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신
1. 개요
조선시대 전기의 대학자이자 좌, 우, 영의정을 역임한 정치가
생년 : 1515년 (중종 10)
몰년 : 1590년 (선조 23)
본관 : 광주
세거지 : 상주
본관은 전라도 광주이다. 자는 과회이고, 호는 소재, 이재, 암실, 여봉노인등 여러가지가 있다. 아버지는 활인서에서 별제를 지냈던 노흥이다. 고향은 경상도 상주이며[1] 활인서에서 벼슬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서 한성부에서 나고 자란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양친 모두 상은 상주에서 치른다.
2. 생애
탄수 이연경의 문인으로 그 밑에서 수학했으며 나중에는 스승의 딸과 결혼하여 이연경을 장인으로 모시게 된다 [2]
1534년에 사마시에 3등으로 합격하는데 당시 나이가 20대였다. 그 뒤로 학문을 수행 하다 1543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을 때가 29세였다. 성균관에 전적으로 보임되었고 홍문관을 거쳐 시강원에 사서가 되었는데 이때 서연에서 이황과 함께 세자에게 강론하면서 서로의 도학 이론을 인정하고 친우가 되었다. 그 뒤로는 당대의 대학자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이자 친구가 된다. 그 뒤로는 사가독서를 하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왕의 행장을 지었다.
그리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이 정권을 잡고 많은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는데 이언적, 유관, 성세창등을 조정의 대관으로 등용하고 사림의 젊은 인재들을 요직에 발탁한다. 그때 노수신도 사간원에 정언에 임명 되는데 그때 정황과 함께 영의정이였던 이기#s-6.1.1를 탄핵하여 파직시킨다. 중종 말엽부터 조정에는 윤임과 윤원형이 대윤과 소윤으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에 임백령, 공조판서에 허자등이 소윤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뒤에 노수신은 인사기구였던 이조에 좌랑 정랑등을 역임하면서 사림의 인물을 많이 등용했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한지 겨우 8개월만에 죽고 나이가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러자 문정왕후의 오빠였던 윤원형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면서 윤원형에 소윤을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이때 영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 10여명을 죽이고 이조정랑 노수신과 홍문관 수찬 유희춘등 일백여명을 유배시켰다.
노수신은 처음에 충주로 유배되었는데 1547년 정언각의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송인수, 이약빙 등이 죽임을 당하고 이언적 등이 유배당할때 죄가 가중되어 전라도 순천을 거처 진도로 다시 유배되었다. 그리고 자그만치 19년을 이곳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진도에서 귀양 살이 하던 노수신은 소윤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진도 수령이 소윤일파에게 잘보이고자 노수신을 박해하였다. 죄인이 쌀밥을 먹을수 없다고 기장만을 사다주어 기장을 주식으로 먹고 살게 된다. 이처럼 고통 스러운 귀양 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학문을 힘을 써서 여러권의 경서를 저술하고 어려운 유교의 경전을 주석하였다.
그뒤 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죽고 명종이 20년만에 친정하게 되자 비로소 을사사화때 해를 당한 사람들이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며 이때 노수신도 충청도 괴산으로 양이 되었다.
그 뒤 선조가 즉위하고 선조를 영의정에 올리는데 힘썼던 영의정 이준경의 추천으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직제학으로 승진하고 이때 조광조를 추증하도록 청하였는데 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후 부제학[3] 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고향인 상주로 돌아가서 부모님을 봉양하기를 청하니 선조가 그의 청을 받아 특별히 청주목사에 임명하였다가 그 뒤로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4]
그 뒤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상을 치르고 선조는 3년상을 기다렸다 그를 대사간에 임명했다가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는 극력 사양하면서 고향에 돌아가 병든 어머니를 모시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선조는 그 어머니를 한양에 모시도록 해서 그를 어머니의 문제로는 사임을 못하게 하였다.
