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국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강윤국
康潤國'''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본명'''
강백(康伯)
'''출생'''
1926년 9월 28일
함경남도 안변군 (現 강원도 안변군)
'''사망'''
2009년 10월 3일 (83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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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강윤국은 1926년 9월 28일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중림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본적을 두었다. 그는 1942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군수공장인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 입사해 노동자 생활을 했다. 1943년 5월 조선인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자 이에 분개하여 동지들을 모아 농성 시위를 감행했다가 요코하마 헌병대에게 검거되었다. 이후 훈방 조치된 그는 국내로 돌아왔다가 1945년 5월 권준(權俊), 우동학(禹東學), 유만수, 조문기 등과 결의를 하고 비밀 항일결사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했다.
1945년 6월, 친일 정치깡패 박춘금이 '대의당'을 조직하여 당수에 취임했고 경성 부민관에서 대의당 주최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결정했다. 이 대회는 조선인들을 선동해 일본군을 위해 싸울 총알받이로 내몰려는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이 날 행사에는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장성, 친일반민족행위자 세력들이 다수 참석했으며, 일제의 괴뢰정권인 난징정부와 만주국의 대표 등도 연사로 참여했다.
이 소식을 접한 대한애국청년당은 부민관에 폭탄 테러를 가하기로 결의했다. 유만수는 다이너마이트를 빼내오기 위해 수색 변전소 작업장에 인부로 잠입해 발파작업을 맡으면서 다이너마이트를 조금씩 빼돌려 뇌관 2개를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강윤국은 일본 헌병으로부터 권총 한 정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조문기의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는 강윤국이 권총을 빼돌린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유만수의 집에서 모임이 잡힌 어느 날, 어둠이 들 무렵 방으로 들어서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동지들은 두툼한 책 무더기를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죽여 물었다.

"이걸 보게."

강윤국 동지가 책 무더기 가운데 두껍게 장정이 된 책 한 권을 펼쳤다. 책 속에는 칼로 도려낸 구멍이 있었고 그 속에는 권총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어디서 난 거야?"

강윤국이 들려 준 사연은 이랬다. 국수공장을 하던 강윤국의 집에 자주 찾아오는 헌병 장교가 있었다. 특별히 군부의 지시사항을 전하러 온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부탁도 없었지만, 점심때가 되면 어슬렁어슬렁 들어와 대접을 받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두어 시간씩 늘어놓고 갔다. 강윤국의 아버지는 바짝 긴장했다. 공장 돌아가는 형편이나 매출 규모를 봐 두었다가 거액을 기부하라는 요구를 할까봐 전전긍긍했다. 가족들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헌병장교의 행동은 안하무인이 되어갔다. 3일 전에는 안채까지 들어와 사랑을 차지하고 앉았다. 아버지는 강윤국을 불러 술심부름을 시켰다. 다혈질인 강윤국은 배알이 뒤틀리고 열이 치받쳐 오르는 것을 참으며 나갔다. 걷다가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강윤국은 술을 사온 뒤 잔심부름을 자처하며 사랑방을 기웃거렸다. 예상했던 대로 헌병은 거나하게 취해서군복 상의까지 벗어놓고 건들거렸다.

"윤국아, 마당에 세숫물 좀 준비하거라."

강윤국은 이때다 싶어 마당에 세숫물을 떠놓고 수건을 가지런히 두었다. 아버지와 헌병이 마당으로 나가는때를 노려 재빨리 권총을 훔쳐냈다. 술자리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고 헌병은 만취해서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나섰다. 헌병은 술기운에 권총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돌아갔지만 다음 날이면 집안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 뻔했다. 밤새 안절부절못하고 숨길 곳을 찾다가 두툼한 책 속을 파내서 총을 숨겼다.

다음날 아침 일찍 예상했던 대로 헌병이 찾아왔다. 얼굴이 노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를 불러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아버지와 헌병은 방마다 들어가 여기저기 들추며 총을 찾았다. 이불 속까지 뒤졌지만 수북하게 쌓인 책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헌병은 찾아오지 않았다. 술에 잔뜩 취해 권총이 어디서 없어진 줄도 몰랐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리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감시가 있을까봐 어제까지 얌전히 집에 있다가 좀 전에 헌책을 내다 판다고 잔뜩 챙겨서 나왔지."

강윤국은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마쳤다.

"수고했어. 강동지."

우리는 그의 대담한 행동에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냈다.

이후 강윤국, 유만수, 조문기가 거사에 직접 나서기로 했고, 다른 동지들은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윽고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가 열리는 7월 24일, 세 사람은 연단 밑에 다이너마이트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연설 도중 터뜨려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것이 바로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명이 폭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고, "아시아 민족 해방"이란 명목으로 조선인들에게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라고 선동하려던 박춘금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총독부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고 비밀결사 단체였던 건국동맹을 포착한 뒤 조동호 등 여러 인사들을 체포했다. 또한 사건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수배령을 내렸고, 박춘금은 직접 사재를 털어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강윤국 등은 수사를 피해 몸을 숨겼다가 한달도 안되어 8.15 광복을 맞이해 자유의 몸이 되었고, 박춘금은 일본으로 도피했다.
강윤국은 이후 평범하게 살아갔으며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그 후 2009년 10월 3일 오전 8시 30분에 서울 보훈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10월 5일 서울 보훈병원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4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