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프 왕조
1. 개요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5년간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 쌍두독수리가 상징이다.
표트르 3세 이후의 정식 명칭은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Гольштейн-Готторп-Романовской)이지만 그 이후로도 여전히 로마노프 왕조라고 불렸다.
2. 상세
시조는 의외로 러시아계가 아닌 독일의 올덴부르크 귀족 출신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Кобыла)라고 하는데, 14세기 무렵 프로이센(당시 튜튼 기사단)에서 러시아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14세기면 러시아가 아직 몽골족의 치하에 있을 무렵인데 이때 건너왔다는 것은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설에 의하면 코빌라의 아버지가 튜튼 기사단에 반역을 저지르려다 실패해서 도망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반 4세의 첫 번째 아내가 이 로마노프 가문 출신으로, 둘의 결혼 때문에 차르의 지위를 계승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표도르 1세 사후 직계후손을 찾지 못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고, 1598년부터 15년간 이어진 혼란 시대로 돌입했다. 이 와중에 코빌라의 7대손인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가 1613년 러시아의 여러 보야르(귀족)들의 추대로 러시아의 차르(짜르 Царь = 황제)로 추대 받으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성씨에는 역사가 깃들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안드레이 코빌라의 아들은 표도르 안드레이비치 코빌린(Фёдор Андрейвич Кобылин)으로, 그 아들인 이반 표도로비치 코시킨(Иван Фёдорович Кошкин)은 코시킨으로 '코빌라'를 썼는데, 러시아식으로 성을 차차 바꿔나갔기 때문에 3대의 성이 제각각이다. 이반 대부터 코시킨으로 정착되었는데, 이반의 아들인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시킨(Zahari Ivanovich Koshkin)이 무슨 큰 공을 세웠는지 자하리의 아들 유리 자하리예비치 코시킨(Juri Zaharievich Koshkin)이 그의 자녀들 대부터 성씨를 모두 '자하린코시킨(Zaharin-Koshkin)'으로 바꿔버렸다.
하여 유리의 아들인 로만 유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Roman Jurievich Zaharin-Koshkin)은 가만히 있나 싶었더니 아들인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Nikita Romanovich Zaharin-Juriev)대부터는 아예 '코시킨'을 버리고 자하린유리예프(Zaharin-Juriev)로 성을 또 갈아치운다. 그리고 니키타 로마노비치의 아들인 표도르 때 '''드디어''' 로마노비치에서 따 온 로마노프로 성씨를 '''완전히 굳히고''' 다시 그 아들 미하일부터 로마노프 왕조를 이어간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Кобы́ла / Andrei Ivanovich Kobyla)
-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코빌린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Кобылин (Ко́шка[1] ) / Fedor Andreevich Kobylin)
- 이반 표도로비치 코시킨 (Иван Фёдорович Кошкин / Ivan Fyodorovich Koshkin)
-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시킨 (Захарий Иванович Кошкин / Zakhary Ivanovich Koshkin)
- 유리 자하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 (Ю́рий Заха́рьевич Заха́рьин-Ко́шкин)
- 로만 유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 (Рома́н Ю́рьевич Заха́рьин-Ко́шкин / Roman Yurievich Zakharyin-Koshkin)
-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 (Никита Романович Захарьин-Юрьев / Nikita Romanovich Zakharyin-Yuriev)
-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 (Фео́дор Ники́тич Рома́нов / Feodor Nikitich Romanov)
-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 Mikhail Fyodorovich Romanov)
남자 친족들은 대공(Grand Duke), 여자 친족들은 여대공(Grand Duchess) 칭호를 썼다. 그러다 1886년 알렉산드르 3세 때부터 Grand Duke는 황제의 아들과 친손자, Grand Duchess는 황제의 딸과 친손녀, 그리고 대공의 정식 부인에게만 쓰도록 했다. 그 외의 친족은 그냥 Prince/Princess. 일본 황실의 친왕/내친왕과 왕/여왕의 구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1762년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부계 혈통은 단절된다. 그 뒤를 이어 홀슈타인 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Karl Friedrich, 1700년 4월 30일 ~ 1739년 6월 11일)의 아들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하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다만 표트르 3세의 어머니가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였으므로 어쨌든 모계와는 연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로마노프 왕조로 불렸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비슷한 경우.