그 뒤로 6조의 요직이던 이조의 참판을 거쳐서 판서를 지내게 된다.
마침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가 등극한 사실을 반포하는 사신단이 왔는데 그가 관반사로 나가서 사신을 맞이하였으며 대제학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1573년 선조 6년에 승지로 발탁되었다가 그 해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경연에서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때 사정을 써서 사람들을 발탁했다고 김성일에 탄핵을 당하였다. 마침 노수신도 병에 걸려 출사를 하지 못하여 여러차례 사직을 원하는 상소를 올리니 선조가 노수신을 해임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575년에 선조는 다시 노수신을 불러들인다. 이 해에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노수신은 선조에게 건의해 당파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심의겸과 김효원 두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좌천시켜 조정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진정 시켰다. 1578년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그가 병으로 사임하니 중추부 판사[5] 에 임명 되었다. 1581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어머니를 상주로 반장하고 67세의 고령의 나이에 여묘살이를 하다 병을 얻었다. 1583년에 상기를 마치고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노수신은 사임을 원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70세가 되던 해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조가 궤장을 하사하고 다시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1588년에 이르러서 영의정 노수신이 12번이나 상소하여 사임하니 그제서야 중추부 판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정여립의 난이 터져 옥사가 크게 일어났는데 노수신이 정여립을 천거하였음으로 중추부 판사에서 파직되었는데 노수신은 이 일에 연좌되었다고 할수 있었지만 선조는 명예직에서 파직 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으며 노수신도 따로 해명을 하지는 않았다. 이때 선조는 노수신이 사람을 잘못보았다고 성토 하였으나 임진왜란에 이르러 바다에서 왜적을 격파한 이순신과 육지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을 천거한 사람이 노수신이라고 노수신을 인재를 알아보는 이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6]
중추부 판사에서 파직된지 몇달 만인 1590년 4월 7일에 지병으로 죽으니 향년 76세였다.
3. 학문
15세가 되기 전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영재였으며 , 당대 성리학을 대성한 학자였다. 문장가를 추천해 달라는 선조의 질문에 천거받기도 하였으며 허균은 문장가로서 노수신을 천년안에 비교되는 인물이 없다고 평하였다. 5언절구를 잘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성리학 이론으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19년의 긴 유배기간 동안에도 유학자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었으며 이황, 기대승, 조헌 등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후대에 유학탈레반 소리를 듣던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다른 학문에도 성취가 깊었다.[7] 조선 최초로 양명학을 심도있게 연구한 학자이기도 하고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도도 전반적으로 높았다.
당대에 성리학자로는 이황과 함께 학문을 이끄는 대 스승으로 추존받았다.당시 석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기대승, 그리고 율곡 이이의 학풍은 주자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해 그 규범을 그대로 지켰으므로 주자학의 발전에는 기여한바가 없다는 박한 평가를 받은 반면 자신만의 새로운 이론을 확립한 이황 그리고 양명학을 수용하여 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노수신은 성리학을 한단계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업적인 성리학의 새로운 이론을 확립시킨 이황과 종종 비교 되고는 한다.
그의 이론은 그가 젊었을때와 유배를 다녀오고 난 뒤에 변화가 있었는데 그가 젊어서 옥당에 있을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론하면서는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주장하고 논술하여 퇴계 이황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유배 당시 오랫동안 고통을 겪으면서[8] 수행한바 자신의 기본 입장을 뒤집어서 해석을 달리 하게 된다. 그런 학문적 성취를 기반으로 인심도심변, 집중설 을 저술하였고 진백의 숙흥야매잠을 주해하였으며 대학장구 동몽수지 등을 주석한다. 특히 숙흥야매장의 주해는 그 해석이 정밀하고 분명하여 사림에 널리 전승되어서 유배기간 동안 오히려 노수신은 유학자로서 더 유명해졌다..
