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병
1. 영국의 경제 현상
The British disease / 英國病
영국의 경제가 몰락한 원인이 됐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영국의 사회 상황.
1.1. 개요
1960년대 초에 서독의 언론이 영국 노동자의 비능률성을 가리켜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랜 대영제국의 번영을 뒷받침해 온 중산계급의 쇠퇴가 그 요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겐 20세기 중후반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와 함께 최고의 떡밥 거리이다. 과다한 복지 정책 등 정부의 지나친 경제에 대한 간섭의 폐해를 지적하는데 가장 좋은 예시가 바로 영국병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병의 경우엔 그 자체 뿐만 아니라 해결 방법도 대단히 논란이 큰 사안이라서 함부로 속단할 내용은 아니다.
1.2. 역사
1.2.1. 호시절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그럭저럭 호시절을 맞고 있었다. 영국이 특별히 잘해서라기보다는, '''전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입었기 때문이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같은 훌륭한 경제학자를 낳은 영국은 케인지언식 경제 정책에 베버리지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안정적이고 괜찮은 복지경제를 이룩했다. 비용보다 편익이 적은 식민지는 줄이고, 군비는 축소했으며, 보수당과 노동당을 가리지 않고 안정적인 복지 정책을 추진했다.
1.2.2. 발단: 저효율, 고임금의 영국 경제
영국병의 근본적 원인은 고비용, 저효율인데, 이는 상당부분이 영국 정부는 비효율적인 산업을 구조조정 없이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유화"를 단행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1971년 영국 자동차 산업의 심볼인 롤스로이스를 국유화하고 국민의 세금을 투입해 살리려고 한다.
영국 속담 중에 '''"새롭고 현명한 일보다 늘 하던 어리석은 짓이 낫다."'''란 속담이 있는데, 이는 전통적 영국인들의 보수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하튼 60년대 내내 영국 경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젊은이들은 직장을 계속해서 옮겨다니는 식으로 실업수당을 받아먹고 사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 비슷한 양상. 기업들은 별다른 혁신 없이 경직되기 시작했고, 기업의 실적이 좋지 못한 경우 대부분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방식의 경영합리화를 고수했다. 이는 결국 노동조합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지속적이고 산발적인 파업이 반복되었다.''' 1967~1969년 당시 파업은 50%나 증가했으며, 이런 제살 깎아먹기 식 구조조정으로 노사갈등은 병림픽 양상을 띄게 된다.[1]
여하간 경제의 활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독일과 일본의 기업들이 영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었고, 유럽 대륙은 전쟁의 참화를 딛고 재도약에 나서기 시작했다. 샤를 드 골은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CC)에 가입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그에 반해 영국은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한 것을 제외하면 별로 변화가 없었다. 오죽하면 비틀즈가 등장했을 때 '''빅토리아 시대[2] 이래 미칠듯이 재미없는 영국을 신나게 바꿔줄 영웅'''으로 묘사되었을 정도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영국을 보면, 이 때 영국 근로자들의 생산성은 미국보다 50% 낮았고, 서독보다 25%나 낮았다. 영국의 1인당 GDP는 1960년대만 해도 세계 9위 였지만 1971년에 15위, 1976년에 18위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 현상을 "영국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970년까지는 영국의 몰락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60년대 노동당의 해럴드 윌슨 총리는 국방비를 다시 삭감하고 대학 교육 확대와 기술 혁신으로 일시적으로 경제를 안정시켰다. 디플레이션 정책과 대타협 정책 역시 1기 윌슨 내각의 특징이었다. 이 때문에 헤롤드 윌슨의 1기 내각은 최초의 경제 구조조정 정권, 통화주의 내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좌파 내각이었던 윌슨 정권이 물가 안정을 위해 가장 보수적인 통화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1.2.3. 전개: 고복지와 노동운동 격화
다른 나라와 달리, 영국은 노동운동이 산별노조 이상의 중심이 되는 상부 조직이 없었다. 이것이 가장 문제가 된 이유가 정치권과 노동조합(노동운동세력) 전체간의 협상과 타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른 서유럽/북유럽 국가들도 노조 조직률이 60~70%에 달했지만 중앙집권화된 노총 단위로 묶여있었다. 따라서 정부와 노조가 국가경제를 놓고 일괄적인 협상이 가능했다. 영국과 비슷한 고비용-저효율 경제상황에 처해있던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은 노조-사용자(기업)-정치권 간의 협상끝에 노조는 파업과 임금인상요구를 자제하고, 대신 기업은 일자리를 보장하며, 정치권은 이를 정책으로 보장하는 대타협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이런 노사정 대타협 방식은 노동운동과 좌파 정당이 강력했던 대다수 유럽국가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대단히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잡았다. 거기에 노동자계급을 대변한다는 좌파정당들도 노조와는 별개로 행동하면서 과도한 파업을 견제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아예 정치인들이 산별노조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직접 노조를 통제하고 있었다.
