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틴즈
1. 개요
2. 고난했던 무명 시절(1997~2002)
3.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과 스트록스, 그리고 런던의 대항마
4. 베이비솀블즈 결성(2003)
5. 음악적 스타일
6. 라이브 퍼포먼스
7. 앨범/트랙 해설
7.1. What a Waster 싱글(2002.6)
7.2. Up the Bracket 싱글(2002.9)
7.3. 데뷔 Up The Bracket(2002.10)
7.4. Time for Heroes 싱글(2003.1)
7.5. Don't Look Back into the Sun 싱글(2003.8)
7.6. Can't Stand Me Now 싱글(2004.8.1)
7.7. 2집 The Libertines(2004.8.30)
7.8. What Became of the Likely Lads 싱글(2004.10)
7.9. Time for Heroes – The Best of The Libertines (2007.10)
7.10. 3집 Anthems for Doomed Youth (2015.09.11)
8. 기타
1. 개요
"결국 리버틴즈는 가장 '''위대한 실패'''였다는 점에서, 가장 '''영국스러운 현상'''이었다."
[5]"세상에는 훌륭한 밴드와 존나 훌륭한 밴드가 있다. 사람들이 옷입는 방식, 말하는 스타일을 바꾸고,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는 밴드는 후자의 경우다. 그런 의미에서 오아시스 세대가 물러간 후 공백기가 생겼을 때 리버틴즈가 나타났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우리보다 더 미친 놈들이었다'''. 우린 기껏해야 술담배에 코카인 좀 하면서 밤새 노는 정도였는데, 이 놈들은 '''헤로인과 크랙, 그리고 당신들도 알다시피, 자해를 했다.'''"[4]
- '''노엘 갤러거'''
'''The Libertines'''[6]
잉글랜드 브릿팝 계열 밴드이자 영국 내에서도 특유의 노골적인 잉글랜드성으로 단연 돋보이는 그룹으로서, 좁게 보면[7]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부흥 시기에 데뷔한 새천년 개러지 락 밴드이다. 영국 뮤지션 피트 도허티와 칼 바랏 이 두 프론트맨이 중심이 되어 런던에서 1997년에 결성, 2004년까지 활동하였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2002년 10월 데뷔 앨범을 낸 시점으로부터 2004년 5월 신보 2집 발매를 3개월 앞두고 밴드가 앨범 발매에 앞서 깨지기까지 공식적으로 1년 반 동안 활동했던 밴드이다.[8]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의 '''명실상부 엄연한 주역 중 하나이나''' 묘하게 그 씬에서 소외되는 경향이 있는데 리바이벌 씬의 타 밴드들이 전체적으로 미국 및 유럽, 호주 출신에 인터내셔널한 인지도를 자랑하는데 비해 리버틴즈는 팬베이스가 거의 '''영국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리버틴즈는 소위 새천년 런던 인디 개러지 락 씬에서 Is This It과 함께 본 밴드의 데뷔 앨범 Up the Bracket으로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는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위에 서술했듯 2004년, 리버틴즈는 당시 영국 인디 락 씬에서 가장 핫한 그룹으로 그 포텐이 절정에 달해 터지고 있을 즈음[9] 두 프로트맨의 불화 및 피트 도허티의 측의 일방적인 스케줄 펑크와 심각한 A급마약 및 향정신성의약품 의존 증세[10] 로 산산조각 나듯 깨졌다. 그렇게 리바이벌 씬 밴드 중 가장 단명한 밴드로 기록되었다.
리버틴즈는 2004년 현역 해체 이후 2014년 10년만에 온전히 4인조로 재결합하기까지 그간 정확히 3번[11] 의 재결합 과정을 거쳤는데, 이 십년간의 시기 동안 '''영국 언론에서는 거의 300여번의 재결합 루머가 돌았다.''' 말 그대로 두 프론트맨이 사적으로 만나는 게 포착되긴만 해도 리버틴즈가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루머와 함께 도박 사이트 등에서 그 주가가 미친듯이 치솟아 올랐었다. 세 번의 재결합 모두 엄청난 열기와 팬들의 응원 속에 이루어졌으나 무엇보다 2010년의 레딩&리즈 락 페스티벌에서의 헤드라인 공연은 이미 팬 차원을 넘어선 역대급 라이브 공연으로 다뤄지곤 한다.
2015년 9월에 3집을 발매함으로서 정규 앨범을 2집 이후 11년만에 내놓았으며 전 유럽을 포함해 홍콩까지 월드 투어를 돌고 있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밴드이다.
리버틴즈의 개괄적인 특징으로 1. 짧은 기간의 활동과 2. 특유의 광기와 열기가 섞인 노래 및 라이브 공연이 섞여 3. 평론과 대중 모두로부터 찬사받았던(특히 데뷔 앨범) 특유의 고상한 문학적인 면과 고옥탄가 노동층 분위기가 묘하게 뒤섞인 영국산(産) 락 밴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피트 도허티라는 공인으로서의 영국 매스컴에 미치는 그 유명세를 합친 것은 덤. 그러나 평단과 매체와 대중이 모두 간과하는 것으로, 오히려 너무 당연해서 지나치는 부분이랄수도 있는데, 바로 피트 도허티와 칼 바랏 두 뮤지션 사이의 '''우정을 초월한 사랑에 가까운 집착적 애증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 간의 가십과 스캔들은 비록 피트 도허티의 마약 이슈나 전여친이었던 톱모델 케이트 모스와 누렸던 광역적인 인기에는 못 미쳤으나 리버틴즈라는 밴드 자체를 유지하고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이고도 상징적인 장치가 되어버렸다. 실제로 이 둘은 단순한 보여주기용 쇼맨십을 넘어선 흡사 연인과도 같은 애증관계로 영국 락계에서 갤러거 형제나 더 스미스의 조니 마-모리세이 그리고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에 비교되곤 한다.[12] 개러지 락 밴드들이 유난히 인물이 좋은 것을 감안해도 젊었을 적의 리버틴즈의 도허티/바랏 양대 프론트맨의 비주얼은 가히 스트록스, 바인스[13] 에 견주었으며 오히려 동시대에 데뷔했던 맥플라이를 위시한 숱한 영국산 아이돌 보이그룹을 능가한 페이스로도 유명했다. 한마디로 당시 리버틴즈는 그 직전에 스트록스가 그랬고 그 직후에 악틱 몽키스가 그랬듯이 스타일과 비주얼 그리고 음악성을 모두 겸비했던 무서운 신예들이었다.
