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전투
1. 개요
일제강점기 1937년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국내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 80여 명 등 약 17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서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1]
2. 배경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 사장 직책을 맡고 있던 김일성은 1936년 말 광복회 조직의 구축에 노력하였다. 김일성이 장백현에 6사 조직과장 권영벽을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한 것은 같은 해 9월이었다. 갑산군에서는 1935년부터 공작이 시작되었는데, 이 지역의 적색농업조합 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박달은 김일성과의 연락을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달과 김일성의 연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2] 한편 김일성은 권영벽과 장증렬 등 요지로 파견한 공작원들로 하여금 중공 동만특위 장백현 정치공작위원회를 조직하게 했는데, 권영벽이 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 공작위원회와 당세포, 생산유격대 조직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3]
1937년 3월에 열린 장백현 서강양목정자회의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제4사와 6사·2사가 합동으로 전개하기로 한 이 진공작전에서 유일한 한인 단위부대장으로서 장백근거지를 건설한 김일성이 작전의 주도권을 잡았다.
동북항일연군 6사는 장백현 쪽에서 함경남도 보천면을 공격하고, 나중에 2·4·6사는 백두산 서남쪽의 간삼봉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진출하여 일경의 주재소를 파괴한 제4사의 활동은 ‘최현’의 소행으로 알려져 최현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김일성을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밤부터 전개되었다.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의 국내진입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부 조직이 호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무산으로 진출한 최현의 4사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국내진공과 4사 지원이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거점으로 보천보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국경의 작은 읍인 보천보 습격 자체는 커다란 군사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은 혜산에서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변경으로 이곳을 습격한다는 것은 상당한 선전 효과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 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평가에 따르면 빨치산 부대로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한국독립운동의역사51권]
3. 내용
1937년의 만주지역 조선인 항일세력은 사실상 소멸하고, 30년 가까운 일제의 식민지배는 매우 견고해 일제가 상당히 기세를 높인 시기였다. 1937년 4월말, 식민지 조선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이재유가 검거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제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은 사라졌다." 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하였다. 특히 한반도 내에서 무장 독립운동은 남한대토벌작전 이후로 완전히 끊어졌으며, 이 때문에 독립운동 세력 내에서도 조금씩 패배감과 비관주의가 감도는 시점이었다.
후에 6.25 전쟁의 발발 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지만, 성격이 상당히 저돌적인 김일성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했다. 김일성 휘하 동북항일연군 90여 명, 내응한 국내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원 80여 명 등 항일세력 170여 명이 동원되었다.
습격 당시 주재소에 있는 일제 경찰은 셋, 조선인 보조원이 둘 있었다. 170여 명이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나 주재소 내 5명 모두 도주에 성공했다. 결국 순사의 딸인 2살배기 여아 1명과 주재소의 일본인 민간 요리사 1명이 유탄(빗나간 탄환)에 맞아 죽고[4] 공격 후에 주재원 5명의 무장(소총 5정, 총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목적 자체가 선전에 있었던 만큼 전술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며, 보천보 점령 후 토벌군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허둥지둥 보천보를 빠져나갔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경찰대가 추격하는 중 교전하여 일본 측은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이 발생했으나, 동북항일연군 측 피해자는 수십 명이었다. 오히려 이 사건 때문에 조국광복회는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
다만 이 전투는 일제의 지배력이 완벽하지 않음을 드러내어 독립군과 국내에 희망을 심어주는 공을 세웠고, 당시 상황에서는 이런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라도 큰 의미가 부여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간삼봉 전투 등 이후의 반응이 이 사건이 큰 의미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후로도 김일성을 토벌하려고 여러 차례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동아일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사건을 대서특필하여 호외기사[5] 를 내보낸다. 총독부의 보도통제를 슬쩍 우회하는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항일세력을 '비적'으로 칭하는 총독부의 방침을 따르면서도, 김일성이라는 '''순 조선인 이름'''을 중간 제목에 박아버려 겉으로는 비적떼라고 알리면서 조선인들에게 소멸된 줄 알았던 조선인 항일세력이 만주에 존재함을 대문짝처럼 광고한 것이다.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 지면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일제 말, 삼천리잡지에서 김일성의 행적 및 신원에 대해 직접 취재 및 주변인들 인터뷰까지 했을 정도였다.# ## 결7호 작전을 위해 제주도에 파견된 육지인들이 섬 사람들에게 김일성에 대한 소문을 전해주었다는 증언 채록도 존재한다. 해방 직후 중도우파 성향 잡지사 <선구>에서 창간기념으로 1945년 11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여기서 김일성이 군무부장에 1위로 조사되었다는# 사례를 보더라도 김일성의 유명세는 상당했다. 중도파 여운형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노선과 척을 진 김구도 이 사건에 주목했을 정도이다. 당시 여운형은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느라 금주, 금연하고 있었는데,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다가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4. 영향
이 보천보 전투로 얻어진 김일성의 명성은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강대한 일제 치하에서 순응해가던 조선인들에게 보천보를 일제 치하에서 탈환한 소위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대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두만강을 건너며 축지법을 쓴다"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로 대단하였으며, 김일성은 여기에서 얻어진 명성을 발판으로 해방 후 쟁쟁한 빨치산 선배들을 제치고 북한을 장악하게 된다.“… 7년 전(1943)에 나는 남선(南鮮)의 어떤 소학교 6학년생과 중학교 2학년생을 모아놓고 강연을 한 후, ‘제군은 현재 누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정직하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무기명으로 투표해 보라’고 말하면서 안심을 시킨 후 투표해 본 결과 놀랍게도 그들 중 67%가 김일성이라고 쓰고 있다”(鎌田澤一郞(카마다 사와이치로), 『朝鮮新話』(조선신화) 2, 창원사, 1950, 384쪽). [한국독립운동의역사51권주72]
일본군 역시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매우 놀라 그 다음해부터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대토벌작전을 벌인다. 1939년부터 일본군, 만주군 등 70여만 명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서고 그 결과 동북항일연군은 이 작전으로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고, 김일성을 비롯한 생존 병력들은 1942년까지 소련영역으로 탈출함으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이 종료되게 된다. 보천보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조국광복회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4.1.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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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는 1998년 10월 동아일보 취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측에 선물한 것으로, 동아일보의 보천보 전투 대서특필 호외보도(1937년 6월 5일)를 황금으로 뜬 금형이다. 원본은 평양의 김정일선물관[6] 에 있다. #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전 조선에 널리 광고해준 덕분에 북한에서 동아일보의 이미지는 매우 좋다고 한다.''' 북한에서 조중동 타격 운운을 대외적으로 주장하고 다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7] 물론 북한은 대내외적 보도가 철저히 다르다. 그래서 보천보 전투 선전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대한민국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라고 한다.