반면에 영국 노조는 상부 조직도 없었지만, 여러차례의 노동당 정치 제도 개혁으로 하원의원과 노조는 점차 분리되었다. '그림자 내각'으로 알려진 주요 정치 거물들과 산별노조의 고위직 간부와의 합종연횡은 점차 불안정해졌다. [3] 반면 보수당의 경우 이념적 차이 때문에 노조와 협의를 하는 것이 그닥 가능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노사간의 충돌은 영국 경제를 갉아먹었는데, 노조는 자신의 요구와 맞지 않으면 비공식적으로 파업하는 것을 밥먹듯이 하였다. 1973년에 영국 석탄 산업 노조는 오일 쇼크로 석탄 산업이 반사 이익을 얻자, 이를 기회로 과도한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하고 석탄 공급량을 제한하였다. 이들의 파업은 곧바로 철도와 전기 등 공공 부문 노조들의 요구로 옮아갔다.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보수당 출신의 에드워드 히스는 부실기업 퇴출, 민영화, 노조 약화를 기반으로 한 셀스던 합의를 기획하고 석탄 산업 노조들이 석탄 공급량을 제한하는 파업을 그만 둘 것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1974년 표를 잃어 4년만에 총리직에서 낙마했다. 퇴임의 변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정부냐 노조냐. 국민들이 참아내지 못할 상황이 오고 있다.'''
만성적인 파업과 저생산성 문제뿐 아니라, 과도한 복지 문제도 있었다. 직업, 지위, 수임, 연령, 성에 관계없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당시 영국의 복지모델은 연금보조와 무료 의료시술(국립의료지원시스템, NHS)은 물론 결혼수당, 임신수당, 아동수당, 과부수당에서 장례수당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보장하는 제도였다.
1940년대만 해도 그 비용은 GDP(국내총생산)의 4%에 불과했으나 40년후 1980년대 영국의 사회보장비는 나라 예산의 30%, GDP의 11%로 불어났다. 그래서 그게 그래도 뭐 케인스이론처럼 효율성이라도 높여주면 좋은데, 그런건 드물고 재정적자만 심각해져갔다. 그렇게 되니 이 30%나 되는 재정 부담은 '''국민의 유리지갑에서 충당해야만 했다.'''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다.
영국의 복지는 빈부격차가 줄어들고 계급 이동이 활발한 사회가 되기보다는, 서로 서로의 계급에 만족하고 사는 사회적 타협의 관계로서 유지되었다. 1970년대에도 여전히 영국은 중산층이 넓었을 뿐, 지니계수로 따지면 빈부차가 심각한 나라였다.[4]
1.2.4. 위기: 노동당의 국유화(AES; 대안경제전략) 전략과 실패
1974년, 영국 노동당은 산업자원부 장관인 토니 벤과 "벤주의자" 정파가 주도한 "대안경제전략(Alternative Economy Strategy)"을 내걸었다. 주요 산업과 대기업을 국가지주회사(국민기업위원회/NEB)로 포괄하는 대폭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선거 강령인 AES로, 2차 윌슨 내각은 집권까지 이루었으며, 윌슨 총리는 복귀해 그 해 두 번의 총선에서 모두 승리했다. [5] 당시 국가지주회사는 국민기업위원회라는 형식으로, 영국의 100대 기업 중 25개 기업을 공기업으로 전환하고, 나머지 기업들과는 계획 협약을 맺어 국가가 대기업들의 생산이나 투자, 기술, 고용, 가격 정책을 경제정책과 결합시키는 방안이었다.