이미 초창기부터 밴드의 두 프론트맨이 대놓고 마이스페이스 등으로 팬들과 연락할만큼[14] 팬포럼이 활성화되어 있는 밴드인데 밴드 자체의 위키에 전(全)노래 파일까지 다 업로드 되어 있는 Upthealbion.com과 거의 피트 도허티의 오피셜이라 할 수 있는 http://frenchdogbluesblog.blogspot.kr 이 그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데뷔부터 현재까지 십대 및 이십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는 밴드 특성상 디비언트아트나 텀블러에 밴드 관련 키워드로 치면 관련 자료 및 사진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일을 경험하게 되는, 그런 골수 팬들을 자랑하는 팬드이다. 리버틴즈 팬덤 자체가 영국 내에서도 골수 팬들의 입김이 유난히 센 편이기도 하다.
허나 이 모든 설명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리버틴즈는 당시 데일리 미러나 더 선을 비롯한 영국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이토록 마약을 많이 남용한 밴드를 비교하려면 저 70년대 펑크의 대선배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판'''이라는 말을 듣는 지경까지 갔을 정도로 락의 환경 자체가 요즈음의 그것보다 훨씬 거칠었던 70,80년대에나 일법한 소행을 벌인 것도 모두 사실이다. 여기 한국에서는 금방 와닿지 않지만 현지 영국인들에게는 리버틴즈하면 피트 도허티가 오고 그러면 자연스레 마약이 따라붙는 삼단논법 현상이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거기서 시작해서 리버틴즈의 팬이 있고 피트 도허티의 팬이 있지, 일단 리버틴즈하면 무조건적으로 마약이 먼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말할 필요도 없겠으나 이는 리버틴즈의 멤버 4명 중 누구보다 피트 도허티 독단의 잘못이다.
피트 도허티와 칼 바랏 모두 리버틴즈 이후에 각자 베이비솀블즈 및 더티 프리티 씽즈 그리고 솔로 활동을 병행하여 영국 음악계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럼에도 지난 10년간의 리버틴즈 결합은 그 팬들에게도, 인디 락 리스너들에게도 그리고 양측 뮤지션 각 개인의 팬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한결같은 꿈이었고 실로 두 사람 나름 재결합하기 위해 애썼고 그만큼 마음 고생도 많았었다. 그런 과정 자체가 NME의 표현을 빌리자면 '포스트 리버틴즈 체제'라는 가장 근년의 영국 인디 락 현황과 맞물려 리버틴즈라는 밴드의 역사 자체로 자연스레 얼룩에 스미듯 합쳐졌고, 곧 리버틴즈는 '''불꽃 같았으나 그 이후의 부재가 상징하는 의미도 만만치 않게 큰''', 여러모로 환상이 많이 적용한 것도 사실인 어찌보면 팬들과 뮤지션 사이의 신경전이 아주 복잡하고도 미묘한 애증에 찬 밴드이다.
2. 고난했던 무명 시절(1997~2002)
1997년 브루넬 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있던 칼 바랏은 같은 학교 친구이자 플랫 메이트였던 에이미-조 도허티를 통해 피트 도허티를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칼은 학교에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던 시절이었고, 스미스를 즐겨 듣던 어린 피트는 '모리세이-조니 마'처럼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아 음악을 하기를 꿈꿨다. 적절한 시기에 만난 둘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고 밴드를 결성했다.
밴드명은 사드 후작의 소설 <소돔 120일>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의 다른 이름이 '난봉꾼들'의 욕망', Lusts of the Libertines이다. The Libertines라는 밴드명을 가지기 전, The Albion[15] , 이라는 이름도 후보에 있었는데, 피트가 말하길 밴드명으로 하기엔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후보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스티븐 베들로(Steven Bedlow)가 보컬을 맡았었고 칼과 피트가 기타를 쳤다. 이외에 첼리스트,드럼,베이스(레이저라이트의 '''조니 보렐''') 등 다양한 멤버들이 거쳐갔다. 밴드 초기에도 피트와 칼은 끓임없이 갈등을 빚으며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했고 이 와중에 베들로가 나가고 리버틴즈 역사에 빠놓을 수 없는 그 유명한 매니저 배니 푸치(Banny Poostchi)를 새로 들이면서 첼리스트와 드러머를 정리 (게리 파웰을 영입), 교체하고 밴드의 부진 때문에 탈퇴한 베이시스트 존 하셀도 다시 불러들이며 온전한 라인업을 구성하게된다.
3.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과 스트록스, 그리고 런던의 대항마
[image]
포텐 폭발하기 직전의 2001년경 리버틴즈. 이 때 벌써 둘은 4년지기 친구였다.[16]
데뷔 당시인 2001년에, 스트록스의 Is This It 발매를 기점으로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무브먼트가 시작됐다.
