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할린 침공
남사할린 침공 (Invasion of South Sakhalin)
- 전투기간 : 1945. 8. 11 ~ 8.26
- 결과 : 일본군의 항복, 소련의 남 사할린 접수
1. 개요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의 일환으로 동시에 진행된 소련의 일본령 남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 침공. 이 공세로 사할린 섬 남부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 해체 이후로도 러시아령으로 남게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 배경
사할린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 사할린 섬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명 가라후토-치시마 교환 조약)으로 섬 전체가 러시아령으로 인정받았으나 러일전쟁을 마무리짓는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1905년 북위 50도 이남 남사할린 지역은 일본령이 되었다. 일본은 이들 지역을 가라후토(樺太, 화태)라 불렀다. 북위 50도선은 사할린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이 되었고, 이는 소련 성립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1945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일전 참전을 결정하면서 이 지역은 소련에게 있어 기필코 찾아야 하는 지역, 즉 실지가 되었다. 만주야 원래부터 남의 땅이고, 쿠릴 열도는 1875년 조약으로 포기하고 일본에 넘긴 땅이었지만 남사할린은 명백히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고 러일전쟁으로 빼앗긴 곳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되찾아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아울러 홋카이도를 거쳐 일본 본토 침공까지 바라볼 경우, 남사할린은 기필코 확보해야 할 전략적 요지였다.
3. 양측의 전력
소련군의 경우, 제2극동전선군 산하 제16군이 북사할린에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이 남사할린 침공의 총괄 책임을 맡았다. 16군은 예하 56군단(보병사단 1, 보병여단 3, 전차여단 1)과 255 항공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해군 북태평양 함대 소속 다수의 함선과 해군육전대 365대대,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기 80여 기가 추가되었다.
일본군으로선 불행히도, 소련군의 공세에 맞설 병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거대한 남사할린 전체의 방위는 일본 육군 88사단이 전담했다. 이들은 '''미국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결호작전의 일환'''으로서 1945년 2월 28일 제1차 병비계획으로 신편된 사단 중 하나였다. 당연히 장비의 질이나 훈련도는 형편없었다.[1] 추가적으로 가라후토 전역의 민간인 중에 약 1만여 명이 예비군 징집대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전황의 급박함을 보면 예비군 동원이 제대로 이뤄졌을지는 의문이다.
해상이나 항공전력의 지원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막강한 연합함대는 모두 미군에게 당해서 용궁 구경을 간 상태였고, 항공전력은 본토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미군 폭격기들을 막고, 가미카제 공격에 동원되느라 사할린에 배치될 여건이 안 되었다. 설사 항공기가 있었어도 연료가 없었을 것이다.
4. 전투 진행
만주 전역이 8월 9일에 개시된 것과 달리, 소련의 남사할린 침공은 8월 11일을 기해 이루어졌다. 88사단 수뇌부는 소련의 참전 소식을 듣고 급하게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88사단은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느냐 방어시설이나 주력부대의 배치를 섬 동해안에 집중했기 때문에 이틀동안 급하게 병력과 장비를 소련 국경으로 옮기느라 고생해야 했다.
8월 11일, 전 국경선에서 일제 포격과 함께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만주 전역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은 일제포격 후 병과간의 유기적인 협조하에 일본군의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는데, 일본군은 명백한 전력의 열세에도 곳곳에서 성공적으로 방어전 및 지연전을 수행했다. 일본군 88사단은 상대적으로 가라후토에서 징집된 인원도 많았고, 태평양전의 다른 전투와 달리 조금이라도 밀리면 일본 민간인들이 휩쓸린다는 위기감과 여기서 패하면 본토가 위험하다는 절박감 등이 겹쳐졌기에 열악한 전력에 비해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했다. 여기에 러일전쟁 이후 북위 50도선을 따라 만들어 둔 방어시설의 덕도 보았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는 뒤집을 수 없어서 전선 곳곳에서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소련군도 초기에는 총력을 다해 공세를 가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일본이 항복한 뒤인 8월 19일, 소련군 해군육전대는 해군의 호위와 함께 사할린 섬 남서쪽에 위치한 마오카[2] 에 상륙작전을 펼쳐 순식간에 항구를 함락했다. 마오카를 함락한 소련군은 오토마리(러시아명 코르사코프)로 진격을 개시했다. 오토마리는 일본 본토와 가라후토를 연결하는 항구도시로, 이곳이 떨어지면 가라후토의 일본군과 민간인들은 본토와 완전히 유리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군도 격렬히 저항했지만 마오카에 상륙한 부대가 육로로, 그리고 또 다른 상륙부대가 해로로 각각 오토마리를 협격했다.
