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데르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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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대 인노첸시오 8세

'''제214대 알렉산데르 6세'''

제215대 비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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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핀투리키오가 바티칸 교황 궁전 보르자 아파트에 그린 초상화
'''교황명'''
알렉산데르 6세 (Alexander VI)
'''본명'''
로데리크 랸솔 이 데 보르자
(Roderic Llançol i de Borja)
'''출생지'''
스페인 발렌시아
'''사망지'''
교황령 로마
'''생몰년도'''
1431년 1월 1일 ~ 1503년 8월 18일 (72세)
'''재위기간'''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 (11년 7일)
'''대관미사'''
1492년 8월 26일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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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젊은 시절
2.2. 교황
3. 기타
4. 창작물에서의 모습


1. 개요


'''탁월한 정치가이자, 행정가이자, 외교가이며, 선견지명이 있으며,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이 비상했고, 비상한 음모가이며, 유명한 정력가였다.'''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中. 세간의 평가를 논하며.

율리오 2세 ~ 레오 10세로 이어지는 괴물 교황들의 시작점이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으로 유명하며 뇌물, 돈세탁, 매관매직, 친인척 비리 조장, 밀실 정치 등 정치판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부정부패와 패악을 저지른 인물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뛰어난 정치수완을 가졌고, 권모술수의 달인에다 대세를 보는 능력이 워낙 탁월하여 업적도 많은 편인 복합적인 인물. 현대 역사학자인 새러 브래드퍼드의 평에 따르자면 "지혜, 정신적 활력, 건강, 국제적 행정 경험, 당당한 풍채…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회장에게 요구되는 그런 자질들을 모두 갖추었다.'''"고 했다. 그런 양반이 왜 교황을 했냐면, 그때 당시 교황은 현재 국제연합의 사무총장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다.[1]
물론 현대적 시각, 그것도 지극히 현대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르네상스 시절의 교회라는 조직을 해석한 관점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참고나 해 두자. 당장 이 사람 바로 다음 시대에 터진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가톨릭교회의 악행을 지탄하면서 써 먹은 떡밥의 많은 단골 레퍼토리를 제공한 양반이니, 제대로 된 종교사적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재평가니 뭐니 할 여지가 없다. 교황령이라는 세속 국가의 군주에다가 당시 교회 조직의 특성상 정치적 능력 또한 교황들에게 요구되었다는 여건도 있지만[2], 애초에 정치적 수완의 기본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지적하듯 '구렸지만 겉으로는 깨끗하게 보이게 하는 능력'이지, 대놓고 손가락질 받는 능력이 아니다.[3] 가톨릭 교황 사상 최악의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1위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종교인이 아닌 세속 정치인으로 보면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진 지도자라고 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4]
워낙 독특한 인물이라서 그런지 그의 재위 기간을 그린 창작물에 꽤 자주 나오는 편이다. 그런가 하면 자식 중의 1명인 체사레 보르자 역시도 유명인. 의외로 이 가족 중에는 성인도 있는데, 바로 체사레 보르자의 동생인 조반니 보르자의 손자이자 예수회 제2의 설립자라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데 보르하(또는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축일 10월 10일)이다. 율리오 2세 교황을 끌어내리려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려다 파문당한 프란치스코 데 보르자 추기경과는 동명이인으로, 떠도는 자료 중에 두 사람을 혼동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

