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후토청
1. 개요
사할린 섬 남부를 영유하던 시절의 일본 제국 산하 통치 기관.
2. 상세
일본 제국이 설립한 가라후토민정서(樺太民政署)가 그 모체이다. 러일전쟁 결과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러시아 제국에게서 할양받은 남사할린 일대를 통치하기 위해 1907년 4월 1일 발족되었다. 카라후토[1] 라는 이름으로 외지로 편입, 일본인들을 정착시키기 시작했다. 청사는 도요하라 시(오늘날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소재했다.
적백내전 당시 일본은 사할린 전체를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령 북사할린(사가렌)을 점령하여 가라후토 청에 편입하였으나 결국은 일본령 가라후토(남사할린)로 밀려났다.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뒤 탄생한 소련은 당시 사할린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섬의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게 양도했다. 또 레닌은 사할린 영유를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 일본에게 사할린 섬 전체를 반환하려고 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1929년 일본 제국은 척식국을 내무성에 합병, 척무성을 새로히 발족하여 가라후토를 편입시켰다. 이후 한동안 가라후토청은 척무성의 관할이였으나, 한창 태평양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2년 11월 1일, 일본 제국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내외지(內外地)를 일원화하면서 가라후토청은 내무성 하에 편입되었다. 1943년에는 가라후토가 내지에 편입된다.
1945년 8월,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가라후토청 역시 소련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1달 만에 소련은 남사할린, 쿠릴 열도를 점령하였다. 소련은 심지어 홋카이도조차 반띵할 것을 요구했고 더 나아가서 전 홋카이도를 병탄하려 했다.[2] 이후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가라후토청은 일제 패망 4년 뒤인 1949년 6월 해체된다.
현재는 지하 자원 창고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일본도 러시아도 큰 가치를 두지 않던 땅이었다. 워낙 기후가 험하고 땅 자체도 경작이 거의 불가능한 불모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일본에서는 이 땅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남하하기 전까지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3] 실제로 일본이 남사할린을 얻어낸 것에 대해서, 그 따위 쓸모 없는 땅을 얻어서 뭐하냐는 식의 부정적인 여론도 다수 존재했다. 물론 땅이야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거라서 북사할린 전체까지 차지하려고 했지만.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사할린보다는 훨씬 이점이 많은 연해주나 만주 방면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그래도 도시의 꼴은 갖추고 있는 연해주의 도시들과는 다르게, 현재도 사할린은 1945년 당시와 인구나 인프라가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간되는 지도에서는 북위 50도 이하의 남사할린 지역이 어느 나라의 영토로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 귀속 문제를 보류했는데, 그 직후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하여 영토 관련 협의가 모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공식 요구는 남쿠릴열도 4개 섬 반환이고 남사할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극우 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선 쿠릴 열도 전체와 남사할린까지 환원 요청을 하고 있다. 러일전쟁 직후의 영토로 돌아가길 요구하는 것이지만 당연히 현재 실효지배국인 러시아에서 이를 헛소리 취급하며 무시하고 있다.
3. 가라후토청의 행정 구역
굵은 글씨는 지청 소재지.
3.1. 도요하라지청(豊原支庁)
- 도요하라시(豊原市) - 오늘날 유즈노사할린스크
- 도요사카에군(豊栄郡)
- 도요기타촌(豊北村)
- 가와카미촌(川上村)
- 오치아이정(落合町) - 오늘날 돌린스크
- 사카에하마촌(栄浜村)
- 시라누이촌(白縫村)
- 오토마리군(大泊郡)
- 오토마리정(大泊町) - 오늘날 코르사코프
- 지토세촌(千歳村)
- 후카미촌(深海村)
- 나가하마촌(長浜村)
- 도부치촌(遠淵村)
- 도무나이촌(富内村)
- 시레토코촌(知床村)
- 루타카군(留多加郡)
- 루타카정(留多加町) - 오늘날 아니바
- 산고촌(三郷村)
- 노토로촌(能登呂村)
3.2. 마오카지청(真岡支庁)
- 혼토군(本斗郡)
- 혼토정(本斗町) - 오늘날 네벨스크
- 나이호로정(内幌町) - 오늘날 고르노자보츠크
- 고니촌(好仁村)
- 가이바촌(海馬村)
- 마오카군(真岡郡)
- 마오카정(真岡町) - 오늘날 홈스크
- 히로치촌(広地村)
- 란도마리촌(蘭泊村)
- 시미즈촌(清水村)
- 노다정(野田町) - 오늘날 체호프
- 고노토로촌(小能登呂村)
- 도마리오루군(泊居郡)
- 도마리오루정(泊居町) - 오늘날 토마리
- 나요리촌(名寄村)
- 구슌나이촌(名寄村)
3.3. 에스토루지청(恵須取支庁)
- 에스토루군(恵須取郡)
- 진나이정(珍内町) - 오늘날 크라스노고르스크
- 우시로촌(鵜城村)
- 에스토루정(恵須取町) - 오늘날 우글레고르스크.[4]
- 도로정(塔路町) - 오늘날 샤흐툐르스크
- 나요시군(名好郡)
- 나요시정(名好町) - 오늘날 나요시 정
- 니시사쿠탄촌(西柵丹村)
3.4. 시스카지청(敷香支庁)
- 모토도마리군(元泊郡)
- 모토도마리촌(元泊村)
- 호요리촌(帆寄村)
- 시루토루정(知取町) - 오늘날 마카로프
- 시스카군(敷香郡)
- 도마리키시촌(泊岸村)
- 나이로촌(内路村)
- 시스카정(敷香町) - 오늘날 포로나이스크
- 지리에촌(散江村)
[1] 청의 이름은 아이누어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Kamuy kar put ya mosir)에서 따와 음차했다. 신이 강의 하구에 만든 섬이라는 의미.[2] 하긴 연해주와 쿠릴열도와의 위도가 비슷하긴 하다.[3] 사실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홋카이도, 쿠릴 열도만으로도 버거웠던 것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한 구조로 짜여진 일본식의 가옥과 의복은 사할린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지금만큼 교통과 운송이 발달한 때도 아니라서 멀리 떨어진 사할린까지의 물자의 보급에도 어려움이 있었다.[4] 1945년 10월 1일부로 시(市) 승격될 예정이었으나 남사할린 침공으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