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학파

 


명의 왕수인이 양명학파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 중종서경덕 학파와 왕실 종친에 의해 소개 되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이 자신의 저서인 '전습록변'에서 양명학에 대해 체계적이고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을 시작으로 류성룡과 같은 성리학자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게 되어서 주요한 학파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당대의 대학자였던 소재 노수신 같은 경우[1] 양명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여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유학자들의 날선 공격과 정여립의 난에 얽혀 후학을 양성할 틈도 없이 정계와 학계에서 사라졌고, 양명학을 이단시 하는 영남학파의 견제로 인해서 그의 이름은 이황이나 조헌 같은 학자만큼 알려지진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장유, 최명길 등이 양명학에 대해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2] 그리고 18세기 초, 소론 측에 있던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노론에 의해 축출되고 강화도로 낙향하여 양명학을 가르치면서 강화학파를 창시하였다.[3][4] 이들은 주로 소론이였으며, 양명학뿐 아니라 역사학, 국어학, 서학, 문학 등도 연구하였고 실학자들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강화학파로는 이광사와 그의 제자 이광두, 이건창 등이 있다. 박은식[5]정인보 또한 양명학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청나라고증학이 발전하며 본고장에서 쇠퇴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쇠퇴하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양명학은 성리학이나 실학보다 인지도가 낮게 되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한국양명학회'에서 양명학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1] 당시엔 퇴계 이황과 어깨를 견주던 대학자였다. 주일론을 지지했으나 주리론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고승들과의 교류도 있었다.[2] 이전 서술에는 '정확히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에 의해 관념론적 이기론이 발달하면서'라고 서술하면서 장유와 최명길의 연구가 그 반작용이었던 것처럼 서술하였으나 그렇게 볼 수 없다. 애초에 장유와 최명길은 모두 당시로서는 서인 정권의 핵심에 해당하던 인사들로 반정공신에 포함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애초에 '관념론적 이기론'의 발달은 '서인 정권'의 차원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당파를 막론하고 성리학자 전반의 경향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장 '육왕심학'을 강도높게 비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서인'이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심지어 이것이 '정권' 차원에서 자행되었냐면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애초에 각 당파에서 학문 연구의 중심이 되었던 '산림'이 정권에 어느 정도나 참여했는지 부터가 실증이 안되는데? 개중에 정치 일선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송시열 조차도 '정권'의 수장이었느냐고 하면 글쎄(...)[3] 관련 저서로 「존언(存言)」이 있다.[4] 강화학파는 19세기에 강화도를 중심으로 포교를 시작하던 기독교 종파인 성공회와 조우하게 된다. 성공회 강화읍성당에 당시 양명학과 성공회가 포용적으로 교류했던 흔적들이 남아있다.[5] 이승만에 이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양명학의 양지(良知)라는 개념을 기독교의 '성령'과 비교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결국 박은식의 양지론은 양명학의 기반 하에서 기독교의 '성령'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을 가진 신으로의 개념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계의 개혁을 촉구하면서 '대동교'를 창립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