2. 일생



2.1. 젊은 시절


1431년생으로, 스페인의 대귀족 보르자 가문에서 태어났다.[5] 같은 가문구성원인 교황 갈리스토 3세의 조카인 탓에 20대 중반에 이미 추기경이 되고, 2년 뒤에는 발렌시아 주교가 되었다. 그 후 갈리스토 3세, 비오 2세,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등을 섬기는데, 이 과정에서 성직을 팔아넘기면서 막대한 부를 쌓고 권력자들을 만나게 된다.
젊었을 때는 성직자임에도 여러 여자들을 후리고 다녀 인정한 자식만 8명이다. 그중 3명은 끝내 어머니가 누구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창작물에서 간혹 다루듯이 그의 인정을 받은 자식이나 그의 인정을 받지 못해 사생아가 된 자식들도 꽤 많이 있을 거란 떡밥이 있다. 다만 알렉산데르의 경우는 조금 지나치긴 했지만, 당시 여자를 거느리는 추기경은 상당히 많았다.[6]
1492년 인노첸시오 8세가 사망하자 교황 후보에는 올랐으나,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이탈리아인 추기경들로부터 견제를 받아 미래가 불투명해졌는데, 추기경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교황에 선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인지는 아직까지 논란 중. 피렌체 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초반부터 투표에서 우위에 있었고 스페인 출신으로 무시당했던 것은 맞지만, 그의 유능함은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돈으로 표를 사기에는 로드리고의 예산을 초과할 뿐더러, 돈으로 해결이 될 문제였다면 줄리아노가 이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가 있다. 덧붙이자면 뇌물은 당시의 관례 아닌 관례였는지라, 성직자로서 할 짓이 아닌 건 맞지만 알렉산데르만 뇌물을 썼던 건 아니기도 하다.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므로, 오히려, 비교적 열세였던 알렉산데르만 비난당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다.

2.2. 교황


교황이 된 뒤에는 다른 추기경들의 퇴임 압박을 받았고, 뇌물 증여가 대중에 알려져 큰 비난을 받았기에 위치가 위태로웠다. 그 때문인지 교황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상당히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교황청의 재정을 아끼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하고, 법을 준수하는 등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한편으론 자신의 아들인 체자레 보르자를 16살 때 대주교, 얼마 후 추기경으로 만드는가 하면, 친인척을 요직에 앉혀 자신의 권력을 돈독히 하기도 했다.[7]
대외적으로는 나폴리의 아라곤 왕가에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혼인시켜 관계를 개선시키고, 떠오르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는 회유적으로 대처해 불가침에 가까운 상황을 유지했다. 1494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나폴리 왕위 계승권과 알렉산데르 폐위[8]를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에는 그와 직접 담판을 벌여 로마를 그냥 통과하게 했으며, 이윽고 신성로마제국베네치아 공화국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가 하면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피렌체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위협을 받기도 했는데, 초기에는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전권을 장악하고 사치를 반대하는 분서사건을 저지르며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런데, 사보나롤라의 제자가 '불을 통한 재판(불의 심판)'[9]에 응해버리는 바람에 난처해진 사보나롤라는 재판장에 나서지 않았고, 이것을 사보나롤라가 뒤가 구리다고 받아들인 피렌체 민중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 교수형[10]에 처해버렸다. 이로서 알렉산데르 교황은 위기를 다시 넘긴다. 마르틴 루터를 만난 후대의 교황에 비하면 시절이 좋았다[11].
그 후에는 또 다른 아들이자 교황군 총사령관이었던 후안 보르자가 의문사를 당한 후,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환속시켜 프랑스의 속국 나바라의 공주와 혼인시키고 프랑스의 발랑스 공작으로 삼아 이탈리아 중부 교황령에서 반 독립 상태로 할거하던 여러 군주국들을 평정하고, 보르자 집안이 다스리는 통일 로마냐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12]
세속군주로서의 업적 외에 기독교의 최고 수장으로서의 업적[13]도 있는데, 신생 스페인 왕국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빌미로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금지했다.[14]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에게 '스페인 교황' 소리를 들었던 그를, 고향인 스페인에선 이를 비아냥 거려 '유대인 교황'이라고 씹었다고. 성직자로서는 문제가 많았지만 차라리 세속군주나 황제였다면 정치력으로써 확실한 명군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3. 기타