그는 유배가 풀리자 전국의 유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인심과 도심에 대한 격론을 벌였다.이때 기대승과도 견해를 나누는데 기대승은 노수신과는 학문의 관점에서 정 반대에 서서 그와 논쟁하고 노수신을 설득하려고 하는데 [9] 그러한 논쟁 이후 기대승이 직제학으로 있을때는 오히려 그의 학문적 성취를 인정하고 노수신을 선조에게 추천한다.
4. 성품
생존 당시에는 사림의 거두이자 대 학자로 그의 학문적 성취는 학풍을 떠나 모든 유학자에게 존경 받았으며 가는 곳마다 인망을 얻어서 반상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이유는 그의 원만한 성품에 있었는데 그는 신분과 지위를 떠나서 사람이라면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원만한 성품은 학풍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다른 학자들의 성취를 깍아내리지 않고 학문과 사상을 대함에 존중하는 입장을 택했으며 심지어 성리학에서 적대시 하는 당대의 불교의 고승들과도 친분관계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공격을 받는 일은 있었어도 당쟁이나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고 당파와 신분을 떠나 존경을 받았다. 이조의 정랑이라는 자리는 사람을 추천하는 자리이며 요직중의 요직이다. 그도 학파가 있었지만 사람을 추천하는 일에서는 학파를 떠나서 공정하게 추천하려고 하였으며 탕평을 추진한 조선최초의 인물이였을 것이다.
선조의 지극한 노수신 사랑도 따지고 보면 그런 그의 인망을 이용하여 조정을 장악 하는데 있었다고 추측된다.
그가 19년간 머물렀던 진도에는 그를 추존하는 서원이 있으며. [10] 이후 6조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던 이조의 정랑과 참판 판서라는 요직에 오래 근무했었지만 자신이 서있단 당파의 이득을 취하기 보단 선조가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가리고 신하들을 제어하기 위해 갈라놓았던 붕당을 대립을 중재하여 이들을 화합케 하는 탕평을 추진하였으며 조정을 안정시키는데 노력하였다 [11]
선조가 살아생전 유성룡보다 더 가까이 두고자 했던 인물로는 노수신이 거의 유일하며 선조의 언행에 영향을 미치는 명신이였다. 만약 노수신이 더 생존했다면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삽질도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1] 우의정을 지냈던 노숭이 자리잡았던 경상도 상주.[2] 이연경은 이세좌의 손자로 중종 때에 조광조를 천거한 사람이다.[3] 명목상 홍문관의 수장의 직급은 대제학이지만 이 자리는 보통 고관이 겸직하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은 수장은 부제학이 맡게 된다[4] 고향이 경북상주인데 왠 충청도 목사에 관찰사냐 하겠지만 경북 상주는 충청도와 경북을 잇는 곳으로 충청도와 매우 가까우며 그영향으로 사투리도 오묘하다... 상주는 현재 포도가 유명한 작물이고 충청도의 영동도 포도로 유명한데 이 두 도시는 거의 붙어있으며 기후가 똑같다[5] 명예직[6] 사실 정여립의 난도 여러가지 의문이 많다 정여립이 반란을 목적으로 사람을 모으고 실제로 난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는 정여립의 행동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 부호가 붙어다닌다. 실제로 난을 일으킨게 아니라 선조가 사화를 일으키기 위한 구실로 정여립을 이용했을거라는 데에 중론이 모이고 있다.[7] 이런 그의 행보에 같은 사림파에게 공격을 받기도 한다.[8] 소윤의 신임을 얻고자 하는 고을 수령의 집요한 괴롭힘이 있었다[9] 설득하려고 책도 쓴다.[10] 조선전기까지 야만적인 약탈혼의 풍습이 남았있던 진도에 예를 가르쳐 풍습을 없애고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물론 그를 추존하는 사원은 그의 세거지 상주와 다른곳에도 있다[11] 그런 노력과는 별개로 그의 친동생이 그에게 천거를 받기위해 뇌물을 들고 찾아드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아 훗날 김성일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