그와 발맞춰 호주의 바인스, 미국(디트로이트)의 화이트 스트라입스, 스웨덴의 하이브스라는 3개의 밴드가 나온다.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알아챘겠지만, 그 상황에서 소위 '''록 좀 한다는 나라인 영국'''이 새로운 이 록 무브먼트에 당당히 유니온 잭을 걸고 활동할만한 밴드를 단 하나도 배출시키지 못했고, 이는 당시 영국 음악계에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쪽팔린''' 사건이었던 것이다. 뭐 포스트 브릿팝이 있었고, 콜드플레이란 2014년 현재 그 어느 밴드보다 인기가 많은 걸출한 밴드도 UK차트 1위를 찍으며 등장했던 시기지만.... 어쨋든 브릿팝이 망해버린 후 오아시스는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같은 앨범이나 내고 믿을만한 록 밴드는 라디오헤드와 트레비스, 콜드플레이같은 NME가 싫어할 만한 밴드밖에 없게 되었으니 대서양 건너에서 새로운 밴드들이 등장해 음악계의 정국을 주도하는 걸 죽치고 그저 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빠진 것이다. 당시 2001, 2002년 영국은 스트록스를 위시한 온갖 시시껄렁 카피캣 밴드들이 넘쳐났다.
보다 못한 NME에선 영국적인 음악 장르인 개러지 록[17] 을 스트록스나 화이트 스트라입스 같은 미국 밴드에게서 찾아내려고하는 억지스러운 상황까지 들고 나온다. 이 잡지는 스트록스를 완전히 무슨 자기네 영국 밴드라도 되는마냥 귀여워해주고 칭찬해주고해주는 등 온갖 억지를 다 부렸었다.
사실상 그만큼 영국 록계의 상황이 안습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영국에서 개러지 록을 하는 리버틴즈가 나타나자 영국의 언론은 벤드에게 엄청난 관심과 설레발을 보내게된다.
4. 베이비솀블즈 결성(2003)
기본적으로 피트 도허티 항목 참고.
밴드가 1집 녹음 기간 동시에 투어롤 하는 동안 피트의 약물 사용이 과다하게 늘어난다. 본격적으로 방구석 생활에서 나오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자 전부터 문제가 있었던 약물 중독 증상이 심히 악화된 것('''이 기간 동안 피트는 노엘이 말한것처럼 드디어 크랙 코카인과 헤로인을 동시에 쓰기 시작한다.'''). 이 때의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피트는 (후에 정식으로 출판될) 일기장과 그보다 자주 인터넷을 이용하여 밴드 팬포럼에 적기도 하였다. 팬포럼에 들어가서 글을 올릴 때 거의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시도때도 없이 아무때나 글을 남기곤 했는데, 어쩔 때는 굉장히 의기소침해하고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쩔때는 얌전하고 행복해 보이는 등 팬들한테 걱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동시에 이 때쯤 밴드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 피트와 칼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투어하는 동안 생기고, 당시 투어를 관람한 팬들이 그 미묘한 분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2003년 5월 쯤 밴드는 다음 앨범 작업의 초고를 진행함과 동시에 밴드를 프로모트하고자 미국 뉴욕으로 가는데, 거기서 '''Babyshambles Sessions'''라는 유명한 밴드 세션을 녹음한다. 그 때 즈음 피트와 칼이 다시 한번 초심으로 돌아가고 우정을 계속 유지하자는 다짐아래 서로의 팔등(피트는 칼의 팔을, 칼은 피트의 팔을)에 Libertine이란 문신을 새긴다. 하지만, 뉴욕에서 투어를 하면서(뉴욕의 그 유명한 CBGB에 들러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칼은 중독 증상이 심각해지는 피트를 목격하게되는데, 나중에 피트가 대놓고 마약 딜러들을 숙소에까지 합숙시키자 칼은 크게 화를 낸다. 잔뜩 성질 뻗친 칼은 먼저 런던으로 도중에 떠나고, 아직 미처 다 녹음하지 못한 Babyshambles Sessions을 피트가 베이시스트 존과 함께 녹음을 끝마친다. 그리고 다 끝난 녹음집을 뉴욕의 한 리버틴즈 팬한테 넘겨주고, 피트가 꼭 무료로 인터넷에 배포하고, 원본 CD만 소장하라는 부탁을 남긴 후 급히 칼을 따라 런던으로 밴드를 데리고 떠났다. 이후 이 팬은 인터넷에 이 세션을 풀었고, 이 세션으로 리버틴즈는 대중들에게 새로운 앨범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피트 도허티/칼 배럿의 작곡 능력은 다시 한 번 인정받게 된다.
돌아온 피트는 한 동안 칼 없이 공연을 계속 돌았고, 밴드의 새로운 싱글인 '''Don't Look Back Into The Sun'''이 버나드 버틀러[18] 아래 프로듀스 되고 있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 당시 피트와 칼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꼼꼼한 성격의 버나드 버틀러와 해픈 스타일의 피트는 죽이 잘 맞진 않았지만 버틀러는 이 노래의 엄청난 대박 조짐을 본 후 참아주며 같이 일했다.[19]
이 때 피트가 칼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다가오는 칼의 생일에 맞춰 스페셜 공연을 준비한다. 근데 칼은 이미 자신의 몇몇 친구들에 의해 주최된 파티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고, 소식을 받은 칼을 보자 파티를 주최한 친구들이 떠나지 말 것을 충고한다. 칼은 피트의 진심을 오해한채 또 마약딜러들 잔뜩 모아놓고 밤새 크랙, 해로인으로 찌들 것 같은 피트의 사적파티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결국 피트는 혼자서 그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피트는 이 때 칼에 대해서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 팬들과 진행된 그 파티에서 피트는 술과 약에 쩔도록 새벽내내 공연하다가 동이 틀 때 쯤 그루피들[20] 과 함께 숙소로 돌아간다. 다음 날 리버틴즈는 유럽 투어의 시작으로 독일로 가는 기차에 타기로 되었는데, 여기에 '''피트가 오지 않는다.'''
