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년 ~ 1898년)
조선 말기의 학자, 관료, 문장가. 강화학파의 거두.
1. 개요
2. 일생
2.1. 아웃사이더 명문가
2.2. 조부의 순국과 조선조 최연소 과거 급제
2.3. 대쪽같은 암행어사
3. 사상과 문학


1. 개요


아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이고, 당호(堂號)는 명미당(明美堂). 정종의 아들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후손이며, 본관은 당연히 전주 이씨. 할아버지인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이 개성 유수를 지낼 때 유수부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이 집안이 대대로 강화학파의 거두인 만큼 강화도에서 성장해 강화도에서 죽었다.
조선 최연소 과거 급제자의 기록[1]을 갖고 있는데, 1866년 강화도 별시에서 15세의 나이로 합격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바로 출사하지 못하고 3년간 발령 대기 상태였다. 18살에 비로소 승정원 주서(7품)로 출사하여 충청우도 / 경기도 암행어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1884년부터 연달아 부모상을 당해 6년 간 상을 치르고 이후 한성부소윤으로 복직, 함경도 안핵사를 지냈으나 1894년 갑오경장에 반발해 고향인 강화도 사기리로 낙향했고, 4년 후인 1898년 47세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明美堂集)》[2]과 《당의통략(黨議通略)》등이 있다. 당의통략은 조선 시대 당쟁의 발생 원인과 전개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평을 받으며, 조선 후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2. 일생



2.1. 아웃사이더 명문가


이건창의 9대조는 백헌 이경석의 형인 이경직이다. 당파를 따지자면 소론으로, 숙종 대에 이경직의 4대조 이광명이 아버지 이진위의 상을 당해 강화도 사기리에 장사지낸 뒤부터 사기리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대인 '진眞'자 돌림 항렬과 그의 '광匡'자 돌림 항렬은 이경석의 후손들과 이경직의 후손을 통틀어 각각 6명, 8명이 문명을 떨쳐 '육진팔광'으로 불렸는데, 이중엔 '''동국진체'''를 창시한 '''이광사'''가 포함되어있다. 이광사의 아들이 '''<연려실기술>'''의 이긍익이다.[3] 문제는 당시 집권 세력이 소론과 대립하던 노론이었다는 것(...)
물론 출사한 사람이 아주 없을 정도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으나, 전술한 '육진팔광' 중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광사의 생애만 들여다보아도 이 집안이 얼마나 풍파가 심한 집안이었는지 금방 답이 나온다. 이광사는 17세에 아버지 이진검이 노론 4대신을 탄핵했다가 역풍을 맞고 유배당했다가 죽었고, 제대로 출사도 하지 못한 채 떠돌다 51세에는 백부 이진유가 나주 괘서 사건에 휘말리는 통에 함경북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문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4]로 이배(58세)되었으며 73세에야 유배지에서 지난한 생을 겨우 마감했다.
이렇게 정치적 풍파에 심하게 시달리는 집안이었으니 어찌 보면 강화도에 정착해 낙향한 이광명의 선택은 집안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5] 이광명은 조선 후기 양명학을 공부한 강화학파의 시조 하곡 정제두의 손녀사위이기도 했는데, 이로부터 양명학을 배우게 되고, 강화도에 입도한 이후 이후 6대 250년을 강화학파 학맥을 잇게 된다. 그의 할아버지 이시원까지 내려오면 그 학문적 명망이 중앙 정계에도 제법 퍼졌는지 지방관이나 한직 외에 한성부윤, 홍문관 / 예문관 제학 등 중앙 관직에도 기용된다. [6] 강화학파 300년[7]의 마지막 세대가 바로 이건창인 셈이다.

