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기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조문기는 1926년 5월 19일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에서 아버지 조병길(趙柄吉)과 어머니 연안 이씨 이조영(李肇榮)[4] 의 딸 사이에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매송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용인군 내사면(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에 있는 외가댁에서 양지공립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양지공립보통학교는 정미칠적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宋鍾憲)이 적극 지원하던 학교인데, 인근의 추계리에 송병준이 양지현감 재직 시절에 지은 별장이 있었고 송종헌이 이 별장에 들를 때면 양지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장기를 들고 환영행사를 자주했었다. 조문기는 어느 날 송종헌을 환영하던 일장기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가 을사늑약으로 초야에 묻혀 생활하던 외할아버지 이조영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이때 우리나라의 국기는 양지향교 문에 있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향교에 가 태극기를 확인한 후 학교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교사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후 항일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한다.
1942년 일본 가와사키시 소재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5] 에 연수생으로 취직했다가 여기에서 유만수와 강윤국을 처음 만났다. 1943년 5월 한국인 노무자들의 민족차별 반대시위에 참여하여 이를 주도하였다. 이때문에 수배되어 귀국하였으며 국내에서 대일 투쟁을 하기 위하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24일 경성부 부민관에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라는 친일어용대회가 열리며 이를 주최하는 자가 친일 민족반역자인 박춘금이라는 소식을듣고, 부민관에서의 거사를 결정하였고, 당일 유만수, 강윤국 등 동지들과 함께 대회장에 폭탄 두 개를 투척하여 그곳을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조동필(趙東泌)·유태현(柳台鉉) 등과 함께 경기도 수원군 매송면 노림리의 야학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은신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인민청년군(대한청년군)을 조직하여 1948년 6월 2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인민청년군 사건'을 일으켰다가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출옥 후에는 10년간 연극배우로서 유랑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9년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 암살 및 정부전복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허리를 다 펴지도 못하는 심각한 후유증을 평생 겪어야 했는데,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유만수, 강윤국 등과 함께 독립유공자 신청을 줄곧 거부했다. 이후 생활고로 부인까지 몸져눕게 되자 결국 딸과 사위가 몰래 유공자 등록신청을 했고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1983년부터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 홍보위원이 되어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고, 1985년부터는 8년간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으며, 1999년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친일청산에 앞장서 일하다가 2008년 2월 5일 지병으로 타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