문제는 '''밴드가 스케쥴 및 레코드사의 압박 때문에 피트를 찾아가지 않고, 밴드도 피트에 대해 굉장히 화가 나있던 터라 피트의 기타 파트를 맡을 사람인 앤소니 로사몬도[21] 와 합의를 본 후에 피트 없이 공연을 하기로 결정해버린 것이다'''.
칼은 밴드가 자기 중심의 원톱체제인 것마냥 행동하며 피트가 마약에서 깔끔하게 손 씻지 않는 이상 밴드에 다시 못 오도록 못을 박는다. 그리고 며칠 후 도허티 없이 리버틴즈가 유럽 투어를 끝내고 일본 투어까지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피트가 접한다.
배신감에 화난 피트는 밴드가 자신을 쫓아내고 뻔뻔하게 공연을 돈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의 음악 프로젝트이자 리버틴즈가 뉴욕에서 녹음한 Babyshambles Sessions의 이름을 딴 베이비솀블즈란 밴드명으로 활동하면서 몇몇 아는 측근들과 함께 공연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포스트 리버틴즈 밴드 베이비솀블즈의 실질적인 탄생이었다(2003년)'''.
이 때 공연이 유난히 막장이 많았고, 피트는 내내 약에 더 의존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중독자의 길을 걷는다. 약>공연>술>담배>약의 악순환적인 패턴에 빠져 생활을 하는 자기 자신이 점점 한심해지고 그에 대해 점점 더 화가 나자 마약을 더하게 되었고, 당장 약할 돈이 떨어져서 팬들하테 몇 파운드 급히 얻어 약을 살 정도까지 간다.
그러던 중 8월 11일, 내내 화가 난 피트가 또 다시 돈이 떨어져 약을 구할 수 없자, 마침 혼자 밴드를 데리고 떠난 칼이 생각나 홧김에 '''칼의 저택에 무단침입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200파운드 정도 되는 돈을 챙기던 피트는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 감방으로 가게 된다. 소식을 듣고 급히 일본에서 돌아온 칼이 감방에서 피트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감옥을 향한다. 피트는 칼의 면회요청을 거절하며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채 감방에 남는다. 하지만 이번에 화가 난건 피트만이 아니었다. 칼 역시 이 사건으로 적잖이 놀라고 화난 것이다. 칼도 면회요청을 거절 당하자 꽤씸한 마음에 피트를 두고 일단 혼자 돌아간다. 하지만 칼은 이후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피트를 감옥에 두고 온 후 계속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피트가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동료 죄수들에게 집단 폭행 당하여 얻어터지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자[22] 독방에 갇히게 되고 마약 없이 버텨야 하는 피트는 생지옥을 경험한다. 며칠 동안 온갖 자해를 하는 등 버텨보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피트가 결국 칼하고 면회를 요청한다. 면회나온 칼에게 감옥에서 제발 빨리 풀어달라는 부탁만 후딱 남긴 후 피트는 다시 돌아갔고 칼이 보석비를 잔뜩 물어줘서 판사가 2개월로 감형시켜준다. 9월 7일에 일어난 일이다. 감옥에서 지내면서 피트는 이 때의 심정을 고스란히 일기에 적는다.
2집 발매 전 두 사람은 앨런 맥기의 호의로 웨일스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곡을 쓰기 위해 같이 지냈는데, 피트 도허티와 크게 말다툼을 한 어느날 칼 바랏이 앨런 맥기의 집 대리석 싱크대에다 머리를 박고 자살시도를 해서 크게 다친다.[23] 앨런 맥기의 말에 따르면 눈알이 머리에서 나올뻔 했다고(...) 두 사람의 긴장관계와 자기파괴는 점점 더 심화되었다.
8월 18일, 리버틴즈의 새싱글 '''Don't Look Back Into The Sun이 발매된다'''. 싱글은 대히트를 쳤고 영국 언론은 또 다시 이 엄청난 싱글에 설레발을 친다. 다만 이 싱글이 그렇게 설레발을 받을만큼 훌륭했던 것도 사실이고, 아직까지 리버틴즈 최고의 명곡으로 남는다. 딱잘라 말해서 객관적으로 이 곡은 명곡인게 사실. 팬들은 이 노래의 가사[24] 를 통해서 피트와 칼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었고 이 때부터 리버틴즈가 얼마 못 가 해체할 분위기다라는 소문이 돌면서 리버틴즈가 점점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얼마 못 갈 밴드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온 것. 더군다나 감옥에 있는 피트와 밴드 투어를 돌고 있는 칼의 관계가 바깥에 알려지면서 밴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이 때 아직 피트가 감옥에 있었으므로 밴드는 계속 앤소니 로사몬도와 공연을 돌고 있었다.
하지만 알게모르게 칼은 밴드가 인기가 치솟음에도 불구하고 피트의 팬덤과 밴드의 팬덤이 미묘하게 나뉘는걸 느낀다. 칼 역시 이 시기 팬포럼에 많은 글을 남기면서 자신의 심정을 남기면서까지 계속 무리한 스케줄의 투어를 진행한다. 칼 역시 기분이 안 좋은건 매한가지라 술과 담배를 끼고 살면서 밴드 생활을 계속해나간다. 시간이 흘러 10월이 되었고 피트의 출소일이 몇 일 안 남았다는 소식을 칼이 접한다.