2.2. 조부의 순국과 조선조 최연소 과거 급제


이건창은 다섯 살 때부터 문장을 지었다고 전해질 정도의 천재였다. 이 꼬마 천재의 스승 노릇을 해준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강화학파의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받았던 할아버지 이시원. 병인양요 당시 이시원은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강화 유수 이인기는 도망쳤고, 유수부 내의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어진을 비롯한 서책과 유물들이 약탈당했다. 이시원은 "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내 비록 지방의 향리[8]고 오갈 곳 없는 늙은이지만 나라의 녹을 먹었던 사람으로서 후세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지는 않겠는가."라며 유소[9]와 손자 이건창 앞으로 남기는 절명시를 남기고 두 살 아래 동생 이지원과 함께 비상을 마시고 자결했다. 당대의 유신으로 이름났던 학자가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강화도에서 그의 순국을 기리는 별시 문과가 행해졌다. 시험을 치르기 전부터 분위기가 거의 '흉흉'한 수준이었는데, 시중에는 이 시험에서 이건창이 급제하지 않으면 시험 자체가 무효라는 말이 나돌았다. 오죽하면 시험관에게 그의 친척 동생이 찾아와 대놓고 "이건창이 급제하지 못하면 이 시험은 무효이니 무조건 합격시켜야 한다"라고 내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 대원군도 '''이건창이 응시하면 무조건 합격시켜라'''라는 밀명까지 내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건창을 합격시키기 위한 과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10]
어떻게 보자면 이건창의 입장에서는 자기 앞으로 절명시를 남기신 할아버지를 기리는 시험이니 무조건 응시해야 했고, 또 낙방한다는 것 자체가 있어선 안 될 일이었을 것이다. 국가 입장에서도 이시원을 기리는 별시이니 이시원의 손자를 무조건 합격시켜야만 했다. 결국 단 6명만을 합격시킨 이 시험에서 이건창은 5등으로 합격한다. 1852년생인 그의 나이 만 14세 때의 일. 조선 왕조 최연소 과거 합격 기록이었다.

2.3. 대쪽같은 암행어사


15살 난 소년에게 관직을 내린 전례가 없는 탓으로 과거에 합격했음에도 그의 출사는 미뤄졌다. 과거 합격 3년 후인 18세 때 승정원 주서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23세 때는 동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고, 26세 때는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발령받는데, 이 때를 시작으로 유난히 지방관 감찰의 임무를 많이 맡는다. 충청우도 암행어사 당시 그가 중앙에 올린 보고서들이 따로 간행되었는데(<충청우도 암행어사 이건창 별단>), 여기 보고된 사건들은 지방 아전과 결탁해 토지 대장을 조작하고 토지세를 포탈한 사건, 지방 군영, 군진의 통합으로 인한 폐단에 대한 해결, 세미 / 군전의 과다 징수 문제, 벌목 금지 지역인 안면도 소나무 숲 훼손 문제 등이다. 충청 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적발해 아예 그를 파면하기도 했다. 이 암행 과정에서 무고한 선비를 장살했다는 이유로 1년 간 유배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세 때도 경기도 암행어사로 발령났고, 42세 때도 함경도 안핵사로 파견되어 함경도 관찰사를 파면시켰다. 고종은 이후 지방관을 새로 발령해 내려보내며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갈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건창 = 암행어사였던 모양. 공덕비도 여러 군데 남아있다고 한다.
서울시 정무부시장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한성부 소윤을 지낼 때는 조청 수호 통상 조약에 따라 서울로 진출한 청나라 상인들이 서울 시가지의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는 것을 보고 이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나중에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서울에 대한 청의 간섭이 심해질 것이라 보고 이에 대한 규제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청의 압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청나라 상인들에게 부동산을 팔아넘긴 사람이 적발되면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처벌했다고 한다.

