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리사업
이 지구상에 북조선만큼 철저하고, 무지막지한 노력 투하를 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북조선 땅이 아무리 좁고 인구가 유한하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모든 책의 페이지가 검열 대상이 된다면 그 페이지가 어느 만큼이겠는가. 같은 제목의 100권의 책이면 그 100권 모두가 검열 대상이다. '''페이지에 있는 글줄이 모두 검열 대상이라고 쳐 보라. 글자 하나하나가.''' 도서 정리는 당에서 문제라고 제기하는 내용과 어투, 인명을 삭제하는 작업이다.
- 국민통일방송 <등나무집> 1부 23화 5.25 교시에서#
1. 개요
1967년 5월 2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의 "5.25 교시"로 시작되어, 김정일이 정식 후계자로 선포 된 1974년 무렵까지 계속 된 북한의 대대적 검열, 문화말살작업. 8월 종파사건과 함께 지금의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 북한을 만든 결정적인 사건.
이 사업으로 조선로동당에서는 최후의 분파인 '''갑산파까지 완벽하게 제거했으며,''' 주체사상으로 명명된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가 완벽하게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의 인텔리들은 "인텔리 혁명화"라는 구호 속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이 부분은 주체사상 항목 참조.
2. 내용
성혜랑의 회고에 의하면, 이 사건 이전까지 북한은 그냥 동시대의 폴란드나 현재의 쿠바 수준인 살기 나쁘지 않은 사회주의 인민의 나라였으나, 반수정주의의 태풍 아래에 대대적 인텔리 제거, 인텔리가 만든 "문화"에 대한 총공격, 좌경극단주의에 의한 반문화 혁명이 휩쓸고 갔다고 한다. #
1948년 북한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던 투표는 보면 99.97%의 투표율에 찬성투표율 98.49%을 기록했다. 6.25전쟁 이후 북한의 첫 선거는 1957년에 진행되었다. 여타 공산권처럼, 선거구마다 후보자가 1명뿐이었고, 공식 결과는 “참가자 99.99%, 찬성투표 99.92%”이었다. 즉, 아직 김일성식(式) “100% 참가, 100% 찬성” 제도가 도입되진 않았고, 소련처럼 국내에 극소수라도 출마한 후보자에게 반대할 수 있는 공민이 존재할 수 있는 점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1956년 8월 종파사건과 1967년 도서정리사업으로 민주주의의 싹을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이는 분서갱유, 문자의 옥, 문화대혁명 등 중국의 역대급 검열 사건의 축소판이나 다름 없는 사건으로, 모든 개인 서적은 불태워지거나 도서관에 들어갔다. 러시아 문학은 물론이거니와 '''마르크스''' 서적도 얄짤없었다. 한국도 비록 독재·군사정권 시대에 탄압을 받긴 했지만, 87년 민주화 이후 자본론을 비롯한 사회주의·공산주의 등 관련 서적들이 '명목상' 해금되었다. 다만 국정원, 경찰 등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국가보안법 명목으로 관련 서적 소지자들을 검거, 구속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도서정리사업이 실행되면서 전국 모든 가정, 직장의 책이 한 페이지마다 한 권도 빠짐 없이 샅샅이 검열을 받아 수령 우상화, 항일무장투쟁 절대화, 계급 혁명, 반부르주아 사상에 저촉되는 모든 문구에 먹이 칠해지거나 딱지가 붙었고, 심지어 페이지가 통째로 잘려나가기도 했다. 살아남은 책이라고는 수령 찬양용 정치 서적, "수령님 노작," 교시집 정도였다. 중국으로 따지면 기존의 책이란 책은 모두 불살라지고 분서갱유 당시의 진시황, 문자의 옥 당시 역대 청나라 황제들, 문화대혁명 당시의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책들만이 남겨진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제로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검열 사건이 일어난 그 당시의 중국까지도 검열과 숙청은 저때 당시의 북한 이상으로 심하게 했을지언정 최고 지도자를 찬양하는 서적만 남기고 모든 서적을 사실상 없애버리는 짓을 하지는 않았다. 당장 이 분야에서 본좌(?)로 손꼽히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조차도 실생활에 필요한 농업, 공업 등의 실용 기술서는 손대지 않았다.
역사 교과서에서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세종대왕 등 역사적인 인물들은 '''업적이 상당히 축소되어 김일성보다 못한 인물'''로 기록되었고[2] , 김일성은 순식간에 역사 인물 중에서도 킹왕짱이 되었다. 외국 음악은 소련이나 위성국 것일지라도 금지됐으며, 수많은 문화재가 박살났으며 서양화 화가들은 "현실 체험"이라는 미명 아래에 지방 농촌으로 쫓겨났다. 천리마 운동 시대에 크게 인기를 끌던 판소리는 "쌕소리"로 규정되어 춘향전, 심청전, 베벵이굿 전승자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외국 과학기술의 도입은 수정주의가 되었고, 선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조차 비판 대상이 된다.