5. 음악적 스타일
기본적으로 비틀즈로부터 시작한 정통 영국 로큰롤 계승하였으며, 이후 80년대 펑크 록과 모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영국 인디 록밴드의 필요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는 더 스미스의 중독성 강한 멜로디에 마찬가지로 멜로디도 강하지만 그보다 조금 음악적 폭이 넓었던 선배 더 클래시 이 둘을 잘 버무렸다는 평을 받는다. 저 둘을 정말 세련되게 혼합한 느낌. 이 외 온리 원스나 버즈콕스, 언더톤스처럼 팝 성향이 강했던 영국 펑크 록 밴드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허티는 '''더 스미스의 'Still Ill'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큰 의미'''를 갖는 노래라고 밝혔고[25] , 더 잼, 섹스 피스톨즈, 버즈콕스, 체스 앤 데이브즈를 들으며 자랐다. 칼 배럿은 인디에 입문하기 전까지 너바나나 스매싱 펌킨스를 비롯한 그런지 및 얼터너티브 록 밴드에 빠졌었고 더 도어즈, 벨벳 언더그라운드 및 기타 거장 장고 라인하르트 등을 좋아한다고 한다. 성향차에서 나타나듯 기타 실력은 칼이 압도적으로 좋으며 실제로 피트 도허티에게 기타를 가르친 것도 그다.
6. 라이브 퍼포먼스
리버틴즈가 (수량적으로는)팬층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팬심이 두터운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밴드와는 차별화된 라이브 공연을 가졌기 때문이다.
많은 음악 잡지들의 유명한 긱(공연)100위 목록이나 리스트에서 항상 5,6개씩은 꾸준히 뽑힐 정도로 라이브 퍼포먼스가 대단했는데, 이는 리버틴즈의 퍼포먼스는 단순히 멋지고 화려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팬들과의 소통이였다고 볼 수 있었단 점이 바로 저러한 리스트에 올라간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인디 밴드들이 지금 상당히 팬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이들 전성기만 하지 못하며(예내들은 한창 때 해체했기 때문에 전성기밖엔 없다. 물론 2004년은 여러모로 찝찝하고 어두웠지만;;..)그 전의 인디 밴드들에겐 기대조차 하기 힘들었다. 최근 영국 인디 및 언더 그룹이나 밴드들은 리버틴즈 전후로 공연 스타일 애티튜드가 나뉜다라고 볼 수 있다.
많은 가수들이나 뮤지션들이 관객 앞에 서서, 큰 공연 같은 경우는 거리를 수십미터씩 유지하고 중간에 안전요원까지 배치한 채 윙크하고, 립 서비스를 해주고, 열창을 하고 인사를 하고 무대뒤로 사라지는 래퍼토리였다면(큰 공연이든 작은 공연이든) 리버틴즈는 즉석으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게릴라 공연을 몇 시간전 공지하고 팬들과 후딱 합의 본 후에 공연 장소로 직행, 심지어 팬들의 집으로도 이동하여 팬들 중 생일이나 기념일이 있으면 기념공연 차 2차 공연을 펼쳤고 그러한 이유 없이도 항상 연달아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료로. 그러고도 그 공연이 끝나면 2차, 3차로 자신들의 숙소까지 팬들을 데리고 가서 계속 공연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특히 큰 공연이 끝나면 자기네 숙소에서 바로 2차 공연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간 그러한 공연들 와중에 스테이지 인베이전(관객들의 무대난입으로 인한 공연 중단)이 많이 일어났지만 어떤 물건 하나 부수거나 하지 않는 등 통상 헤비메탈이나 하드 락 공연에서 일어나는 난폭한 상황 없이 수백명의 팬들이 흥에 겨워 뛰어다니고, 서로 껴안는 등 하였다(마릴린 맨슨 라이브 공연 같은걸 생각하면 매우 곤란하다.). 그런 와중에 피트와 칼은 팬들에게 둘러싸여 좁혀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연스럽게 기타까지 치기 힘들 정도의 거리로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리버틴즈의 라이브 공연은 매우 인티밋한 마이크 셰어링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사연들로부터 중요한 점은 단순히 하나하나의 이벤트보다는 이전까지의 인디 밴드들과는 그 애티튜나 스타일에 차이를 보임으로써 후배 밴드나 뮤지션들의 퍼포먼스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 입장에서도 이렇게 밴드와 깊게 엮인적인 전에도 없었던 경험이었기에 신선했고, 정말 몇몇 팬들은 밴드와 진짜 친해지기도 했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유튜브를 통해 이런 자료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으며 그 중에는 피트도허티와 같이 작업했던 뮤지션이(추측) 올린 동영상도 있다.
베이비 샘블스 3집에 수록될 곡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조지마이클의 라스트 크리스마스 커버등 수 많은 동영상이 있다.
"지금까지 리버틴즈만큼 팬덤과 깊게 소통하고 교류한 밴드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리버틴즈는 팬들이 가장 가까이서, 마치 친구처럼 그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주었다. 리버틴즈는 심지어 그들 팬들 중 여러 사람들과 친구 관계로 지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 Q magazine
7. 앨범/트랙 해설
1집 반사회적, 데모적 분위기에 비해 2집 분위기는 아예 밴드 내부 사정이 중요 모티프가 되어서 그런지 거의 다 피트와 칼에 대한 관계를 노래로 한 곡들이 많다. 애초에 앨범명이 The Libertines(셀프 타이틀드)로, 앨범 커버의 인상적인 피트와 칼이 서로 함께 있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미묘한 분위기의 사진은 록 앨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앨범 슬리브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으며, 아직도 후배 뮤지션들이나 배우, 코미디언들이 종종 패러디하기도 한다.
총 싱글 7개, EP 4개, 정규 앨범 3개(정확히는 베스트 앨범 때문에 4개), '''21개'''의 데모/세션/부틀렉을 가지고 있다.
