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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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치[1] 기타를 들고 있는 스미스 시절의 조니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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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nder가 만든 자신의 시그니처 Jaguar를 들고 연주하는 현재의 조니 마
Johnny Marr. 영국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하모니카연주자이다. 더 스미스의 '''모든 노래'''를 모리세이와 공동으로 작곡했다.[2]
1. 소개
2. 스타일
3. 솔로 활동
4. 여담


1. 소개


1963년 10월 31일에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출생시 본명은 John Martin Maher.[3] 매우 거친 맨체스터내 노동자 계층 아일랜드 커뮤니티에서 자랐고, 본래는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지만 기타를 치면서부터 해방감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0대때는 학교도 잘 가지 않고 장물 취득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하는 등 전형적인(?) 맨체스터 노동자 계급의 어린시절을 보냈다. 10살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하여 [4]13세에 처음으로 밴드를 조직했고, 이후 어린시절 부터 친구인 앤디 루크등과 함께 White Dice, Freak Party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다.[5] 1982년에 Freak Party가 해산한 직후, 마는 전부터 염두에 두고있던 모리세이에게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는 모리세이와 친해지기 위해 모리세이의 지인에게 접근해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에게 콤비로 일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더 스미스를 결성한다.[6] 이 때 마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7] 더 스미스에서의 전설적인 행적은 항목 참고.
스미스 해체 이후 마는 폴 매카트니[8], 프리텐더스, 더 더, 펫 샵 보이스, , 존 프루시안테등 많은 뮤지션의 앨범에 기타리스트와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한편, 뉴 오더의 버나드 섬너와 함께 일렉트로닉이라는 신스팝 밴드에서 활동했다.[9]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모디스트 마우스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거주지를 포틀랜드로 옮겼는데 여기서 영국의 인디밴드인 크립스의 멤버들을 만나 다시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크립스에서 활동했다. 이후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솔로 음반으로는 <The Messenger>(2013)과 <Playland>(2014)를 발표했다.
본래 꿈은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입단제의를 받았고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테스트까지 하였는데 맨체스터 시티의 테스트에서는 탈락했다고 한다. 그는 탈락의 이유가 선수들 중 자기 혼자 아이라이너를 그리고 왔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어쨌든 축구보다는 음악이 성격으로나 재능으로나 더 잘 맞았던 셈. 2020년 현재까지도 아이라이너를 그리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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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디스트 마우스 항목에도 있는 그(왼쪽에서 세번째)가 재적할 당시의 사진. 특유의 강한 인상이 눈이 띈다.
강한 인상때문에 오해할 수 있지만, 상당히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스미스의 로열티 지불 소송을 맡았던 판사의 말에 의하면 조니 마는 스미스에서 가장 지적이고 사교성 있는 인물이라고. 행동은 쿨하고 마음은 따뜻해서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고 한다. 또한 영국 대중음악계, 특히 인디씬의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감이 충만하면서도 상당히 겸손하다.[10] 스미스 결성 전에도 모리세이와 달리 맨체스터내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교가 있었고 모두가 그를 '조니'라는 퍼스트네임으로 불렀다고. 스톤 로지스이안 브라운도 그의 어린 시절 친구 중 하나이다. 현재까지도 모리세이와는 달리 영국의 많은 선후배 뮤지션들과 사이가 좋다. 오아시스노엘 갤러거도 그 중 하나.

내가 노엘 갤러거에게 기타를 준 적이 있어. 오아시스가 막 시작하던 시점에 동생[11]