또 "사회협약"을 맺으면서 파업을 줄이고 노사 대타협을 이루려고 했으며, 엄격한 물가 통제와 외채 상환을 통한 해외 자산의 매각, 긴축 중단, 군비의 대대적 축소 등을 한번에 시행했다. 가히 영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진보적 정책이었다.
1975년, 노동당 내각은 최대의 자동차 기업인 브리티시 레일랜드[6] 와 항공우주 기업인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Ae)도 국유화했다. 영국통신, 브리티시 가스, 내셔널 버스, 영국국유철도, 영국항공 등 기간산업들은 진작에 국영화된 상태였다. 이거 자체가 대단히 특이한 정책은 아니다. 특정 기업이 국유화 되어 특정 산업을 대표하게 되는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의 한국도 이른바 그룹간 "빅딜"을 통해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였다.
1975년, 노사대타협의 결과로 석탄 광업 근로자들의 임금이 30%나 올랐다. 그러나 올라간 임금은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고 대외적으로는 1차 오일쇼크 문제도 함께 닥쳐왔고, 사실 오일쇼크로 대타격을 입지 않은 경제나 정권이 드물듯 여기도 그랬다
1.2.5. 영연방 경제 블록의 해체
1960년대~70년대 초 영국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다시 유럽경제공동체(ECC)에 가입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였고, 이로 인해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 인도, 케냐, 싱가포르 등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영국은 1940년대와 50년대 영연방 경제 블록의 도움으로 전후 위기를 극복하였다. 하지만 1960~70년대 기준으로 영연방 국가들은 경제 문제 혹은 내정 불안으로 인해 영국에게 상품 시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었고, 영국은 경제는 물론 외교-안보적인 측면에서도 유럽 공동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유럽 공동체 가입 의사를 강하게 타진했고, 프랑스 샤를 드골 정부는 갑의 입장에서[7]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을 막아섰으나[8] , 68 혁명으로 드골 정부가 물러나고 들어선 신정부가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을 허가하며 영국에게는 영연방 경제 블록 혹은 유럽 경제 공동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닥쳐오게 된다.
당시 유럽경제공동체는 영국에 EFTA의 탈퇴와 유럽관세동맹 가입을 요구했는데, 영국이 이를 수용하게 되면 영국이 중심이 된 영연방 경제 블록의 붕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9] 야당이었던 영국 노동당 내에서는 영연방을 버리는 것과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에 대해 반대 의견이 강했으나[10] , 영국 보수당 정권은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결국 영연방이냐, 유럽이냐 선택하라는 유럽의 반협박과 영국 내의 논쟁 끝에 영국은 1973년 1월 영연방을 버리고 EEC에 가입했다.
1974년 영국 노동당은 집권하여 EEC 탈퇴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고, 결과는 EEC 잔류의 압도적 승리였다.[11] 영국 노동당은 문제가 되는 EEC 가입안의 재협상과 영연방 국가들을 위한 몇몇 제도 확보 정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영국 시장 의존도가 높던 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 인도, 케냐, 스리랑카 등 영연방 국가들의 경제에 큰 충격이 가해졌으며, 이후 영국과의 경제 관계가 소원해지게 됐다.[12]
특히, 영국 시장 의존도가 크고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바라지 않던 뉴질랜드는 내각 총리와 장관들, 고등판무관이 웨스트 민스터를 방문해 뉴질랜드를 버리지 말 것을 읍소하다시피 하였으나, 결국 영국이 EEC에 가입하게 되면서 강제로 영국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때 뉴질랜드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게 됐다.
덧붙여 영국은 이 시기 유럽 공동체의 요구에 따라 영연방 국가들과의 자유무역과 더불어 자유이주 정책도 폐기했다. 영연방인에 대한 까다로운 입국 심사와, 해가 갈수록 엄격해지는 비자 정책은 훗날 영연방인들이 영국 정부, 더 나아가서는 유럽 공동체에 가지는 불만을 야기하게 됐다.
