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스토 3세

 



[image]
제208대 니콜라오 5세

'''제209대 갈리스토 3세'''

제210대 비오 2세
[image]
'''교황명'''
갈리스토 3세 (Callistus III)
'''본명'''
알폰소 데 보르하 (Alfons de Borja)
'''출생지'''
스페인 발렌시아
'''사망지'''
교황령 로마
'''생몰년도'''
1378년 12월 31일 ~ 1458년 8월 6일 (79세)
'''재위기간'''
1455년 4월 8일 ∼ 1458년 8월 6일 (3년 120일)
209대 교황.
1378년 12월 31일 발렌시아에 있는 하티바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발렌시아와 레리다에서 공부하고 발렌시아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그 후 아라곤 궁정에서 존경받는 법학자로 알폰소 5세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1429년에 알폰소 5세는 그를 파견해 대립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자발적 퇴위를 유도했다. 그 보상으로 그는 부유한 발렌시아 주교좌를 받았다. 1443년에는 바젤 공의회에 대한 알폰소의 지지를 철회시켜 그와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의 화해를 이루어 내면서 다시 외교력을 입증했다. 그 보상으로 그는 1443년 5월 2일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추기경으로 지낸 12년 동안 특별한 명성을 누리지는 않았으나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소박하고 조용히 지냈고, 사치와 허세를 싫어하는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선종에 따른 콘클라베에서 유력 후보 2명 가운데 선출자가 나오지 않았다. 한 명은 콜론나 가문이 반대했고, 다른 한 명인 유명한 신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요안니스 베사리온은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선출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타협안으로 중립적인 인물인 알폰소 데 보르하가 선출되었다.
갈리스토는 통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치고는 놀랄 만큼 활동적이었다. 1453년에 함락된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조직에 전념하며 이를 최우선 과제로 삼은 그는, 이 성전에 자신의 모든 것,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유럽 도처에 설교가와 특사들을 급파하여 세금을 거두고, 1455년 5월 15일자 칙서에서는 1456년 5월 1일을 기해 육해군의 연합군이 출정할 것임을 선포했다. 로마에서는 금과 은으로 된 예술품들, 심지어 값나가는 책들을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테베레 강에서 갤리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에 반해 내정 문제에 골몰하고 있던 유럽 각국 군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1456년 7월 베오그라드 전선에서 오스만군 격퇴, 1457년 8월 레스보스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 격퇴 그리고 에게 해에 있는 몇몇 그리스도인 섬 탈환 등 산발적인 군사적 승리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한편 십자군 원정을 위한 헌금 요구는 프랑스의 공분을 샀다. 파리 대학교는 보편 공의회를 요구했고, 독일에서는 교황의 간섭과 가혹한 징수금으로 커지던 불만이 더욱 증폭되었다. 독일 교회와 프랑스 교회가 광범위한 자유를 요구하자 이를 막기 위해 신임 추기경이자 훗날 비오 2세가 되는 에네아 실비로 피콜로미니 추기경에게 외교력을 동원할 것을 요구했다.
오랜 후견인이었던 아라곤과 나폴리의 왕 알폰소와 사이가 나빠진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알폰소가 십자군 함대를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가 아니라 자신의 영토 확장을 위해 제노바를 공격하는데 이용하자 갈리스토는 격노했다. 불화는 지속되었고 알폰소 사망 후 갈리스토는 알폰소의 아들 페르난도 1세 대신에 자신의 조카를 나폴리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했다.
갈리스토는 소박하고 경건하며 자비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완고하고 고집이 세서 추기경들의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니콜라오 5세와는 달리 예술에 무관심해 인문주의자들은 실망했으나, 그들이 말하는 만큼 그가 그들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니콜라오의 로마 재건 계획을 중단시켰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그의 타고난 인색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십자군 원정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그는 친척과 동포들에게 아낌없는 호의를 베풀었고 이 때문에 원성이 자자했다. 그는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교황령의 요새들에 스페인에서 고용한 사령관과 수비대를 두면서, 조카인 스폴레토 공작 페드로 루이스를 산탄젤로 성의 책임자 겸 로마의 장관으로 임명하고, 같은 집안 출신 20대 초반인 두 종손은 추기경에 임명했다. 그중 한 사람인 로드리고 보르자는 교황청 상서국 부국장으로 승진했으며, 훗날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된다.[1]
갈리스토가 지명한 스페인 사람들은 교회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가 그들에게 수여한 성직록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대부분 스페인에 있었다. 1455년 6월 11일에 갈리스토는, 1431년 5월 30일에 있었던 루앙에서 마녀와 이단자 혐의로 화형당한 잔 다르크 사건을 재심에 회부하여, 1456년 6월 16일에 그녀에게 내려졌던 이단 죄를 파기하고 그녀의 무죄를 선언했다.
같은 해에 그는 전임 교황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교류를 엄격히 금지하는 법률을 부활시켰다. 베오그라드에서 오스만군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는 8월 6일을 예수 변모[2] 축일로 지정했다. 1458년 그의 선종으로 카탈루냐인들에 대한 증오가 폭발해 폭동이 일어났다.

[1] 서적에 따라 조카, 종손으로 엇갈리는데 나이 차이가 53년이라 종손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당시 로마에선 루머로 알렉산데르 6세가 총애를 받자 갈리스토 교황의 친아들(사생아) 설까지 나돌았다.[2] 마태오 복음서 17장 1-9절, 마르코 복음서 9장 2-10절, 루카 복음서 9장 28-3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