이쯤되면 당연히 명곡들이 무지하게 많다. 원히트 밴드가 절대 아닌 셈이다.
참고로 '''모든 곡이 도허티/배럿 작사, 작곡이다.''' 물론 세션까지 포함할 경우 경우 베이시스트 존 해샐이 작곡한 Sister, Sister같은 노래도 있다.
7.1. What a Waster 싱글(2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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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데뷔 싱글. 정규 1집에는 실리지 않았으나 Mocking Bird와 함께 미국판/일본판과 이후 리패키지 버전에선 보너스 트랙으로 실렸다. Mayday같은 경우 What A Waster와 함께 호주판으로 실렸다.
리버틴즈 데뷔 음반이기도 하고 아직까지 팬 훼이보릿이며, 당시 어려웠던 차트 진출에도 불구하고 #37을 기록했다. 차트 Top40을 깨는게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인데, 설명을 하자면, 영국 싱글차트는 본디 200위까지 기록이 된다. 하지만 당연히 뒤로 갈수록 거의 관심을 못 받게 된다(돈도 거의 용돈벌이 수준밖에 되지도 않고). 거기서 메인스트림에 진출할 수 있느냐 없느냐 기준선이 되는 중요한 성적이 바로 BBC에서 주관하는 라디오에서 에어를 탈 수 있는 40위 컷트라인인 것이다. 거기에서 간신히 37위로 차트에 진입한 것이다. 더군다나 데뷔 당시 영국 음악 차트는 온갖 미국 펑크락/팝락/뉴메탈 밴드들이[26] 대거 인기몰이했던 때이기 때문에 영국냄새 지인하게 풍기는 자국 밴드인 리버틴즈가 차트에 진입한건 영국 음악계의 굉장한 자부심이 되는 사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브릿팝 씬까지 좆망이었던 때였다.[27]
곡에 욕이 하도 많이 들어가서 라디오에 에어될 때 엄청나게 편집했어야 했다. two bob cunt, fucking waster, div 등등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다.[28]
1. What a Waster
약간은 피트 도허티한테 쏠린 리버틴즈스러운 곡이다. 워낙 위에 다 설명해놓았으니 참고.
2. I Get Along
3. Mayday
1분 2초짜리 괴성과 함성, 그리고 칼 바랏의 기타가 독주하는 곡. 초기에 종종 라이브에서 불렀다. B-sides곡치고 좋은 퀄리티의 곡이라는게 중론이다.
7.2. Up the Bracket 싱글(2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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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싱글이자 1집 첫번째 싱글로 컷트된 곡. 리버틴즈 대표곡 중 하나이다.[29]
CDS 1
1. Up the Bracket
2. Boys in the Band
3. Skag & Bone Man
CDS 2
1. Up the Bracket
2. '''The Delaney'''
3. Plan A
7"
1. Up the Bracket
2. Boys in the Band
7.3. '''데뷔 Up The Bracket(2002.10)'''
Up the Bracket 항목 참고.
7.4. Time for Heroes 싱글(2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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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Don't Look Back into the Sun 싱글(2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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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Can't Stand Me Now 싱글(2004.8.1)
7.7. '''2집 The Libertines(2004.8.30)'''
[image]
The Libertines(음반) 문서 참조.
7.8. What Became of the Likely Lads 싱글(2004.10)
[image]
7.9. Time for Heroes – The Best of The Libertines (2007.10)
[image]
메인 항목: Time for Heroes
관심이 있거나 처음 접한다면 앨범 2개만 냈기에 공식적인 앨범 곡들을 다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7.10. '''3집 Anthems for Doomed Youth (2015.09.11)'''
[image]
7월 2일, 10년만의 앨범 발매일 발표와 동시에 Anthems for Doomed Youth의 수록 곡 중 하나인 Gunga Din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태국 Karma Sound Studios에서 녹음되었으며 전작과는 다르게 에드 시런, 원 디렉션과 작업했던 제이크 고슬링이 프로듀싱했다.
선공개된 곡 Gunga Din
9월 11일 3집 Anthems for Doomed Youth이 발매되었다!!! 11년만에. 11년이라는 시간 뒤에 나온 앨범인지라 묘하게 리버틴즈보다는 베이비샘블즈의 색에 더 가까운 앨범이 되었다.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데 어떤 사람은 음악적으로 성숙해졌다고 하기도 하고 색이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오지 말았어야 될 앨범이라고 평하는사람도 있다. 1,2집은 젊은시절의 감성이 있었는데, 3집은 확실히 세월이 느껴지고 장르가 모던락에 가까워졌다.
8. 기타
더군다나 세션들이나 데모들을 굉장히 많이 웹상에 굉장히 많이 푼 밴드이기도 한데, 그런 곡들을 찾다보면(팬이라면 필수적으로 다 들어보게 되는 Babyshambles Sessions라든지) 아예 완전히 다른 느낌의 같은 곡이나 (후에 다른 앨범에 실릴) 새로운 곡들을 들어 볼 수 있는 등 여러모로 자료량이 많은 편이다.