1.2.6. 파국: IMF 구제금융과 '불만의 겨울'
결국 1970년대 후반기 영국은 지속적인 임금상승 그리고 생산성의 저하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하여 소위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영국병에 시달렸으며 급기야는 1976년에 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통화주의적으로 변화된 IMF는 40억 파운드를 지원하면서 팽창재정정책의 포기와 금리 인상을 통한 디플레를 요구했다.
일시적 평화로 안일하게 허둥지둥하던 내각과 노조는 동력이 약화되었고, 노동당내 정파 갈등은 다시 불거졌다. 결국 캘러핸 총리의 노동당 정권은 AES 정책을 전면 철회하고 교육, 보건 복지 분야 예산을 '''전후 역사상 최초로''' 삭감해야했다. 케인즈 주의 강령 역시 폐기되었다. 가뜩이나 경기 악화로 75년 임금 인상이 정지되었던 노조는 대 파업에 나섰다.
마침내 1978년,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Discontent)이 찾아왔다. 전국 단위 총파업과 함께 환경미화원과 장의사들까지 데모에 동참하여 길거리는 쓰레기 더미로 뒤덮이고, 썩어가는 시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등 영국 전역이 대혼란에 빠졌다. 노동당이 이룩한 영국의 복지 체제는 이렇게 길고 긴 삽질을 거쳐 허무하게 무너졌다.[13]
1.3. 대처리즘과 블레어리즘 그리고 그 이후
1.3.1. 대처리즘
이에 드디어 노동당 정권이 선거에서 대패하고 보수당이 집권했다. 이 때 노동당의 중도좌파는 사회민주당으로 빠져나갔다가 자유당과 합당해 영국 자유민주당을 결성한다. ''''철의 여인''''으로 불린 마거릿 대처 총리는 1979년 집권하자마자 저비용·고효율로의 경제구조의 전환을 통하여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하는 경제 전부문에 걸친 유연화 정책에 착수했다.
대처리즘의 골자는 재정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 등으로, 이는 공공부문 개혁으로 집대성됐다. 영국항만은 민영화 이후 수익이 150만 파운드에서 680만 파운드로 급증했고, 영국항공은 종업원 1인당 생산성이 50% 이상 올랐을 정도였다.
고금리정책을 바탕으로한 금융 중심 정책은 상당한 성장을 보였다.[19] 공공주택 민영화 정책은 주택 경기에 한몫 하면서 많은 소시민들을 집을 가진 소자산 중산층으로 만들었고, 이들이 정권의 지지자가 되었다. 또 근로윤리의 측면에서도 자수성가한 대처는 보수적 근로윤리, 가정관의 화신과 같았다.
신자유주의의 교과서로 불리는 대처리즘으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긴 했지만 완전히 치료됐다고는 말할 수 없고, 대처리즘이 영국식의 선진국병을 치료하는 "근본적인 처방"이나 "모범 답안"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렵다. 더구나 지나친 민영화와 노조 약화, 복지 후퇴, 고용불안은 영국의 전통적인 사회관에 대한 도전이었고, 양극화를 촉진시켰다. 이는 보수당내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보수적인 영국인 상당수에겐 이것은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이 아니었다면 대처는 조만간 물러나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11년 211일이라는, 20세기 최장 임기의 내각을 달성했으며, 그의 후임인 존 메이저 역시 6년을 집권했다. 그렇게 대처의 시대는 18년간 이어졌다.
물론 대외 수치적으로 대처의 극약처방은 분명히 변화가 뚜렷했던 것이었다. 한 나라, 나아가 세계의 분위기를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한국에서도 대처리즘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써먹혔던 떡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도 90년대 초반 정계 은퇴 선언 뒤 영국 유학 시절 대처를 공부했고, 이는 김대중 정부가 역대 한국 정부 중 가장 시장지향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하나의 이유로도 작용했다.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에서도 대처가 확립해놓은 '일하는 복지' 담론은 계속 써먹혔다.