의외로 현재의 아메리카 대륙 지도를 그리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는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항로를 개척한 후 스페인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며 험악한 분위기가 되자, 교황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에 세로로 선을 긋고 신대륙을 양분한 뒤 두 나라가 알아서 가지라고 중재한 것이다. 교황의 중재에 따라 1494년 6월 4일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las)이 체결되어, 사실상 남미 지도(브라질 + 나머지 스페인어권 국가들)는 이때 다 그려졌다.
또한 이를 계기로 남미에 관심을 가져 수많은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순례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그 헌금으로 교황청을 부자로 만드는 등의 활약을 펼친다.[15]
1503년 8월 18일에 72살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체사레 보르자와 동시에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열병에 걸린 뒤 일주일도 안 되어 사망하게 된다.[16] 재위 11년 만이었다.
생전의 권세에 비하면 사후가 상당히 불쌍한데, 더운 날씨 탓에 시스티나 경당에 잠시 안치한 시체부패하여 부풀어 오르는 바람에 관에 들어가지 않자, 장례를 맡은 바티칸 관리들이 시신을 카페트로 만 뒤에 관 속으로 쑤셔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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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인 몬세라토 델리 스파뇰리 성당(Santa Maria in Monserrato degli Spagnoli)으로 옮겨져 삼촌 갈리스토 3세 옆에 안장되었다.

4. 창작물에서의 모습


음험한 밀실정치와 뒷공작으로 세계를 조종한 교황이라는 이미지 덕분인지, 가공매체에서 음험한 인물로 꽤 자주 등장한다. 게다가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와 함께 세트로 까이기도 한다. 문제는 역사에 기록된 모습보다 훨씬 좋게 그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도 나온다. 에드몽 당테스가 손에 넣은 보물은 스파다 추기경이라는 사람의 것이었는데, 추기경 직위를 알렉산데르 6세에게 돈을 주고 산 것. 그런데 알렉산데르 6세와 체자레 보르자는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스파다 추기경을 독살하고 재산을 가로챌 음모를 꾸몄다. 스파다 추기경도 그걸 예상하기는 했는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몽테크리스토 섬의 동굴에 숨겨놓고 상속자인 조카에게만 그 동굴의 위치를 알려 주었는데, 운이 더럽게 없었는지 체자레 보르자가 조카까지 불러서 함께 독살한 것. 그 때문에 단테스의 스승인 파리아 신부가 불을 쬐면 글자가 나타나는 용액으로 쓰여진 문서를 우연히 불쏘시개로 쓰려다가 비밀 문서임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그 전모가 묻혀 있었다. 파리아 신부는 스파다 추기경의 마지막 후손인 스파다 백작의 비서였고, 그의 임종 때 유산의 상속권을 인정받았기에 스파다 추기경의 보물은 당테스가 나름 합법적인 방식으로 유산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스페인에서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스페인어로 '보르히아'라는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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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는 미국에서 제작하는 '더 보르지아'라는 미드 시리즈가 있다. 제러미 아이언스라니 배역이 참 어마어마하다.
되도록이면 역대 교황들을 최대한 쉴드쳐 주는 천주교 측에서도 이 인물은 흑역사 취급하는 편이다. 아니 이 인물을 포함해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아예 따로 취급할 정도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로드리고 보르지아(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항목 참조.
르네상스 시기 교활하고 잔인했던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어 통치하는 게임 THE POPE: POWER & SIN(교황: 권력과 원죄) 2020년 플레이스테이션 4, Xbox One, 스팀으로 한글 자막으로출시예정이다.