참고로 1, 2집 모두 더 클래시의 믹 존스가 프로듀싱해줬다. 사실 더 클래시한테 많은 영향을 받은 밴드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팬층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개러지 밴드 중에서도 인지도 제일 낮은 편. 일단 스트록스는 Is This It이라는 '최초'타이틀이 있고 인터폴이 피치포크의 성향과 맞아떨어지는 현대적인 감성을 잘 살렸고, 악틱 몽키즈가 이제는 인디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거인이 된 반면 리버틴즈는 지극히 영국적인 은유와 시적 가사 및 현지에서나 쓰이는 욕설이 많다. 음악은 멜로디라인은 뜯어보면 상당히 달달한데 의도적으로 거친 사운드를 내려해서 귀가 듣기 아프다. 그리고...'''피트 도허티가 마약을 해도 해도 정말 너무 많이했다.''' 그가 리버틴즈를 파멸시켰다고 밖엔 볼 수 없다. 말 그대로 자승자박이라 본인들도 할 말은 없는 셈. 피트 도허티 한정으로 약간의 인지도가 있는데 뮤지션으로서는 아니고 디올 옴므 뮤즈, 케이트 모스 구남친, 영국 마약쟁이 뭐 이런걸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구구절절한 변명에도 주지할 사실은, 어쨌거나 '''겨우 앨범 2개 내고 2년 조금 넘게 활동한 (액면적인 활동시기상으론) 밴드라는 것이다.''' 데뷔와 2번째 앨범에서 이렇듯 영국을 흔들었다... 기 보다는 NME를 흔든 밴드는 이들이 유일하지 않을까.
피트 도허티는 영국과 프랑스에 한정[30] 해서 연예인급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정도다.[31] 당연하지만 미국에서도 '''그게 누구세요?'''취급이다. 리버틴즈가 데뷔 초기에 뉴욕까지 날아가서 데이빗 레터맨 쇼까지 나왔단 걸 감안하면... 지나온 그 막장의 역사가 무상할 따름.
팬층이 확실해 내일 공연까지 가졌던 일본과는 달리 국내 같은 경우 앨범도 라이센스되지도 않았다.(베이비솀블즈나 더티 프리티 씽은 라이센스되었다.) 다만 이쪽은 베이비솀블즈는 EMI(현재는 워너뮤직 소속)의 팔로폰(Parlophone)에 소속되어있고 더티 프리티 씽은 유니버셜 뮤직 그룹의 버티고(Vertigo)에 소속되어있어 라이센스가 쉬웠을 듯 하다. 이 둘은 모두 한국에도 지사를 두고있는 거대 음반사이기 때문. 하지만 정규 3집 Anthems For Doomed Youth부터는 유니버셜 뮤직 그룹 산하의 Virgin EMI라는 거대 음반사에서 음반을 발매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리버틴즈의 라이센스반이 발매되었다.
러프 트레이드[32] 라는 인제는 메이저인 인디 레이블에 계약해서 모든 앨범들을 발매했다.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따낸 계약이고,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초기 매니저 배니 스푸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High Society에 갔어도(언더 인디 라벨) 1집은 명음반이 되었을 거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믹 존스, 버나드 버틀러같은 거물들과 만나서 같이 작업을 하게 점들이 바로 메이저 레코드 라벨과 계약하여 얻게 되는 굉장한 어드밴티지이다.
어쨌건, 굵고 짧게 활동한 밴드인만큼 열성 팬들이 많다(현지에서 'Hard Libertinees'라 불린다.). 비록 해체했으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오히려 미련을 두지도 않고(사실 유지 자체가 불가능한 게 사실이지만) 알아서 물러선 점, 어찌됐든 영국 락밴드들의 고질병인 마약 문제로 끝나게 되버린 안타까운 사연으로 인해 열성적인 립빠들에겐 애증의 대상이지만 결국은 피트 도허티와 칼 바랏이 순수하게 다시 합치기만을 바랄 뿐. 영국 음악 평론가들도 리버틴즈가 평탄하게 활동을 이어갔다면 인디 락의 판도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심심한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10년전에 때려치운 밴드로 이렇듯 과한 사랑을 받는 두 프론트맨이 그에 보답하는 길은 단 하나, 급전성 추억팔이(라고는 하지만 팬들은 그마저도 너무나 아쉬운거고..)를 지양하고 신보를 발매해 제대로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아닐까.[33]
2015년 글라스톤베리에 시크릿 라인업으로 공연했다.
2015년 레딩&리즈 페스티벌에 5년만에 돌아와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국내에서는 미묘한 인기 때문인지 애석하게도 내한은 아직까지 없다. 그러나 2019년, 칼 바랏의 단독 자격으로나마 내한 공연이 성사되었다.트위터 오피셜
[1] 이 즈음해서 도허티는 2집 녹음을 마치고 마약에 미쳐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굴다 연말에 용서받기 위해 복귀하려고 할 적엔 이미 칼 바랏으로부터 쫓겨난 후였다.[2] 2010년 여름에 온전한 4인조로 일시적 재결합까지 3번 존속했던 밴드다(...)[3] 2007년 Time for Heroes의 평론 中. NME의 이 베스트 앨범에 대한 평은 타 매체에서 말하길 리버틴즈에 대한 모든 존경을 보여주는 한 편의 논문급이라고 하였다.[4] 이 발언은 사실상 국내외에서 리버틴즈가 여타 매체를 포함해 들은 최고의 칭찬은 물론, 사실상 '노엘 갤러거가 이렇게 칭찬한 리버틴즈는 도대체 누군가?'로 본 밴드를 단연 유명케 만든 발언이다(..) 참고로 후술하듯 노엘 갤러거와 피트 도허티의 관계는 사연이 좀 있는 애증이 교차하는 선후배 관계다..[5] 2003년 Kentish Town Forum 공연. CSMN 뮤직 비디오의 배경으로서 마지막에 스테이지 인베이전으로 끝난 그 공연이다. 이 두 프론트맨의 마이크 셰어링을 담은 이 사진은 매체에서 리버틴즈를 가장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진으로 종종 쓰인다.