여하간 한때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를 표방했던 영국의 경제와 사회 복지 모델은 그 전까지만 해도 외국의 칭송을 받던 모범이었지만, 지금은 영국은 하나의 모델로서 주목 받지는 않는다. 영국병의 원인이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 그러나 민영화나 시장지향적인 개혁이라는 패러다임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칠레나 스웨덴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3.2. 블레어리즘
대처가 물러나고 존 메이저 시대를 거쳐 1997년 총선에서 정권을 잡은 것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그는 엔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즉 효율을 높이면서 복지도 하는 두 토끼를 잡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 "신 노동당" 정책은, 영국 내의 금융 개방성을 높이면서 복지를 복원하고, 또 복지를 상당 부분 시장원리에 맡기면서 효율성을 달성하는 체제였다.
이런 유연하지만 나름 진보적인 "신개혁주의(New progressivism)" 체제는 마침 윌리엄 제퍼슨 시기의 미국과 박자를 맞추면서 말 그대로 세계적인 대박을 쳤고,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절정을 맞았다. 영국은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했으며, 대처의 유산이었던 금융 '프렌들리' 정책을 수용해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문화산업 역시 영국을 지탱하는 강력한 힘이다.
이런 대박과 함께 토니 블레어는 10년(1997년~2007년)을 집권하고 전후 두번째 최장수 총리가 되지만, 퇴임 이후 고든 브라운 때 대침체가 몰아닥치며 영국은 다시 한번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또 블레어리즘 역시 양극화를 치유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점점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대처리즘의 노동당 버전이었다는 평가.
그래서 이 소제목의 타이틀도 그냥 "결과" "해결" 이런게 아니라 그냥 "대처리즘", "블레어리즘"이다. 영국병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고,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주축으로 한 블레어리즘은 영국 노동당의 장기 집권을 이끌었으나, 고든 브라운 전 총리 대에 한계를 드러내었고, 이는 보수당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됐다.[23] 이는 영국 노동당 내에서 우파 블레어리즘에 밀려있던 좌파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됐고, 결국 영국 노동당 내 극좌파 성향의 제레미 코빈이 당수로 취임하게 됐다.[24] 현재로서는 영국 내에서 블레어리즘에 대한 평가는 테레사 메이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과 제레미 코빈 당수가 이끄는 노동당 양쪽에서 다 좋지 않다고 보는 게 맞다.
데이비드 캐머런 시대의 영국은 오히려 1970~80년대 영국의 경제 위기를 탈출하는데 도움을 준 유럽 연합과 유럽 공동체로부터 탈퇴하자는 주장이 부상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만 최근 EU 탈퇴는 영국의 사정이 나쁘니 탈퇴하자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데 왜 EU 같은 막장 경제 체제 하에 놓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탈퇴하자는 쪽에 가깝다. 게다가 영국의 대EU 의존도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고, 미국이나 영연방 국가들과의 교역량이 증가하고 있으며, 한국, 중국 등 신흥 국가들과의 관계가 중요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적으로는 EU와의 경제적 문제가 아니고도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은 유럽이 아니다'는 전통적인 인식이 남아있기도 하다. 또한 영국은 여전히 열강의 상석에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말이 많아도 그렇지 2010년대 현재에도 영국은 경제규모로 세계 5위고, 세계 유수의 기업도 많으며 출산율이 높아 미래 전망도 밝고, IT와 BT 그리고 인문학이 융합되는 새로운 경제 체제의 등장에 가장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양극화가 좀 심한 것이 문제이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1970년대의 막장 상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황이 좋은 편이다.