[1] 위치는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했으나 여러 나라의 추기경들이 모여 선출되는 이가 교황이었기에 교황 또한 국적이 다양했다. 알렉산데르 6세만 보더라도 스페인 국적의 인물이었다.[2] 애초에 교황령이라는 나라가, 이탈리아 반도의 5분의 1은 충분히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 기준으로) 대국이었다.[3] 다만 마키아벨리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군주론에서 알렉산데르에 대해 '교황청이 군사력을 가지면 얼마나 무서워지는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오히려 그가 비난한 것은 교황청이 군사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준 프랑스루이 12세.[4] 믿기 어렵겠지만, 식스토 5세우르바노 8세는 알렉산데르를 ''' '성 베드로 이후 가장 뛰어난 교황' '''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물론 이 두 사람도 각자 교황령 내에 횡행하던 도적 떼 퇴치와 교황령의 방어 강화라는 업적을 남겼다. 다만 식스토는 도적 떼에게 내리는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우르바노는 족벌주의가 너무 지나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는데, 당시의 교황령에게 꼭 필요한 일을 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저지른 필요악 때문에 비난받았다는 건 알렉산데르와 일치하는 부분.[5] 이 해에는 잔 다르크가 화형당해 죽었고, 블라드 가시공이 태어났다.[6] 당장 알렉산데르 인생 최대의 라이벌인 율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훗날의 교황 율리오 2세)도, 펠리체라는 딸을 낳았다.[7] 실제로, 체사레를 후임 교황으로 앉히려 했다는 추측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교황직을 이용해 무언가 큰 일을 해보려던 알렉산데르의 입장에서 자신의 뒤를 이은 교황이 보르자 가문에 우호적인 사람. 아니, 아예 보르자 가문의 사람일 경우의 유리함을 모르지 않을 터였으므로. 실제로도, 보르자 가문은 보르자에 적대적인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 한편 교회법상으로 보면 사생아는 교회의 최고직에 세우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실제로 체사레 보르자의 경우가 이례적인 것이지만 결국 추기경직까지 한계였다. 체사레는 이후 교황군 총사령관이자 간디아 공작이었던 형제 후안 보르자가 의문사를 당하면서 망설임없이 추기경 자리를 박차고 환속해, 발랑스 공작이 되었다.[8] 알렉산데르의 최대 라이벌이자 훗날 율리우스 2세로 즉위하는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교황 선거 직후 프랑스로 망명했었기 때문. 샤를 8세의 원정 당시 직접 길잡이가 되어 함께 이탈리아를 침공했다.[9] 즉,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하느님이 보호해 줄테니 불을 붙여도 타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식의 재판. 마녀사냥 할 때의 바로 그거다. 불 위를 걷는 거라 특수한 발바닥을 가진 생존자가 조금은 있었다.[10] +화형이란 이야기도 있다.[11]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사보나롤라를 평하여, '무기를 갖지 않은 예언자는 자멸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 즉 민중에게 언제까지나 자신의 말이나 자신이 세운 법을 지키도록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민중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게 되자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12] 본 항목에는 간략하게 서술되었지만, 알렉산데르 6세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들로 분열된 틈을 노린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이 땅따먹기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탈리아를 '로마냐 왕국' 으로 통일. 땅따먹기를 끝내려 했던 것. 이 경우 교황령은 오늘날의 바티칸 시국과 마찬가지로 종교만을 담당하게 되며, 교황령 천년 역사상 스스로 세속 권력을 포기하려 했던 교황은 알렉산데르 6세가 '''유일하다.'''[13] 상술한 바와 같이, 교황령이라는 나라가 존속했을 때의 교황은 똑같이 '교황' 이라고 하지만 오늘날의 교황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14] 레콩키스타의 후폭풍으로 이슬람 왕조 때 부를 축적한 유대인 사냥에 열을 올렸는데 잘하면 전 재산 몰수 후 강제 추방이었고 개종이냐 화형이냐 선택을 강요던가 심하면 그냥 선택의 여지 없이 그냥 태워죽였다.[15] 교황청 자체가 부유해지지는 않았다. 순례자들의 헌금은 대부분 체사레 보르자에게 넘겨져 군사비로 쓰였다. 또한 순례자들을 불러들인 것은 희년이라 하여 50년마다 한번씩 있는 행사로, 딱히 알렉산데르가 '나 돈 없음. 그러니 로마로 순례 오셈' 한 건 아니다.[16] 연회에서 보르자 가문 비전의 독약 칸타렐라로 다른 사람을 독살하려 했는데, 잔이 뒤바뀌는 바람에 부자가 독을 마셨다는 야사가 있지만 신빙성은 낮다. 당장에 알렉산데르 치세에 교황령에 파견되어 있던 페라라 대사가, 본국에 '로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쁜 공기' 때문에 병에 걸렸기에, 교황과 발렌티노 공작이 병에 걸린 것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라는 보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당시에는 말라리아의 원인이 나쁜 공기라고 생각했다. '말라리아'라는 병명도 라틴어로 '나쁜 공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