[6] 영국 매체나 팬덤 사이에서는 줄여서 주로 '''The Libs''', 립스라고 칭하는 게 보통이다.[7] 혹자는 평론가적 시선이라고도 평하기도 하다.[8] 다만 두 프론트맨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그들이 처음 만났던 97년을 밴드 공식 연혁으로 치는 것이 사실상 맞는 계산법이긴 하다. 위키피디아를 포함한 공식 자료 및 팬덤에서도 리버틴즈는 97년도부터 활동한 밴드로 인정해준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리버틴즈는 그 유명세를 1년도 제대로 맛 보지 못한 밴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9] 리버틴즈가 해체 될 당시 신보 2집은 영국 종합 차트 #1에 플래티넘(40만 장 이상짜리 앨범)을 확정하고 전세계 투어 계약까지 걸려있는 상태였고, 2004,2005년은 NME는 말할 것도 없고 Q, Mojo, Ivor Novello 결산 시상식에서 많은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었다.[10] 이는 피트 도허티의 실제 영국 민사법 소송 판결문을 그대로 인용했다.[11] 2007년 피트 도허티의 솔로 공연 An Evning With Pete Doherty의 Hackney Empire 공연 중 칼 바랏과 함께, 2009년 Rythm Factory의 사업주 Johnny Rythm의 추모 공연의 일환으로 존 하셀을 제외한 3인조로서, 그리고 2010년 레딩&리즈 락 페스티벌의 헤드라인으로 2010년에 온전한 4인조로 일시적 재결합, 이렇게 세 번이다. 한 번 한 번 붙었을 때마다 영국 인디신에서는 엄청난 관심을 동반한 취재 열기는 두 말하면 잔소리이다.[12] 이 말을 한 사람이 바로 前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본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13] 이 둘은 개러지 락 밴드 중 사실상 잘 생기기로 대놓고 유명한 밴드이기도 하다. 물론 이와 무관하게 두 밴드 모두 음악성도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14] 물론 앨범 데뷔 전에 한해서. 그 이후로 전국적인 연예인 유명세를 얻으면서 이런 식으로 인터넷으로 채팅해가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15] 영국의 고대 그리스어 이름이며 Babyshambles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알비온은 리버틴즈 멤버들에게는 아르카디아라는 유토피아로 향하는 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The good ship Albion to Arcadia" 이것은 피트가 어릴 때 시를 쓰면서 직접 지어낸 것으로, 멤버들과 립스의 팬들에게 의미가 크다.[16] 피트와 칼의 찌뿌둥한 표정에 대해 칼 바랏은 "아직 레코드 계약을 못 딴 우리를 따라주는 옆의 두 친구에게 미안했다"고 대답했다.[17] 여기서의 개러지 록은 미국에서 탄생한 원류 개러지 록이라기보다는 7~80년대에 영국을 거쳐 발전한 펑크/포스트 펑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는 영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애초에 리버틴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밴드 중 하나가 더 클래시이니...[18] 스웨이드의 기타리스트. 버나드는 이들의 데뷔 싱글 <What a Waster>역시 프로듀스 하였다.[19] 이 후 영국의 기자가 스웨이드를 틸퇴할 시의 자신과 브렛과의 관계를 리버틴스의 피트와 칼의 관계와 비교하면서 질문하자 크게 화를내며 자신이 밴드를 떠났을 때 상황은 리버틴스와 비교하면 세발의 피도 안된다고 답했다.[20] 남자 락밴드 그룹에 따라다니는 10대~20대 여자들. 목표는 짧게는 밴드와 검열삭제하고 크게는 여친이 되어서 들러붙는 것. 막장 인생.[21] 칼이 뉴욕에서 만난 기타리스트. 후에 더티 프리티 띵스의 기타리스트가 된다.[22] 원래 유명 연예인들이 감방가면 자주 일어난다.[23] 아이러니한 것은 칼이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 곳도 부엌 싱크대라는 것이다. 쌍둥이도 있었는데 곧 죽었다. 이 얘기는 피트 도허티가 칼 바랏에게 쓴 노래 'You're My Waterloo'에 잠깐 나온다.[24] 가사 전문과 뜻은 아래 앨범/트랙 해설에 Don't Look Back Into The Sun 싱글 참고.[25] 사실상 많은 영국 인디 뮤지션이 그렇듯 스미스로 본격적으로 인디에 입문했다고 보면 될 듯 하다.[26] 대한민국 중고생들이 좋아하는 밴드들 거의 모두라고 보면 된다. 뮤즈의 전성기 때이기도 하고 린킨파크, 림프 비즈킷, 섬41, 에이브릴 라빈, 슬립놋, 에반에센스 등등 한창 앨범내고 날리고 있던 시기이다. 완전 미국 팝펑크 밴드들이 차트를 정ㅋ벅ㅋ[27] 블러는 브릿팝에서 벗어나 노이즈 록이나 일렉트로니카를 시도한 앨범을 발매하고 이후 데이먼은 고릴라즈 활동을 시작했으며, 오아시스는 망작 5집을 발매하던 시기이다. 당연히 펄프도 해체했고. 사실상 브릿팝이란 장르가 무너지던 시기이다.[28] 하지만 보기와 달리 내용에 관해선 찬사를 듣기도 했다. 폴 웰러의 경우 '천재적이다. 순수한 서정시와 같은 가사다'라 평가.[29] Indie Anthem Top50에 드는 곡이기도 하다.[30] 요즘은 모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알아준다.[31] 영국 인디 록 바닥에서는 피트 도허티를 모르면 간첩이다.[32] 더 스미스, 스트록스의 음반을 내놓았던 레이블이기도 하다.[33] 2010년, 2014년 재결합으로 받은 돈이 총합 20억원에 달한다. 물론 적당한 주기를 두고 재결합하는 타이밍 하나만큼은 능수능란한 사업가 수준이다. 음악은 골수 인디지만 이제는 명실상부한 기업형 거물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