현재 로마노프 가문의 실질적 시조인 표트르 3세 때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19세기부터는 이 가문에 미남 미녀가 많기로 정평이 난다.[3] 그런데 그에 비례해서 경박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는 황족이 늘어나고, 외모가 뛰어나지만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로마노프 가문의 평판은 제정 러시아가 몰락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2세의 딸로 러시아 황녀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4] 은 잘생긴 사촌들에게 호감을 보이는 자신의 딸들에게 '네 사촌들이 그 잘생긴 얼굴로 문 뒤에서 시종들과 무슨 짓을 하는지 알게 되면 놀라 뒤집어질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일단 자기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부터가 상당한 미남이었고 결혼하고 나서도 수많은 애인을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도 큰 키에 어깨가 넓었고, 군사 훈련으로 단련된 몸을 가진 미남이었으며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3. 연혁
3.1. 초기 역사부터 표트르 대제까지
초대 황제인 미하일 1세(재위 1613~1645) 이후 표도르 3세가 죽은 뒤 제위를 놓고 다소의 혼란이 일어나다가, 1682년 유명한 표트르 1세(대제, 재위 1682~1725)가 즉위하면서 수습된다.
표트르 1세는 강력한 황제권을 추구해 러시아 절대왕정의 기틀을 다졌으며, 적극적인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의 체질을 바꿔놓으려 했다. 또한 이를 통해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1700~1721)을 치러 발트해로 나가는 통로와 발트 3국, 핀란드 등을 정복하였고,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모스크바를 대신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1721년에는 루스 차르국의 이름을 러시아 제국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열강으로서의 러시아의 등장을 알리기도 했다. 이때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되었고, 그 일대의 혹독한 추위와 식량부족, 과중한 노동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체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 생겨났다.
3.2. 여제 시대
1725년 표트르 1세가 사망한 뒤 또다시 제위를 놓고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는데, 어린 황제들의 급서로 중간중간마다 많은 여성 황제가 권력을 잡았다. 예카테리나 1세는 표트르 대제의 아내로서 문맹이었기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안나 여제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며 러시아 정교회 중심의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후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로 불리던 옐리자베타(재위 1741~1762, 표트르 대제의 딸)가 즉위했다. 그녀의 치세 20년 동안 러시아는 안정을 회복하여 7년 전쟁에서 그 힘을 과시하고 그 다음에 이어진 팽창의 시기를 맞는다. 다만 옐리자베타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엘리자베타의 사망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단절된다. 표트르 3세부터의 로마노프 왕조는 사실상 덴마크와 스웨덴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처럼 원래 가문명 뒤에 로마노프를 붙였다.
그 직후 즉위한 옐리자베타 여제의 외조카 표트르 3세는 무능하고, 러시아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친프로이센 성향의 독일인이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남계 혈통이 끊겼기 때문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재위 당시 외조카인 표트르 3세를 차기 차르로 지명한 것. 표트르 3세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광팬이어서, 다 잡은 전쟁을 중단하고 급히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평화협정을 맺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명백한 국가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물론 자살을 계획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행운이었지만.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도 살짝 언급된다. 스쿨데이즈 패러디로. 성질도 더러워서 아내를 버리고 공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다가 고작 반년만에 결국 러시아 정교회와 귀족, 특히 근위대의 지지를 얻은 아내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리고 1주일 뒤 알렉세이 오를로프라는 자에게 살해되었다.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인은 심한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발표되었다.
무능한 남편을 폐위해버리고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다시 러시아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러시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푸가초프의 난(1772~1775) 등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농노제를 강화해 민중을 억압했지만,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5] 에 농민을 이주시켜 대규모의 밀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려 농업을 진흥시켰다. 또한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고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 업적이 있다.
또한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 대성과를 거두었다.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1611년 모스크바 함락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준 폴란드를 멸망시켰으며, 남쪽으로도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투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리미아와 카프카스를 할양받아 영토를 넓혔다.
3.3. 나폴레옹 전쟁
러시아 원정 문서 참고.