3. 사상과 문학


언뜻 생각하기에 이건창이 보수 쇄국주의자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가 쇄국주의자였다고 생각하기에는 뜨악한 면들이 있다.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 사상계에서 대대로 가업으로 양명학을 공부한 만큼 생각처럼 폐쇄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 우선 양명학자로서 왕수인의 '치양지설'을 설명하는 그의 태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성대영(成大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 이래 마음을 떠나서 도를 말한 자가 없고, 이래 도를 떠나서 경을 말한 자가 없다"고 하여 유학은 진실로 심학(心學)임을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도(道)와 심의 일치를 주장했고, 자획·음운의 고증을 기본으로 하는 청대의 고증학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홍승헌(洪承憲)과 의리의 출처를 논하면서 우리 몸이 의리를 결정하는 것이며, 우리 마음이 의리를 밝히는 것이라 하여 양지론(良知論)의 요체로서 의리를 설명했다. 또 성(誠)은 실리(實理)이고, 실리의 소재는 곧 실사(實事)가 말미암은 바가 되므로, 실리가 내심에 없다면 실사가 성립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그는 양명학파의 전통대로 실심(實心)·실리를 강조하고 허명(虛名)을 배격했다.[11]
이와 같이 그는 양명학에 입각해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개화에도 다소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철저한 척양 척왜주의자'였다고 보기에는 다소 난감한 것이, 그와 교유한 인물들 중에는 추금자 강위, 유대치, 박규수 등의 개화파들도 있다. 다만 그는 외세의 압력에 의해 떠밀리듯 문호를 여는 것에 대해 반발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건창이 한성소윤으로 일할 당시 이홍장의 개화 요구에 대해 "스스로 지키는 것 없이 그 자를 믿기만 한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건창과 더불어 구한 말의 두 천재로 불렸던 김택영은 이건창을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마지막 문장가로 꼽았다.[12] 그가 문학에 뜻을 두거나 전념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주의에 입각해 자신이 지방관 혹은 지방 감찰로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일들을 제법 시로 남겼다.

不知喫打苦。但道喫錢甘。汝輩亦人耳。肌膚何以堪。

一鞭一箠間。常恐傷而死。縱我失之寬。我心本如此。

피맺히는 고통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

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상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관대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본디 이와 같다.

-〈녹수작 (錄囚作)〉

이건창은 국권침탈 이전에 죽었지만, 그의 절친인 김택영과, 이건창의 친동생 이건승 등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김택영은 장쑤성 난통에 정착하여 상해임시정부 수립 때에도 중국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려 애썼지만, 후원자가 죽고 앞이 보이지 않자 1927년 자진했고, 강화도에서 계명의숙을 세워 교육계몽운동을 하던 이건승은 동지들과 함께 만주에 학교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다가 1924년 타계했다. 이건창의 자손들도 그들을 따른 인물들이 있었다.
이건창의 강화학파는 이회영, 이상룡등과도 연관이 있어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니, 그의 천재성이 헛되이 쓰여지지는 않은 듯하다.

[1] 후술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정치적 안배였다.[2] 사후 그의 글을 모아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이다.[3] 이후 국학 연구는 이 집안의 가풍이 된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은 할아버지 이시원이 소론의 입장에서 서술한 당쟁사를 편집, 정리한 것이다.[4] 장작거리만 많은 섬이라고 신지도였단다.[5] 강화에 정착한 것은 이광명 본인보다는 그의 어머니의 의사였다고 한다.[6] 이시원이 개성 유수를 지낼 때 이건창이 태어났다. 조선에 유수부는 개성, 수원, 광주, 강화 네 곳밖에 없었다. 서울을 방위하는 요충지에 유수부를 설치한 만큼 유수 자리를 받은 사람은 상당히 신임받거나 정치적 비중이 높은 사람일 수 밖에 없었다.[7] 정제두가 양명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1670년경, 이건창의 사망이 1898년. 다만 정제두가 강화도에 들어온 것은 환갑 무렵인 1709년이었다.[8] 라고는 하나 겸손한 표현과 다르게 이시원은 상당히 고위직까지 역임했던 인물이다. 철종이 여러 번 직접 지목하여 불러올렸던 인물이기도 했다.[9] 유신(儒臣)이 죽음을 맞아 마지막으로 임금께 올리는 상소.[10] 이 탓에 그의 조선조 최연소 과거 합격 기록에 대한 평가가 다소 애매해졌다. 다만 본디 전국구 천재로 유명한 인물이기는 했다. 이런 여론 자체가 겨우 열다섯 난 그가 과거에 합격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고 여겨졌다는 뜻이니 그의 천재성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이기는 할 듯.[11]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12] 김택영은 고려 시대부터 당대까지의 문장가 9명의 문장 95편을 추려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라는 책으로 엮었고, 그 중 이건창을 마지막으로 두었다. 참고로 그 9명은 김부식, 이제현, 장유, 이식, 김창협, 박지원, 홍석주, 김매순, 이건창이다. 이후 김택영의 제자 왕성순이 스승인 김택영까지 포함시킨 《여한십가문초》로 바꾸었으며 여기에 량치차오가 서문 을 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