을 통해 노엘을 알게 됐는데 공연을 몇번 보러 갔지. 그러다가 언제 한번 노엘이 공연 어땠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난, "훌륭해. 아주 환상적이지. 근데... 다른 기타를 썼으면 좋겠어." 라고 대답했어. 왜냐하면 걘 관객을 등진채 튜닝을 하곤 했는데 튜닝을 하는데 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거든. 바에 가서 음료를 주문하고 다시 돌아와도 아직도 튜닝을 하고 있었을 정도였지. 그래서 다른 기타가 필요할테니까 그냥 한 대 사라고 했어. 그러니까 걔가 (돈이 없으니) 당연하게도 "형이야 기타가 100대 정도 있으니까 그럴 수 있지만 우리는 가난하다고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난 내꺼 하나 빌려주겠다고 했지'''. 그러고 집에 가서 기타를 뒤져보기 시작했어. 너무 부실하거나 싼거를 줄 수는 없잖아? 제대로 된 걸 줘야지. 그러다가 기타를 한 대 찾게 되었는데 '''썬버스트 1960년산 Gibson Les Paul'''이었어. 진짜 비싼거야. '''그 기타는 피트 타운젠드[12]한테 받은건데''', "아 이거나 줘야겠다. 걘 이걸 받고 기절하겠지?"라는 생각에 빌려줬지.

...(중략)...

그 기타가 곧바로 노엘의 메인 기타가 되었고 걘 그 기타와 사랑에 빠졌어. 그래서 난 노엘에게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했지. 걘 그걸로 Live Forever를 썼을거고 다른 몇몇 노래들도 썼을거야. Live Forever 뮤직비디오(영국버전)에 (그 기타가) 나오거든.[13]

...(중략)...

몇달 뒤에 회사에서 전화가 왔어. '''노엘이 무대에서 관객이랑 싸우다가 기타를 휘둘러서 기타가 부서졌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저런... 그거 참 끔찍한 일이네요. 그래서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거죠?"라고 하니까 "기타 다른 것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라 하더라고. 기타를 뒤져보니까 블랙 레스폴이 있더라고. '''The Queen Is Dead 앨범 전반에 쓰인 기타야.''' 그래서 난 기타를 쪽지 한 장과 함게 보냈지. 이 기타는 좀 무거우니까 제대로 휘두르면 그 씨X놈을 골로 보내버릴 수 있을거라고.[14]

...(중략)...[15]

한편 스미스 때부터 사용하던 체리색 Gibson SG기타를 2000년에 공연 중 도둑맞았다가 2010년에 범인이 잡혀 환부받은 일도 있었다. 대인배인 마는 10년간 기타를 잘 간직한(?) 도둑을 용서하고 문제가 커지질 않길 바라서 도둑은 200시간의 사회봉사명령만 받았다.
2016년에는 100억의 펀딩을 주도해 장애인 대상의 특수학교를 세웠다.