8월 25일, 오토마리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소련군의 후방 상륙으로 전선이 사실상 붕괴되면서 주공인 56군단 본대는 가라후토의 수도인 도요하라를 점령했다. 이 시점에 이르러 가라후토의 일본군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각지에서 고립된 채 절망적인 저항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인 8월 26일, 일본군 88사단이 소련군에게 공식 항복함으로써 전투가 종결되었다.
5. 결과
소련은 포츠머스 조약 이래 잃어버린 영토인 남사할린을 완전히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이를 토대로 일본 본토 침공까지 고려했으나 일본이 항복한 데다, 미국이 소련의 지나친 남하를 경계하여 홋카이도까지 내려가는 것은 포기했다. 반대로 일본은 쿠릴 열도와 함께 남사할린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쿠릴 열도의 북방 4도와 달리 남사할린에 대해서는 영유권 주장조차 포기했는데 이는 1875년 조약으로 이미 남사할린을 포기한지라 국제법적으로 뭐라 비빌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사할린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들은 시베리아 혹은 사할린 내부에 마련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1950년대에 귀국하였고, 억류된 민간인들은 순차적으로 일본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은 당시 조국의 혼란스런 정국에다가 뒤이은 한소관계, 한국전쟁 등이 겹치면서 대부분이 사할린에 잔류, 사할린 고려인 1세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한소관계가 개선된 1990년 이후부터 일부가 귀환하기 시작, 2018년 현재 약 3,500명의 사할린 한인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6. 전쟁범죄
마오카가 함락된 8월 20일 오전, 마오카 우편전신국에서 교환원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여성 9명이 청산가리로 집단 자살한 사건인데, 일본에서는 이를 스스로 선택한 자결이라며 전후에도 순직으로 인정하고 이를 기리는 영화를 만들었고, 홋카이도 북단 왓카나이에 이들을 기리는 비문도 만들었다. 이들 9인은 전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 <빙설의 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은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자결한 것이라는 의혹은 50년대 이래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본 우익에서는 자발적으로 한 선택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청산가리가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던가.(…) 더군다나 사이판 전투 당시 만세절벽 집단 자살이나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온갖 사례를 보면 의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애당초 왓카나이의 추모 비문에도 처음에는 일본군의 지시로 자결했다는 문구가 있었으나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우익의 반발로 해당 문구가 지워지기도 했다.
사실은, 이 자살극에서 4명의 여성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한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은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자결한 것이라는 의혹은 50년대 이래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본 우익에서는 자발적으로 한 선택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청산가리가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던가.(…) 더군다나 사이판 전투 당시 만세절벽 집단 자살이나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온갖 사례를 보면 의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애당초 왓카나이의 추모 비문에도 처음에는 일본군의 지시로 자결했다는 문구가 있었으나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우익의 반발로 해당 문구가 지워지기도 했다.
사실은, 이 자살극에서 4명의 여성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한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 사할린 한인 집단 학살
대한민국 정부 산하 강제동원위원회가 확인한 사할린 한인 학살은 가미시스카 학살(19명)과 미즈호 학살(27명)뿐이지만 추가적으로 한인 학살이 있다는 의혹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는 당시 소련 측이 기록한 인구 통계 문서에서 1년여만에 한인 인구가 절반으로 급감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당시 소련은 이러한 인구 급감이 피난 내지 조선으로의 귀환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전쟁 과정에서 일본 측의 집단 학살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학살은, 당시 소련군을 막느라 정신없던 일본군보다는 침공 직후 각 마을 단위별로 급히 소집된 자경단 등 준군사조직이 소련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로 무자비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공식확인된 가미시스카, 미즈호 학살이 바로 그런 경우다. 다만, 급감한 한인 인구를 감안하면 일본군이 패퇴 와중에도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학살은, 당시 소련군을 막느라 정신없던 일본군보다는 침공 직후 각 마을 단위별로 급히 소집된 자경단 등 준군사조직이 소련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로 무자비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공식확인된 가미시스카, 미즈호 학살이 바로 그런 경우다. 다만, 급감한 한인 인구를 감안하면 일본군이 패퇴 와중에도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