예카테리나 2세가 죽은 뒤 그녀의 아들 파벨 1세(재위 1796~1801)는 서방에서 프랑스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궁중에서 포악한 행동을 일삼아 귀족들에 의해 살해되고, 대신 아들인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가 즉위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앙숙 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고 직접 군대를 지휘해 프랑스에 대항했는데,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통칭 '삼제三帝회전')에서 참패하여 포로신세가 되는 굴욕을 당했다. 이 패배 후 러시아로 돌아온 차르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대놓고 항의하지도 못하고 영국과 밀무역을 하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1812년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동진해 오자 이에 맞서 초토화 전술을 강행하여 프랑스 군대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애초에 나폴레옹은 제정 러시아의 부도(副都)인 모스크바만 함락하면 전쟁이 끝날 거라고 예상한 듯 싶지만, 러시아답게 모스크바 시민을 소개하고 도시를 파괴한 뒤 인근 농가를 초토화시켜 프랑스군이 폐허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그 사이 러시아는 군대를 끌어모았다. 쿠투조프 원수가 지휘한 러시아 군대는 정면대결보다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에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협상을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소득 없이 철수하거나 수도인 북쪽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는 방안 중에서 선택해야 했지만, 보급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견디지 못 한 프랑스 군대에게는 퇴각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이때의 패배는 워털루 전투와 함께 나폴레옹의 운명을 결정지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러시아의 승리는 그때까지 적어도 육상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나폴레옹을 확실히 꺾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러시아는 위대한 '조국전쟁'의 이념을 선전하며 제국 러시아의 위세를 드높였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이때 러시아의 힘을 과대평가한 서방국가들은 모두 러시아를 유럽 세계의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한 몫 끼워주게 된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조는 그 광대한 국토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때문에) 서유럽처럼 개혁을 시도하는 데 실패했다. 1825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터진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젊은 귀족들이 러시아의 문제점과 후진성을 자각하고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강력한 황실의 힘을 누르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가 반동정치를 강화하고 모든 개혁을 거부하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은 이때 이미 잉태되었다.
특히 이때까지도 러시아는 농노제를 통한 중세봉건 사회를 고집하였고 인구 99.9%차지하는 농노들의 처우는 시궁창이었다. 심지어 농노를 판돈으로 도박하는 귀족과 지주가 있었을 정도.
3.4. 몰락과 왕조의 멸망
러시아의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크림 전쟁(1853~1856) 때였다. 러시아 군대의 후진적인 모습은 다같이 막장이었음에도 두드러져 보였고, 패전 직후 차르가 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더 낫다'며 국가로부터의 개혁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1861년 역사적인 농노해방령을 내렸다.
그러나 농노해방령은 러시아가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의 준비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시행되어 농민들은 더 궁핍해졌고 견디다 못해 다시 농노가 되는 농민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러시아의 지식층과 개혁파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고 차르 체제가 막장이라는 것,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것만 인식시켜주었다.
결국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무정부주의자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고 첫 테러 때는 무사했으나 멀쩡히 살아나와 "난 괜찮다"고 하는 순간 대기했던 또다른 암살범이 기다렸다는 듯이 폭탄을 던졌다.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도다…"라는 말을 겨우 했는데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가서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1894)는 이를 계기로 반동, 억압정치를 더더욱 강화했다. 이로서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도 결정되었다.[6]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처음부터 황제감이 아니었다. 정치에도 무능하고 온후한 성품은 절박한 상태에 놓인 러시아의 체제를 개혁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것이 결정타였다.
이로 인해 발생한 경제난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차르 체제에 최후의 희망을 가졌던 모든 이들의 기대는 박살났고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은 이것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즉, 1905년 터진 1차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에 격렬히 항의하고 개혁을 부르짖었다는 점에서 12년 후의 2차 혁명의 전조였다.
처음에는 민중들의 거센 항의를 무시했던 니콜라이 2세는 저항이 점점 더 커지자 두려운 마음에 개혁을 약속했고, 민중의 항의는 조직력이 결핍되어있었기에 곧 가라앉았다. 차르는 이 요구가 아마 한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러시아 민중은 이제 차르 체제에 희망을 버렸고 전제정에 신물이 나있었다. '''1914년, 복잡한 동맹관계에 의해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자 이러한 불만과 분노와 증오가 일시에 폭발했다. 엄청난 전선의 패배 소식과 물가 폭등, 물자 부족 등 모든 것이 차르 체제의 실정(失政)과 무능과 부패를 보여주었다.'''
