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 플라키디아
1. 개요
서로마 제국의 황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이자,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여동생. '''황제의 딸로 태어나, 황제와 결혼하였으며, 황제의 어머니가 된 여인.'''
한때 서고트 왕 아타울프의 포로로 끌려가 그와 결혼하기도 하였으나, 서로마로 돌아온 후에는 공동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와 결혼하여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낳았다. 또한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12년 동안 서로마의 섭정으로 군림했다. 오늘날에는 서로마 제국 말기의 정치를 이끌었던 여걸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388년경, 갈라 플라키디아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두 번째 황후였던 갈라 사이에서 태어났다.[1] 어렸을 적에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의 집에서 양육되었으며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395년, 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자 그 오빠인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첫 황제로 등극하였다. 이후 여타의 정황을 보건데, 갈라 플라키디아는 오빠인 호노리우스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2.2. 첫 번째 결혼
410년 8월,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고트 왕국의 창사자였던 알라리크 1세가 로마를 약탈할 당시에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그리고 이후 414년 1월, 알라리크의 처남이자 후계자였던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프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이 성립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라 플라키디아가 아름다웠던 미녀였다는 사실도 한몫했겠지만,[2] 로마 제국의 황녀와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싶어했던 아타울프의 정략적 욕망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아타울프와 결혼한 갈라 플라키디아는 410년 말에 바르셀로나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아타울프는 어린 아들에게 장인어른(?)에서 따온 테오도시우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테오도시우스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고, 충격을 받은 아타울프는 아들의 시신을 은관에 담아 바르셀로나 인근에 매장하였다.
415년 9월, 아타울프는 바르셀로나의 궁전에서 목욕을 하던 중 수하였던 시게리크에게 암살당했다. 잠시 권력을 장악한 시게리크는 과부가 된 갈라 플라키디아를 모욕하기 위해 그녀에게 포로들과 함께 12마일을 걸어갈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시게리크를 제거하고 서고트의 왕으로 등극한 왈리아가 서로마 제국과의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그해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2.3. 두 번째 결혼
서로마로 돌아온 갈라 플라키디아는 417년 1월,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에 의하여 그 휘하의 장군이었던 콘스탄티우스와 혼인하였다. 이후 418년 즈음에 딸인 호노리아를 낳았고, 419년에는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를 낳았다.
421년 1월, 당시 서로마의 군사적 실권자였던 콘스탄티우스는 호노리우스와 더불어 서로마의 공동황제로 집권하게 되었다(콘스탄티우스 3세). 그 아내인 갈라 플라키디아도 그에 따라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제위에 오른지 불과 몇개월 후인 그해 9월에 사망하였다. 호노리우스는 또 다시 과부가 된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와 그 어린 자녀들에게 의심을 품곤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갈라 플라키디아는 자녀들과 함께 또다시 서로마를 떠나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해야했다.
2.4. 섭정
그로부터 2년이 지난 423년 8월, 호노리우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호노리우스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그의 뒤를 이어 서로마 제국을 통치할 가장 적법한 후계자는 그 조카이자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이었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였다. 그러나 당시 서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카스티누스는 로마의 치안장관 요하네스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황위를 계승하려면 요하네스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동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 또한 요하네스의 황제 참칭을 인정하지 않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격전 끝에 425년에는 참칭황제 요하네스는 라벤나에서 포위당한 끝에 동로마 군대에게 패하여 사망하였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발렌티니아누스는 아직 7세도 넘기지 못한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결국 갈라 플라키디아는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425~437년에 걸쳐 12년간 섭정으로서 서로마를 통치하였다.
그 과정에서 갈라 플라키디아는 내부적으로는 요안네스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자신을 후원했던 북아프리카 총독 보니파키우스 등의 장군들과 갈등을 빚었고, 외부적으로는 반달족과 고트족, 훈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침공에 시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마의 실권은 아에티우스의 수중에 넘어가기 시작하는 가운데, 437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18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이 되었다. 그에 따라 갈라 플라키디아는 섭정에서 물러났다.
2.5. 말년
그러나 섭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로마 궁정 내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과 발언권을 발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데 갈라 플라키디아의 딸이자 발렌티니아누스의 누나였던 호노리아가 모반을 계획하다가 발각당했을 때에도 얼마든지 처형당할 수 있었으나 고작 콘스탄티노플에 유폐된 것에 그친 점 또한 갈라 플라키디아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450년 11월, 갈라 플라키디아는 약 6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으며 시신은 라벤나에 위치한 영묘에 안치되었다. 이 무덤은 오늘날에는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라 불리는데, 그 내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서로마 말기 미술의 걸작이자 정수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