1.3.3. 브렉시트와 테레사 메이
2016년 6월 24일, 브렉시트가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영국 경제가 단기 충격을 극복하고 순항하고는 있으나, 앞으로 중장기 전망과 전략에 대한 대규모 수정은 어쩔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국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영연방 국가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과, 기존의 금융업 중심의 경제 체제에서 탈피해 4차 산업혁명이라 명명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의 등장에 대처하는 등의 어려운 문제들이 영국 경제 문제의 위기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트 캐머런 사퇴 이후 테레사 메이 총리가 브렉시트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국을 안정화시켰다. 그녀의 정책 성향 자체가 위의 대처리즘 혹은 블레어리즘으로 묘사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데, 사회-노동 정책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인 면을 동시에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메이 총리의 이런 유연한 대응이 브렉시트 충격 극복에는 도움을 주고 있으나, 동시에 우파와 좌파 둘 다로부터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결국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의 혼란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하고 조기 퇴진했다.
1.4. 기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서 일본은 패전을 겪지 않으면서, "망한" 독일과 달리 "일본병"을 겪고 경제의 활력을 잃는다고 설정되어있다. 대단히 재미있는 포인트.
근데 실제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영국병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재미있는건 저 책이 나온 때는 1987년이라 "일본이 세계를 먹는다!"라는 이야기도 있었다는 점.
2015년 7월 21일, 영국 의회는 향후 5년간 120억파운드(약 21조원) 복지 지출을 삭감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복지제도예산 개정안을 상정해 찬성 308표, 반대 124표로 의결했다. 야당인 노동당의 극렬한 반대가 우려되었으나 노동당의원들의 기권으로 통과되었다. 현지 언론은 사실상 복지축소에 대하여 묵인으로 평가했다.#
토마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는, 영국이 그 동안 거품경제가 끼어 있었고, 그 거품이 꺼진 것에 불과하므로 '영국병'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5. 관련 문서
2. 영빠
영국에 심취하다 못해 사대주의까지 하는자로, 영어로는 앵글로파일(anglophile)이다.
2.1. 예시
- 귀네스 팰트로 - 어느 영국인 가수와 결혼 한 이후 이렇게 되었다.
- 아서 왕 등 영국 신화 애호가.
- 앨리스 등 영국산 명작동화 애호가.
-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의 멋진 규모를 동경하는 경우.
-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영국을 판단하는 부류까지 있다.
2.2. 밀덕 영빠
밀덕들 중에서 영국제 장비나 영국군을 좋아하는 부류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정보를 얻기는 쉽지만[25] 미빠에 비해서 이상하게 인지도가 없다.
밀덕 영빠들이 영국군에 입문하게 되는 이유는 대체로 전세계를 상대로 패권을 휘두르던 대영제국 시기의 강력함에 매료된 경우가 많다. 해군 덕후의 경우에는 근현대에 실사판 버스터 콜의 위력을 보여주던 함대와 넬슨을 위시로 하는 기라성 같은 제독들의 위엄에 반한 경우가 많고 육군 덕후의 경우에는 제국주의 시기에 레드 코트로 대표되는 해군 못지않게 강한 육군으로 나폴레옹 같은 난적을 쓰러뜨리고[26] 온 지구에 유니언 잭을 꽂으며 땅따먹기를 하던 강력함에 주목한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무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 밀덕들도 영국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차, 자주포, 블록버스터, 그랜드슬램, 백린탄, 덤덤탄, 클레이모어, 전투기, 수류탄, 맥심 기관총, 제트기, 항공모함과 함재기, 실용 수직이착륙기 등 수많은 무기체계를 최초로 만들어낸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리-엔필드 소총이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L115A1 저격소총, F-35B(공동개발) 등과 같은 괜찮은 물건도 나온 바 있고.
또 다른 면으로는 판잰드럼, 퍼니전차, 하버쿡, TOG, 스텐 기관단총, 리벤스 화염방사기, Mk.1 아처, A13 커버넌터, 등 각종 기행적인 무기들에 관심을 보이는 영빠 밀덕도 꽤 있다.