2. 스타일


그의 기타 플레이 스타일은 지나치게 화려한 연주를 지양하는 등[16] 기타가 전면에 나오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마는 징글쟁글(찰랑찰랑)이란 용어로 대변되는 스타일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타리스트이다. 스미스 음악의 오리지널리티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데, 외국의 기타리스트들도 '아무도 조니마처럼 연주할 수 없다. 심지어 조니마 본인조차도'라고 말할 정도. 그만큼 객관적인 연주실력자체도 훌륭하지만 개성이 강해서 더 높게 평가 받는 케이스. 징글쟁글 스타일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징글쟁글'이란 용어 자체는 기타를 스트로크로 연주할 때 나는 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한 것이지만 '징글쟁글 스타일'이란 좀 더 복잡한 개념이다. 징글쟁글 스타일이란 만약 어떤 노래의 한 소절에 하나의 으뜸 화음이 있다면 기타리스트가 그 화음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소절에 오는 화음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으뜸화음에 다른 음을 찾아 추가시키거나 완전히 다른음으로 대체하여 그것을 코드로 만들어 스트로크와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연주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그의 연주가 다른 것과 다르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화음을 그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기타소리만 붕 뜨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곡과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들린다.[17]
이게 가능하려면 연주자의 멜로디와 화성, 진행법, 그리고 기타라는 악기에 대한 이해도와 연주실력이 엄청 뛰어나야 한다. 이런 징글쟁글 스타일을 구사하는 기타리스트들은 튜닝과 이펙터 사용도 두루 알아야 한다. 1960년대에 비틀즈버즈로부터 시작된 초창기 징글쟁글 기타연주 스타일을[18] 1980년대에 조니 마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조니 마 이후에도 여러 밴드들이 징글쟁글 스타일을 구사했지만, 징글쟁글 사운드를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는 기타리스트는 역시 조니 마이다. 그 외에는 Suede의 버나드 버틀러 정도가 잘 구사한다. 한편 마는 정규음악교육을 받은 바 없고 화성학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이걸 감각으로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다. 백문이불여일견, 리켄배커 기타로 트레이드 마크인 고유의 사운드를 내는 영상 한편 스미스 4집이나 B사이드의 'London'같은 곡들을 들어보면 퍼즈 사운드에도 일가견이 있고, 훵크적인 리듬 스트로크 등을 잘 들어보면 그가 기타히어로가 아니라고 해서 실력이 떨어지는 기타리스트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단순 기타 연주 실력 자체도 훌륭하지만 기타(+이펙터)라는 악기와 음악 전반에 대한 이해가 뼛속 깊이 되어있는 먼치킨'''이다.
스미스 시절에는 Fender TelecasterRickenbacker사의 기타에 Fender의 트윈 리버브 기타 앰프를 기반으로 한 멜랑콜리하면서 찰랑거리는 사운드를 선보였다. 스미스 활동 후반부터는 여기에 Gibson ES-355[19][20]특유의 톤을 기반으로 흑인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단순하지만 리듬감 넘치는 사운드로 모리세이의 보컬을 탄탄하게 받쳐주었다. 현재는 자신의 시그니쳐가 나온 펜더 재규어를 쓴다.
전자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버나드 섬너와의 일렉트로닉 시절을 봐도 그렇고, 펫 샵 보이즈의 Release 앨범(물론 이 앨범은 평소 그들의 스타일에선 조금 벗어난 음악이었다)에서 8곡의 기타를 친것과 더불어 펫 샵 보이즈의 여러 앨범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그외에 다양한 악기들과 사운드를 내는 모든 요소에 조예가 깊다. 하모니카 연주는 기타 못지않게 훌륭하고, 건반을 비롯한 다른 악기들도 수준급. 모리세이말에 의하면 조니 마는 'Unnaturally multi talented(비정상적으로 다재다능한)'하다고.
조니 마에게 영향을 준 뮤지션들, 기타 연주 철학, 스미스 시절의 레코딩 노하우와 에피소드,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음악, 그밖에 여러 주제의 흥미로운 음악 얘기를 구체적이고도 상세하게 밝혔던 조니 마의 이 인터뷰 번역본을 읽어 보면 스미스의 음악관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사운드와 뮤지션들을 찾아 해매는 성향. 레전드임에도 협연하는 젊은 뮤지션들을 동등한 뮤지션으로 대우해주고 새로운 작업물도 정말 열심히 꾸준히 만든다. 대중이 자신에게 씌인 '징글쟁글' 대가라는 편견에 질색한다.[21]스미스 음악 자체가 아닌 재결합이나 모리세이에 대한 질문에도 항상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편. 아니면 갑자기 모리세이 디스를 시전한다!
노엘 갤러거등 많은 뮤지션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한국 모던 록의 선두주자인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 언니네이발관의 이능룡 등도 그의 팬. 특히 이능룡은 그가 2009년 크립스의 멤버로 내한공연을 했을 때 피크까지 받았다#.
그는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중 하나이며 BBC가 선정한 '지난 30년간 가장 위대한 4대 기타리스트' 중 하나이다.

3. 솔로 활동


사실 여러 밴드를 전전하던 와중에도 그는 솔로 활동을 했다. 2003년에 데뷔한 '자니 마 & 더 힐러즈'가 그것이다. 이 밴드에는 오아시스에서 활동했던 잭 스타키도 있었다. 하지만 이 활동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가 2013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솔로 1집 'The Messenger'를 내놓는다. 자신이 보컬까지 맡았는데, 사운드는 그가 해왔던 음악들이 그렇듯 굉장히 뛰어나지만 보컬은 매우 평이해서 아쉬운 평을 남겼다. 그러나 음악 자체는 평이 좋았고 연이서 2014년에 2집 'Playland'를 내놓는다. 2018년에는 3집 'Call the Comet'을 발표했다. 이 세번째 앨범이 솔로 앨범 중에 가장 평이 높다.
1집의 타이틀곡 The Messenger.
2집의 타이틀곡 Easy Money 영상. 캐치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곡이다.