1917년, 러시아력 2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빵을 달라는 민중시위는 금세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어 마침내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2월 혁명) 전선에서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선언, 동생에게 양위하였지만 동생 미하일 대공이 거부하여 제정은 붕괴되고 임시정부가 통치하는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선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선동으로 러시아력 10월에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시정부를 뒤엎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건국된다. (10월 혁명) 1918년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자 유폐되었던 차르 일가는 처형되었으며 다른 황족들 역시 해외로 망명하거나 피살당하고 이것으로 300년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도 역사 속의 잔재로만 남게 되었다.
3.5. 현황
1917년 2월 혁명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며 제위를 잃은 로마노프 왕조는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이 전부 살해당하여 직계가 단절되었다. 이후 니콜라이 2세의 사촌,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8] 이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이 되었고 키릴 대공의 사후 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이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현재 여러 개의 파벌로 갈라지게 되었다.
현재 러시아 제국의 제위 요구자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는 총 3명으로 그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는 블라디미르 대공의 딸,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으로 그녀의 외아들인 게오르기 대공은 현재 스페인에 거주 중이며 러시아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게오르기 대공은 2021년 1월, 레베카 베타리니 (Rebecca Virginia Bettarini)[9] 라는 여성과 약혼했다고 하며 이들의 결혼식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블라디미르 궁전에서 거행될 것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는 이는 바로 앤드류 로마노프 공작 (Prince Andrew Romanoff/Prince Andrew Andreevich of Russia)[10] 으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이 되어 작가이자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 인물은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 (Prince Karl Emich of Leiningen)이라는 인물로 그는 자신의 5대조가 알렉산드르 2세이기 때문에 자신이 적통 러시아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알렉산드르 2세의 모계 후손이기 때문에 전혀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다. 사실 그는 제 7대 라이닝겐 후작 (7th Prince of Leiningen/Fürst zu Leiningen)의 장남으로 아버지가 사망하면 라이닝겐 후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으나 귀천상혼을 하는 바람에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안톤 알렉세비치 바코프 (Anton Alexeevich Bakov)라는 사업가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그의 도움을 얻어 로마노프 제국 (Romanov Empire)이라는 초소형 국민체를 만든 뒤 자신을 니콜라이 3세로 칭하며 즉위해버렸다. 이후 그는 로마노프 제국이 초소형 국민체에서 벋어날 수 있도록 실제 영토를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11]
러시아인들은 그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게다가 가장 정통성에 가까운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의 외아들, 게오르기 대공의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카를 프란츠 공[12] 으로[13] 마리아 여대공 사후 게오르기 대공이 어머니의 지위를 계승한다면 가문의 이름이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에서 호엔촐레른-로마노프으로 바뀔 예정이다. 물론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이라면 이를 가는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적이던 프로이센 왕가의 성씨를 쓰는, 빌헬름 2세의 직계후손을 러시아인들이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에 후일, 러시아에 왕정복고가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게오르기 대공이나 그의 후손들이 황제를 하겠다고 찾아온다면 좋은 꼴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14]
기존에는 게오르기 대공이 러시아에 관심히 전혀 없고 게오르크 폰 호엔촐레른으로 살아간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역으로 그는 독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구사하는 4가지의 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중 독일어가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언론에 따르면 게오르기 대공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자신이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이 될 것이라는 것과 표트르 대제의 위대함, 러시아 제국의 역사를 배우며 자란지라 자신의 정체성이 러시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2006년을 시작으로 러시아를 비롯해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국가들에 방문하여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브뤼셀에 Romanoff & Partners (로마노프 & 파트너스)라는 회사를 설립했다고 한다. 즉, 현재까지의 게오르기 대공의 행보는 영락 없는 러시아계 스페인인이며 러시아에 굉장히 관심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역대 로마노프 왕조 차르
뒤에 붙는 '~비치(남성)'나 '~브나(여성)'의 경우는 누구의 자식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제정 러시아에서 가톨릭이나 개신교 국가에서 시집온 여성들은 정교회 세례를 새로 받을 때 대부를 선 남성 또는 성인(성인을 대부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의 이름을 부칭으로 삼았다. 예컨대 예카테리나 1세, 2세나 니콜라이 2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같은 경우.