한편 이 일은 이후 공교롭게도 김일성 가짜설과도 연결된다. 보천보 전투가 이후 김일성 우상화에 연결되면서 역으로 가짜설의 근거로 이용하기도 쉬워졌기 때문. 자세한 이야기는 해당 문서 참조.
당시 일제치하에서 신문이 김일성에 대해 다루려면 비적으로 취급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을 비적으로 규정하고 있던 당시의 신문 기사는 보천보 사건 한 해 전에도 존재했었다.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시 다른 일대는 각지와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우편소 면사무소 삼림보호구사무소 등에 방화하는 일방 약 백여 호의 촌락을 포위하고 약탈을 마음대로 하다가 한 시간만에 대안으로 도주한 사건이 돌발하야 보천보 촌락의 천여 명의 주민은 공포에 떨게한 소위 제이동흥사건을 일으키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8일자.
예컨대 조선일보는 1936년 10월 4일에 김일성이 40여 명과 함께 스류다오거우(十六道溝)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박흥룡이라는 한인 농부의 집을 습격하여 소와 곡식을 가져갔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 밖에도 당시 김일성의 활동에 관한 보도들은 대부분 그를 비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약탈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4.2. 우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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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차원에서 이 전투를 그야말로 신화로 포장한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가랑잎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모래가 쌀이 되었다는 전투가 이것이다. 또한 일본군 수천 명을 섬멸하고 골짜기마다 일본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는 보천보 신화를 떠든다. 북한 영화 <내가 본 나라>에는 하도 일본군이 많이 죽어서 시체를 호박이라 속여서 날랐다나 뭐라나. 물론 당연히 거짓말이다. 모 탈북자는 자신이 탈북하기 전까지,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이 200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수십만 대군을 격파한 대전투로 잘못 알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다룬 다른 작품으로는 북한 시인 조기천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이 있다.
보천보 전투를 묘사하고 김일성을 우상화해 북한 정권이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북한 정권수립 전인 1947년에 썼는데, 김일성이 조기천을 칭찬하고 서사시 창작 중 따로 면담도 하였으며, 결국 북한에서 영화화까지 되었다.(중략)
이는 이름만 들어도 / 삼도 왜적이 치 떠는 / 조선의 빨찌산 김 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 태산을 주름잡아 한 손에 넣고 /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 '''축지법을 쓴다'''고
(후략)- 조기천 <백두산>
5. 김일성 자신의 평가
김일성 자신은 보천보 전투에 대해 군사적 성과보다는 정치적 의의를 강조하였다.
즉, 보천보 전투 자체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는 주장은 본인도 하지 않았다.“보천보 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땅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였다. …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어서 어떤 대원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지경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입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였다”[8]
6. 날조설?
일부는 '''김일성 보천보 날조설'''을 주장한다. 즉 김일성은 보천보에 간 적이 없으며 단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서 유순호(기사: 조선일보)등이 있다. 그러나 해당 기사에서 유순호는 '중국공산당 비밀 문서고에 김일성이 거짓말을 했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있다' 라고 했지만, 정작 그 문서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유순호의 발언뿐이다. 원본이나 원본을 촬영, 스캔한 사본 등이 없다. 게다가 유순호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조선족 출신 문학가로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므로 그의 발언에 신빙성이 없다.
7. 기타
- 야인시대의 22화[9] 중반에 악질 경찰 미와 경부와 그 부하들의 입을 통해 이 보천보 전투가 언급되는 부분이 짤막하게나마 등장한다. 미와 경부는 부하들에게 일의 경위를 듣고는 "이런 멍청한 것들…! 도대체가 그곳 경찰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칙쇼!! 칙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야…! 어떻게!!" 라고 펄펄 뛰며 분노하더니 고등계에 명령하여 비상령을 선포한다. 김일성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고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 부대'라고만 나온다.
- 아직까지는 한국 사회 내에서 이 전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그동안 북한 일각에서 주장해온 선전선동과 달리 실제로는 보잘것 없는 전과,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점, 무장단체의 총책 역할을 했다는 김일성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