째 싱글 컷. 리버틴즈를 대표하는 곡.
항목 참고
- Boys in the Band
- Radio America
- Up the Bracket
두 번째 싱글 컷.
역시나 가사가 좋다고 알려진 곡이나 여지없이 너무나 영국적이다. 코러스가 중독성 있는데 묘하게 서정적이다. 도입부의 도허티의 비명(..)은 단순한 비명이 아니라 'Get Out of it!'하고 외치는 거다. 녹음 전날 술을 너무 먹어서 혀가 꼬여서 그렇게 됐다 하는데 프로듀서인 믹 존스는 그걸 보고 '녀석, 재밌네 ㅋ.'하면서 껄껄 웃었다는데 칼 배럿은 기가 막혔다 한다. 역시나 전형적인 리버틴즈 곡.
- Tell the King
- The Boy Looked at Johnny
- Begging
- The Good Old Days
- I Get Along
[1] 10점 만점 기준[2] '빌보드 Top200'이 아니라 'Top Heatseekers'라고 빌보드 100위 이하의 앨범 차트를 따로 산출해서 낸 통계량이다. 사실상 Top 200에서 113위 정도라고 보면 된다. 빌보드 Top200에 검색해보면 차트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 참고로 2집은 111위(Billboard 200)(....) 어차피 리버틴즈는 미국 진출과는 거리가 먼 밴드이다.[3] 지금이야 찾기도 힘들지만 그 때 데뷔하던 밴드들은 그냥 스트록스의 판박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4] 물론 얘네는 자기네 관점이 곧 영국락을 대변한다고 생각함으로 적당한 필터링이 필요하다. 사실 얘네가 영국록 필패론이자 자승자박 논리인 스트록스 담론을 만든 애들이기도 하고.[5] 당시 갓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악틱 몽키스의 알렉스 터너도 이 때 스트록스를 처음 보고는 말 그대로 충격을 먹는다.[6] 둘은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온갖 알바를 다하고 구걸하고 훔치고 팔았다.[7] 업 더 브라켓에 실린 I Get Along은 본디 칼의 스타일, 말 그대로 분노를 잔뜩 담은 정통 로큰롤 중 하나인데 이 노래가 스트록스화되었던 것... [8] 정확히 말하면 스트록스의 영국 수입사. 스트록스는 북미 밴드다.[9] 후에 피트 도허티는 이 날 정말 떠나갈 듯이 기뻐서 레코드에서 나오는 중간에 울어버렸다고 한다.[10] 상술한 매우 가난했던 시기에 피트 도허티는 남창짓이라도 하려고 나섰는데 고객이 이 제프 트래비스를 닮아 역겨워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11] 이스트 런던. 치안이 영 좋지 않다. [12] 이 당시에 영국에서 인디 락하면서 스트록스를 깐다는 것은 = 2009~2011년경에 데뷔하는 걸그룹이 소녀시대보고 아 그 선배들 순 거품 아닌가염?ㅋ 정도로 이해하면 딱 맞겠다.[13] 2009년 NME 주간으로 승진. NME를 주간 리버틴즈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다...[14] 씨발을 니애미로 바꿨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