[1] 고양이라는 뜻의 별칭[2] 이고리 류리크비치는 '류리크의 아들 이고리'다.[3] 표트르 3세의 아들인 파벨 1세 역시 추남이었지만 파벨의 후처였던 마리아 표도로브나(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가 굉장한 미인이어서 로마노프 왕조에게 미인 유전자를 물려줬다. 니콜라이 1세로부터 시작되는 준수한 외모의 황족 계보는 모두 마리아의 자녀였다.[4]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아들인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와 결혼했다. 또한 알프레드 왕자는 훗날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으로 즉위하게 된다. 하지만 유일한 아들 알프레드(아버지와 동명이인)가 요절하면서 독일의 극단적인 살리카법 때문에 에든버러 공작의 딸들은 공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위는 에든버러 공작의 조카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넘어간다.[5] 흔히 우리가 '''흑토'''라고 부르는 그 천혜의 농토이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3세는 업적 또한 많이 쌓아 놓아 그렇게까지 평가가 나쁜 인물은 아니다.[7] 때리는 작은 망치 메이지 덴노와 멍한 표정으로 맞는 커다란 모루 니콜라이 2세 그리고 너덜 너덜해진 옷차림으로 중간에 끼여 고통 받는 고종 황제. 당대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은 신흥 열강으로 우뚝 섰다.[8] 1917년 당시 제위 계승 순위 3위였다. 계승 순위 1위였던 황태자 알렉세이와 2위 미하일 대공 (니콜라이 2세의 막내 남동생)은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미하일 대공은 귀천상혼을 했었기 때문에 그의 외아들에게는 제위 계승권이 없었다.[9] 결혼 후 러시아식 이름인 Victoria Romanovna Bettarini으로 이름이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10] 본인은 후자의 표기보다 전자의 표기를 더욱 선호한다.[11] 실제로 땅을 구입하여 그 곳에 로마노프 제국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여러 번 저지당했다.[12] 독일의 마지막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직계 후손으로 현재 프로이센 왕실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공과는 8촌 사이이다.[13] 즉, 마리아 여대공과 카를 프란츠 공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가 게오르기 대공이다. 현재는 카를 프란츠 공과 마리아 여대공은 이혼한 상태로 게오르기 대공은 어머니와 함께 자랐다고 한다.[14] 여담으로 빌헬름 2세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프린세스 로얄 (Victoria, Princess Royal)이기 때문에 게오르기 대공 역시 영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15] 표트르 1세의 이복형.[16] 공동황제. 표트르 1세의 이복형으로, 정신지체가 있어서 실제 정무는 보지 못했다.[17] 1696년 2월 8일까지 이복형 이반 5세와 공동황제였다가 그 이후부터는 단독황제가 되었다. 1721년, 러시아 제국을 정식 선포하고 자신을 "임페라토르(황제)"라고 칭함.[18] 황태자 알렉세이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고문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훗날의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2번째 황후인 예카테리나가 즉위했다. 농민 출신-게다가 러시아인도 아니고 독일계였다-으로, 문맹이었기에 정무는 귀족들의 추밀원이 맡았다. 표트르 1세가 재위하던 중 제위계승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는 생전에 그녀를 공동통치자로 못박아 놓았었다.[19]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할아버지 표트르 1세의 개혁 반대자'''라고 자칭하며 반개혁에 앞장(...)섰으나... 결혼식 직전에 천연두로 사망,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 남계가 단절된다.[20] 이반 5세의 딸. 정권의 반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반 5세 혈통의 안정을 위해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손자 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21]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벨프 가문 출신의 군주.[22] 생후 2개월의 나이에 즉위했다. 섭정은 비론과 어머니 안나 레오폴도브나가 맡았으나 다음해 일어난 엘리자베타의 쿠데타로 슐레실부르크 요새에 유폐되었다. 이후 육군장교 미로비치가 그를 탈출시키려다가 실패, 23세의 나이로 살해당한다.[23] 정통 로마노프 왕조의 종식.[24] 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 왕조 창건. 즉위 6개월 4일만에 폐위되었다가 급사.[25] 표트르 3세의 아내.[26] 피의 일요일, 러시아 혁명. 퇴위 후 유배되었다가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과 함께 총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