3집 타이틀곡 Hi Hello. 놀랍게도 스미스 풍의 곡이다. 사람들도 조니 마가 2018년에 다시 이런 사운드를 들려주는 것에 기뻐했다. 노래는 조건없는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데 딸에 대해 쓴 곡이라고 한다.

4. 여담


  • 몸관리가 철저하다. 술담배를 끊었고[22] 하루에 5마일씩 뛰신다고. 풀 마라톤을 완주한 적도 있다!! 실제로 보면 동안에다 체구가 매우 작고 군살 하나 없다.
  • 14살 때 만난 앤지 마라는 여인[23]과 스미스 시절 결혼해 딸 소니 마와 아들 나일 마[24]를 낳고 살고 있다. 아내와는 40년 가까이 함께한 셈. 나일 마도 'Man Made'라는 밴드를 운영하는 뮤지션. 지금은 한스 짐머의 오케스트라 투어의 기타리스트로 있다. 반려견도 있는데 이름은 'Riff'(...) 2000년대에 포틀랜드로 거주지를 옮겼다가 다시 고향 맨체스터에서 거주하고 있다.
  • 문신이 꽤많다. 목에는 제비 형상의 타투가 있고, 왼쪽팔에는 창조와 파괴의 신 시바의 초상을 새긴 타투, 오른쪽 팔꿈치에는 아내의 이름인 'Angie'를 새겼다. 또 양팔 안쪽에는 북쪽과 남쪽을 뜻하는 N/S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외에도 뜻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타투들이 상체에 많다.
  • 비건계 채식주의자다. 참고로 더 스미스 시절 동료였던 모리세이 또한 비건계 채식주의자.

  • 그의 이름을 딴 상품으로는 가장 유명한 Fender 조니 마 Jaguar와, 선글라스레이밴 조니 마 스페셜 에디션이 있고,[25] 꽃인 사라세니아 조니 마도 있다[26]. 펜더 조니 마 재규어의 유저로는 조니 마, 라디오헤드에드 오브라이언, 테일러 스위프트등이 있다.
  • 노엘 갤러거가 조니 마에 대해 말하길 자기보다 겨우 18개월 형인데 음악은 평생한 것 같다며 푸념했다(....) 조니 마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토할 것 같다고. 좋은 의미로 말이다.[27]
  • 당연하게도 축구팀 맨체스터 시티의 팬.[28] 자주 노엘과 함께 축구를 보러 가기도 하는 듯 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맨시티의 팬답게 맨유를 혐오한다.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포기하는 것과 맨유 팬이 되는 것 둘 중 하나를 골라보라는 질문에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한다. 맨유팬이 되면 재활원에 가야 할 것이고, 의사 보는데 돈도 많이 써야할 것이고, 약도 많이 먹어야 할 것이고, 개X끼(asshole)가 되어서 자기 부인과 아이들이 떠날 것이고, 자기 강아지도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패션 센스도 망가질 것이고, 얼굴에 반점이 생길 것이고, 밤에 잠도 못 잘 것이고, 음악도 못 할 것이고, 빨간 티셔츠를 입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 한스 짐머와 영화 <인셉션>[29],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로렐> 등의 사운드트랙을 같이 만들었다.
  • 페이스북도 하고 트위터도 하고 인스타그램도 한다. 트위터 활동 소식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고 깨알같은 일상도 올린다. 대외적 이미지대로 꽤 웃기고 쿨하다. NME가 쓴 모리세이 혹평 리뷰 같은 것에 좋아요도 누른다.
  • 브렉시트에 관해서는 영국의 EU 탈퇴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EU 탈퇴를 찬성했던 모리세이와 반대되는 부분. 추가로 정치적 입장 등의 사상적인 면에서 모리세이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지 않은 것이 스미스 재결합을 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라는 뉘앙스의 언급도 했다. 이게 어째서 이유가 되냐면 스미스 시절에는 서로의 정치적인 입장도 완전히 일치했고 프로파간다적인 노래들도 만들었기 때문.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 시즌때 BBC에서 최근 정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합리적인 12살짜리 꼬마아이가 도널드 트럼프보다 미국을 더 잘 이끌 수 있다고 본다"라는 답변을 하였다.