이것 때문에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IT 기술도 한 동안 '''자본주의의 요물'''로 취급받은 적이 있으며[3] 영어와 일본어 등도 원쑤의 나라의 말을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한 적이 있었다가 [4] 나중에 2000년대에 들어서 영국식 영어를 들여오게 된다. 게다가 북한군의 교리 중에 적국 무기를 노획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괴상한 군법도 여기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는데, 그러면서 적국 민간인의 약탈은 용인하며 정식 교리에 편입시키는 트롤링을 저질렀다.[5]
인정받는 것은 '''김일성의 위대성'''을 찬양할 수 있는 것 뿐인데, 리승기가 만든 비날론에 '''주체섬유'''라는 이름을 붙여 김일성의 공인 양 미화해 버리는 식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북한 사전에는 이 도서정리사업의 근원이 된 '''5.25 교시'''가 발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가 기록에서 빠져있다. 또한 사회에서는 좀 "개명적인 취향"이 있는 친구, 나쁘게는 정치성이 부족한 만문한 사람의 별명은 "부기사"라 부르는 은어가 생겨났다. 이는 각종 영화, 소설, 예술 작품에서 "충신"으로 나오는 기사, 지배인, 실장과 대립되는 부정적인 인물이 항상 부기사, 부지배인, 부실장으로 나왔기 때문이다.5.25교시
선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조차 비판 대상이 되는 주제에 2009년 CNC를 자체개발했다고 크게 자화자찬한 것처럼, '''여느 막 나가는 사이비 체제가 다 그렇듯''' 북한의 도서정리사업도 모순점이 대단히 많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중앙도서관[6] 이 이관하면서 인민대학습당으로 개칭되었는데 북한 당국에서 이때 감추어졌던 책들까지 빠득빠득 모으면서까지 인민대학습당을 꾸미려고 했고 그 덕분에 도서정리사업 당시 사라진 서적들이 다시 빛을 보기도 했다. 다만 역시 북한이 아니랄까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건 마찬가지라 이 당시의 서적을 보려면 몇 주 이상은 꼼짝 없이 기다려야 한다고...
"북한은 남한과 달리 옛날의 공동체 사회가 잘 남아있다"고 주장을 막연하게나마 하던 사람들도 이 도서정리사업에 대해 알려주면 할 말을 잃는다. 애당초 이런 사람들이 "옛날의 공동체 사회가 잘 남아있다"고 할 때는 별다른 분석 없이 그냥 북한 주민들에게서 전근대적인 심상이 느껴지는 식의 이유로 하는 소리일 때가 많은데, 이것부터가 일반 북한 인민들은 여행증이 없이는 자신이 사는 인민공사를 벗어나는 게 극히 어려워서 그런 것이며 이 또한 상술했듯 도서정리사업 직후에 생긴 악법이다. 김씨 왕조에 의해서 강제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 당한 상황임에도 이를 남한 일부 지역에 남아있는 집성촌들과 비슷한 것처럼 잘못 인식한다면 그것만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큰 실례가 될 수 있다. 애당초 북한은 딱 이 도서정리사업으로 인해 모든 종류의 종친회와 고유의 의례 등이 다 박살이 난 상태이다.
3. 바깥고리
도서정리사업 - 김정일 리포트, 63~66p.
4. 같이보기
[1] 하지만 이 영상에서는 김일성의 역할이 빠져있다. 아들 김정일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서포터에 불과했다.[2] 기본적으로 외세를 물리치거나 민족국가를 부흥시켰다는 등의 활동 자체는 인정하되, '그들은 봉건시대의 인물들이고 기존 봉건국가나 체제의 수호나 존속을 위해 그러한 활동을 한 것'이라며 그 인물들과 활동들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식이다.[3] 사실 이는 외부 문물 도입이나 개방에 대한 문제에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4] 사실 이건 구일본군에서 태평양 전쟁때 영어를 비롯한 적국어를 금지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북한이 이 제도를 모방해서 이어받은 걸로 추정된다.[5] 나중에 북한군이 이 교리가 바보 같다는걸 깨달았는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기점으로 대남 공작원들이 아무런 각인 없이 불법 복제한 M-16으로 무장했기에 이 군법을 (일단 대남공작 간첩 한정으로나마) 공식적으로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6] 남한의 국립중앙도서관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