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만수
1. 안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유만수
유만수는 1923년 10월 24일 경기도 안성군(현 안성시) 금광면 개산리에서 부친 유원목(柳遠穆)과 모친 함양 박씨 박수진(朴守鎭)의 딸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성읍내 안성공립소학교와 서울 한영중학교를 졸업한 뒤 한성상업학교 야간부에 다니며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공장에 나갔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생활하던 그는 1943년 5월 일본 가와사키시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근무중인 한국인 노무자들이 궐기하여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농성시위에 참가해 식당 파업을 주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일본강관주식회사가 이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억압하자, 유만수는 기회를 틈타 회사를 탈출한 뒤 일본 내의 노무자 단체를 전전하면서 일본으로 강제 징용되어 온 동포의 구출활동을 한 후 귀국하였다. 그 후 1945년 3월, 그는 서울 관수동의 자신의 자택에서 강윤국, 조문기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고관과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대한애국청년당의 의장을 맡아 친일파 인사들을 처단할 방안을 모색하던 중 박춘금이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의당 주최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대회는 조선인들을 선동해 일본군을 위해 싸울 총알받이로 내몰려는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이 날 행사에는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장성, 친일반민족행위자 세력들이 다수 참석했으며, 일제의 괴뢰정권인 왕징웨이 정권의 대표 정원간(丁元幹)·정유간(鄭維幹) 및 만주국의 대표 강춘전(康春田)[3] 등도 연사로 참여했다.
이 소식을 접한 대한애국청년당은 부민관에 폭탄 테러를 가하기로 결의했다. 유만수는 다이너마이트를 빼내오기 위해 수색 변전소 작업장에 인부로 잠입해 발파작업을 맡으면서 다이너마이트를 조금씩 빼돌려 10여 일 후 뇌관 2개를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강윤국은 일본 헌병으로부터 권총 한 정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1945년 7월 24일 저녁 7시, 유만수, 조문기, 강윤국은 대의당 주최 <아시아분격대회>가 열리는 부민관 연단 밑에 다이너마이트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연설 도중 터뜨려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것이 바로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명이 폭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고, "아시아 민족 해방"이란 명목으로 조선인들에게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라고 선동하려던 박춘금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총독부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고 비밀결사 단체였던 건국동맹을 포착한 뒤 조동호 등 여러 인사들을 체포했다. 또한 사건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수배령을 내렸고, 박춘금은 직접 사재를 털어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유만수 등은 수사를 피해 몸을 숨겼다가 한달도 안되어 8.15 광복을 맞이해 자유의 몸이 되었고, 박춘금은 일본으로 도피했다.
광복 후, 유만수는 동지들과 함께 서울의 남대문 상동교회에 <애국청년당>의 간판을 내어 걸고 독립운동 선배인 조동필 목사를 당주로 모셨으며,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석하고 남한 단독정부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 조문기와 함께 인민청년군을 결성했다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무장유격대로 낙인찍혀 몇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후 평소 익힌 철공기술로 서울 신당동에 작은 철공소를 운영하며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려 했지만, 6.25 전쟁 시기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인민군 토지개혁지도위원'이 되어 임지인 남원에 내려갔으나 곧 국군의 반격으로 서울로 돌아온 일이 빌미를 잡히는 바람에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1959년엔 조문기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누명임이 밝혀지면서 겨우 풀려났다.
출옥 후 서울을 떠나 부산 연지동에 단칸셋방을 얻어 둥지를 틀고 초량동 동양고무 기술이사로 특채된 그는 서훈신청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당연한 일을 했다. 당시는 누구나 나 같은 애국하는 맘을 가지고 있었다"라며 거부하다가 1975년 4월 25일 경기도 안양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만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평택시 출신 독립운동가, 유만수
유만수는 1895년 6월 8일 경기도 진위현 현내면 주막동(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진위군 북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면사무소 및 경찰관 주재소 앞 등에서 4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태형 90도를 맞았다. 이후 진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6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유만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