[1] Rickenbacker와 함께 즐겨쓴 브랜드. 'Stretch Out And Wait' 등의 곡을 이걸로 연주했다.[2] 마는 악기 연주와 전체적인 프로듀싱을 모리세이는 작사와 보컬 멜로디 부분을 담당했다. 흔히 모리세이 작사, 조니 마 작곡으로 알려져 있는 데(사실 정규앨범 1집 뒷면에 기재된 크레딧에 '''가사: 모리세이, 음악: 조니 마'''로 씌여져 있긴 했다.) , 한 사람이 작사와 동시에 보컬 멜로디를 함께 만드는 경우가 많긴 해도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작사는 했는 데 보컬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리세이-조니 마 콤비의 창작 구조는, 작곡과 작사 영역이 딱딱 나눠진 엘튼 존-버니 토핀 콤비와도 다르고, 개별곡들을 둘 중 한 명이 독자적으로 작곡,작사한 뒤에 크레딧만 둘의 이름을 공동으로 올리는 레논-매카트니 콤비와도 다르다. 모리세이-조니 마 콤비의 작업 구조와 가장 비슷한 콤비의 예를 찾자면 미국의 라이버-스톨러 콤비(바로 엘비스 프레슬리Hound Dog, Jailhouse Rock, 벤 E 킹의 Stand By Me, 클로버스의 Love Potion No.9 등 뛰어난 명곡을 만든 사람들이다!)를 꼽을 수 있다. 이들도 모든 곡 하나하나를 같이 공동 작곡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니 마도 인터뷰에서 우리 콤비는 라이버-스톨러 콤비와 유사한 방식의 콤비라고 밝힌 바 있다. [3] 이후 버즈콕스의 드러머 John Maher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밥 딜런이 그랬듯이 이것도 '''법적으로 개명한 것이다.''') 굳이 'marr'를 선택한 이유는 maher는 아일랜드식 성으로 게일어로 '마ː'라고 발음 하는게 맞지만 영국인들은 이것을 '메이허' 식으로 발음했기 때문.[4] 처음 연습한 곡이 티렉스의 'Life's a Gas'[5] 레코드를 발매하거나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는 본격적인 밴드활동은 아니었고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미래의 기반을 닦는 과정이었다고 보는게 적절하다.[6] 조니 마는 맨체스터내에서 마당발이었지만 둘은 이전에 인사 한번 나눠본게 전부였음에도 조니 마가 무작정 모리세이를 찾아가 밴드를 결성하자고 제안한 것이다.[7] 스미스의 대표곡 'This Charming Man'의 메인리프는 무려 17살 때 구상해놓은것이다.[8] 그는 조니 마에 대해 'original'이라는 코멘트를 한 바 있다.[9] 그런데 더 더의 프론트맨 맷 존슨은 이 활동에 대해 "조니는 이 나라 최고의 기타리스트 잖아. 그런데 왜 댄스음악을 하는건데?"라고 불평한 바 있다.[10] 다만 스미스 시절에는 밴드의 연이은 성공에 꽤나 거만했다고 한다.[11] 조니 마의 동생과 노엘 갤러거는 맨체스터 하시엔다 클럽에서 알게되었다고 하는데 노엘은 한참동안 그가 조니 마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대화 중 우연히 알게되었고, 조니 마의 동생이 노엘에게 오아시스의 데모테잎을 받아 조니 마에게 가져다 주었다. 약 3주뒤 조니 마가 노엘에게 전화를 걸어 "너희 음악 정말 좋던데. 레코드 계약했어?"라고 물어봤다고.[12] 모리세이는 솔로 시절 타운젠드에게 앨범을 프로듀스 해 줄 것을 부탁했으나 타운젠드는 항상 조니 마를 더 선호해서 거절했다고.[13] 그런데 실제로 노엘이 Live Forever를 그 기타로 썼는지는 불분명하다(뮤직비디오에 레스폴이 나오는것은 맞음).[14] 노엘로 Slide Away를 작곡했다. 기타를 받고 처음으로 케이스에서 꺼내자마자 노래가 술술 나왔다고...[15] 그 기타는 오아시스의 5집 Heathen Chemistry를 녹음할때 스튜디오에서 돌려받았다고 한다.[16] 그 때문인지 잉베이 말름스틴같이 '내가 더 기타 잘 친다능' 식으로 자뻑 플레이하는 것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스미스 해체 후 그가 모리세이에게 쓴 편지에서도 '난 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게 싫다. 기타히어로가 되고 싶은 야심따위 없다. 평범하게 살고싶다' 라고 쓰여있다.