[1] 여기에 영국인은 적극·과감·냉철·끈기·자기희생·이타주의를 미덕으로 삼아왔으나 근성이 약해졌다... 라는 소위 "근로윤리"론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도덕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간 전후 어느 나라나 그랬으니.[2]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기로, 대영제국의 전성기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엄격한 기독교적 윤리가 요구되던 시대이기도 하다.[3] 노동당은 근본적으로 노조가 곧 정당의 일부고 당원인 정치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개별 노조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차단한 건 1990년대 이후이다. 토니 블레어의 소위 신노동당 노선(제3의 길)이 등장한 것도 노조와의 관계를 절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그 덕분에 노조와 정당(의원단)은 더더욱 따로 놀게 되었다.[4]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영국의 계급 구조가 '''마름모꼴'''로 그려진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5] 두 번의 총선이 있었던 이유는 '헝 의회' 때문이었다. 헝 의회에 대해서는 영국 자유당 참조.[6]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이사였던 조지 턴불은, 이후 현대자동차에 의해 스카웃돼서 훗날 현대차 부사장에 오른다. 그는 현대차의 첫 고유 모델 현대 포니의 개발에 기여하였다.[7] 참고로 프랑스는 1967년 전체 경제 규모에서 영국을 추월했다. 이게 다시 뒤집힌 건 1999년의 일이다. 이후 대침체 이후인 2009년 환율문제로 잠시 프랑스가 역전했으나, 금융위기에 이어 덮쳐온 유로존 위기와 산업 구조 문제로 프랑스 경제가 침체에 빠져들며 또다시 영국에게 추월당했다.[8] 샤를 드골은 영국을 유럽과는 다른 이질적인 국가로 보았다. 그는 훗날 영국이 유럽 공동체에서 힘을 회복한 이후 다시 영연방과 미국에게 돌아가려고 할 것이며, 그 결과는 유럽 공동체에 파국을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9] 영국은 이전까지 영연방 국가들과 블록 내 자유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영국이 유럽관세동맹과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게 된다면 영연방 국가 상품 수입을 규제하고 대규모의 관세를 물려야 했다.[10] 이는 훗날 정통 좌파 노선을 따르는 제레미 코빈 현 노동당수가 브렉시트 캠페인 당시, 탈퇴 진영을 후원하던 보수당과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인 UKIP에 맞서 잔류 진영을 지원하는 것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이후 브렉시트 과정에 소극적으로 찬동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11] 이 때 EEC 잔류에 투표한 영국 기성세대가 2016년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선 탈퇴 진영의 주 지지층이 됐다.[12] 다만 여전히 영국은 해당 국가들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과 투자 파트너이다.[13] 시계태엽 오렌지로 유명한 소설가 앤서니 버지스는 귀족노조가 국가의 운명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갔다며 『1985』란 소설로 세태를 풍자하기도 했다.[14] 대처시대 영국의 경제성장률[15] 대처시기 GDP 대비 복지예산[16] 대처시기 GDP 대비 국방예산-스톡홀롬 경제연구소[17] '소득5분위배율'은 상위20% 계층의 소득을 하위 20% 계층의 소득으로 나눈 것, 수치가 높을 수록 불평등.[18] '소득5분위배율'은 상위11% 계층의 소득을 하위 11% 계층의 소득으로 나눈 것, 수치가 높을 수록 불평등.[19] 단, 이것이 국내산업의 경쟁을 지나치게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1992년 9월 16일의 검은 수요일 사건때 조지 소로스에게 한탕 크게 털리는 빌미를 제공해서 결국 폐기되었다...가 2000년대 도로 재개 되었다.[20] 블레어시기 영국의 경제성장률[21] 대처시기 GDP 대비 복지예산[22] 블레이리즘 시기 GDP 대비 국방예산-스톡홀롬 경제연구소[23] 2010년 정권 교체 때는 그나마 연립 정부 구성 실패 때문이라는 위안거리라도 있었지만, 2015년에는 보수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하고,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인 UKIP이 노동당 지지층을 흡수해 원내에 진출하는 사건이 터져 영국 노동당에 큰 충격을 줬다.[24] 사실 코빈 당수의 성향은 전통적으로는 정통 공화주의 좌파의 맥을 잇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다만 최근에는 영국 노동당의 우경화가 심해져 코빈 당수가 극좌파로 분류되곤 한다.[25] 영어는 다들 기본적으로 배우니까[26] 사실 웰링턴은 패배 일보직전 이었고 트롤러 그루쉬를 따돌리는데 성공한 프로이센군이 지원와서 이긴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