[17] 조니 마 본인도 자신의 기타 스타일이 독특한 것을 아는지 만약 자기가 지미 헨드릭스와 기타 배틀을 뜨게 된다면 지미 헨드릭스에게 1983년 UK 인디를 들려줘서 그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고 한다. ("I will just go full on 1983 UK indie on him. That will confuse the shit out of him."[18] 이 두 밴드가 징글쟁글 사운드의 시초이다. 특히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은 조니 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기타리스트 중 하나이다.[19] 이 기타는 후에 자신의 팬인 Suede의 버나드 버틀러와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같은 모델의 기타를 구매하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20] 이 기타는 1984년 1월 2일에 사이어 레코드의 사장 시모어 스테인이 사이어 레코드와 계약하는 조건 중 하나로 마에게 사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모어 스테인이랑 저녁 식사를 하다가 시모어 스테인이 브라이언 존스에게 뉴욕에서 기타를 사 준 얘기를 했다가 조니 마가 기회를 포착하고 "나한테도 뉴욕에서 기타 사주면 너네랑 음반계약 하겠음"이라 던져봤는데 시모어 스테인이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고 한다. 마는 전 뉴욕을 돌아다니면서 구입할 기타를 찾았고 48번가의 한 악기점에서 이 기타를 본 순간 빛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기타를 사고 호텔에 도착해서 케이스에서 꺼내자마자 만들어낸 리프가 바로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의 리프이고 같은 날에 바로 이어서 Girl Afraid의 리프도 만들어냈다. [21] "언제까지나 리켄베커로 징글쟁글만 하면서 살수는 없는것 아닌가" 당시 절정의 인기에 있던 스미스를 미련없이 그만 둔 이유가 짐작가는 대목[22]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스미스 후기시절엔 알콜중독이었다. 젊었을 땐 LSD를 비롯해 엑스터시같은 비교적 약한(?) 약도 했다. 하지만 약에 관해서는 막장인 헤로인중독이었던 앤디 루크가 전문가. 모리세이마약에 대해 아예 잘 모른다.[23] 여담으로 조니 마의 자사전에 14살에 부인과 첫 만나던 순간이 굉장히 동화적으로 묘사되어있다.[24] 조니 마는 미국 밴드 '시크(Chic)'의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성덕이라 아들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25] 특히 스미스 시절엔 거의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고 실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26] 품종 개발자가 조니 마의 이름을 따서 만듦. 이 꽃은 특이하게도 식충식물인데 비건인 마는 이 꽃이 식충식물인건 문제없다. 자연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거니깐 이라고 말했다.[27] 조니 마는 1963년 10월생, 노엘 갤러거는 1967년 5월생이니 실제 나이차는 42개월이다[28] 다만 그의 자서전 Set the Boy Free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모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맨유 홈구장에 경기를 보러 갔을때 뭔가 분위기가 마음에 안들었다고. 반면 당시 맨시티의 홈구장 메인로드는 자기와 잘 맞아서 맨시티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29] 한스짐머는 조니마가 연주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곡을 썼고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사운드트랙을 위해 조니마같은 기타리스트를 찾을거라고 얘기했다. 그 순간 두사람은 그냥 조니마를 데려오면 되잖아? 라고 생각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