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

 


'''조선 태종의 왕자'''
'''경녕군
敬寧君'''

'''군호'''
경녕군(敬寧君)
'''시호'''
제간(齊簡)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본관'''
전주(全州)
'''이름'''
비(示+非)[1]
''''''
정숙(正淑)
'''부왕'''
조선 태종
'''생모'''
효빈 김씨(孝嬪 金氏)
'''부인'''
청원부부인 청풍 김씨(淸風 金氏)
군부인 개성부 마씨(開城府 馬氏)
군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
'''자녀'''
10남 2녀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생몰
기간
'''
'''음력'''
1395년 12월 13일 ~ 1458년 9월 9일
'''양력'''
1396년 1월 23일 ~ 1458년 10월 15일
1. 생애
2. 가족관계
3.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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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조선 전기의 왕족. 태종 이방원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자이다. 천성이 어질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나 효령대군충녕대군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까지 5대에 걸쳐 국정에 충성하며 협조하였다. 1417년(태종17)에 정 2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며, 세종 원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영락제로부터 황금, 백금, 말, 비단, 양 등의 많은 답례품을 받아왔으며, 1425년(세종7)에 종 1품 숭록대부에, 1430년(세종 12)에 정 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는 충주로 이거하여 여생을 보내다, 어머니 효빈 김씨가 죽고 4년 만인 1458년에 생을 마쳤다. 묘역은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으며 묘역 앞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 명덕사가 있고 전주이씨 경녕군파의 파시조이다.

2. 가족관계


정부인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 청풍(淸風) 김씨(金氏)[2]
자녀
적장남
'''고양군(高陽君) 이질(李秩)'''
적차남
'''은천군(銀川君) 이찬(李穳)''' 1421 ~ 1481
적3남
'''오성군(梧城君) 이치(李𥠽)'''
적4남
'''영선도정(永善都正) 이리(李利)'''
1계부인
군부인(郡夫人) 개성부(開城府) 마씨(馬氏)
자녀
적5남
'''모양군(牟陽君) 이직(李稙)'''[3] 1438 ~ 1511
2계부인
군부인(郡夫人) 전주(全州) 최씨(崔氏)
자녀
적6남
'''단산도정(丹山都正) 이수(李穗)''' 1444 ~ ?
측실
성명 미상
자녀
서장남
'''월성수(月城守) 이거(李秬)'''
서차남
'''가흥수(嘉興守) 이적(李積)'''
서3남
'''복성군(福城君) 이영(李潁)''' 1435 ~ 1487
서4남
'''가림군(嘉林君) 이추(李秋)''' 1441 ~ ?
서장녀
이름
성명 미상
남편
참봉(參奉) 정석균(鄭石均)
서차녀
이름
성명 미상
남편
현감(縣監) 송계흥(宋繼興)

3. 창작물에서


각종 격변이 일어난 조선 전기의 왕족인데다 그 어머니인 효빈 김씨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온 인물이라서 이름 자체는 종종 언급되지만, 중대한 사건을 주도했다거나 하는 등 큼직한 활약을 한 적은 없어서 비중은 거의 없는 편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역사적 인물이니까 일단 출연은 시킨다는 수준인데, 어린 아기 때의 모습으로 나오며 대사는 없다. 이방원의 잠저 시절, 어머니 효빈 김씨와 함께 본처의 노여움을 사 몇번이고 죽을 위기를 겪는다.[4] 그 후 김씨와 민씨의 사이가 풀어지고 인정받게 될 무렵 민씨의 친정에 맡겨져 이복형제들과 교육을 받게 된다.[5]태종이 처남 민무휼과 민무회를 제거할 때 어느 정도 성장한 모습으로 잠시 등장하는데, 이 때도 대사가 없으며 어딘가로 걸어가는 장면이 전부. 이 작품에서 특정인이 어디론가 걸어가는 장면은 주로 그 사람이 죽은 뒤 내레이션으로 평가를 하는 장면 또는 새로 등장하는 인물을 보여주는 장면 정도이기 때문에 엑스트라로 보아도 좋다. 경녕군 본인은 물론이고 효빈 김씨도 한양 천도 이후 사실상 극에서 퇴장했기 때문에 '하도 오래 된 이야기지만 사실 이런 인물이 있었습니다'라고 보여주는 정도인데, 이미 민씨 형제가 국문을 받고 있었으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을 상황에서 실록의 기록을 따르기 위해 넣은 것 같지만 작품성 면에서는 갑자기 극의 흐름이 잠시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나마 비중 있게 나온 사례는 시대극인 대왕 세종 정도가 있다. 여기에선 효빈 김씨가 경녕군이 서장자라는 위치와 자신이 태종의 총애를 받는다는 점[6]을 이용, 세자인 양녕대군을 꺾고 자신의 아들 경녕군을 세자 자리로 올리려 한다. 경녕군 본인도 야심이 있었고 세자가 온갖 사고를 저질러 일말의 희망이 보였으나 충녕대군이 급부상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한다. 다만 서출이란 태생과 충녕대군의 그릇에 미치지 못한 것일 뿐, 정치적 안목 등 능력은 어느 정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북방에 중앙군을 보내려는 세자가 여진족과 일부러 충돌하여 기어이 전쟁을 벌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마침 충녕대군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북방에 다녀왔던 경녕군은 아예 충녕대군의 역모가 의심된다고 태종에게 일부러 모함하여 경성에 조사관을 파견하게 만든다. 처음에 이를 오해한 윤회와 심온 등이 경녕군을 찾아가 항의하려다가 '역모가 의심된다고 할 정도의 핑계가 아니면 조사관을 파견할 이유가 없지요.'라는 해명을 듣고 감탄할 정도.
세종조에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때로는 세종을 지원하다가도 그의 정적인 조말생과 접촉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며 정치적 야망 자체는 남아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태종 때는 아들을 세자로 만들려고 절치부심하던 어머니 효빈이 이제 더이상 옥좌에 뜻을 두지 말라고 설득[7]한 이후 66회에서 조말생이 세종 앞에 잡혀 들어올 때 '허수아비 노릇 더 이상 하기 싫다'라면서 선을 그어 버린다. 이후 효령대군의 조언을 듣고 왕실 종친으로써의 모습에 충실하기로 한다. 담당 배우는 윤영준.


[1] 태종의 아들들은 모두 보일 시(示) 부수를 돌림 이름으로 쓰는 외자 이름이기에 경녕군의 이름도 부수가 의(衣)의 변형인 衤가 아니라 礻다. 그러나 이 글씨는 유니코드 KC02989로 글꼴이 안 만들어져 입력이 안 된다.[2] 참의(參議) 증찬성(贈贊成) 김관(金灌)의 딸[3]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의 4대조[4] 민씨의 노여움이 누그러지기 전까진 못 해도 3번은 죽을 뻔했다. 처음엔 낙태를 강요했고, 김씨의 저항으로 낙태가 무산되자 여종을 시켜 만삭인 김씨의 식사에 독을 탔다. 그럼에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자 감기에 걸린 경녕군의 열을 식혀주겠다며(...) 추운 겨울 바깥에 버려두듯 방치하도록 했다. 마지막의 경우 타이밍 좋게 이방원이 나타나 목숨을 건졌지만, 이 일은 훗날 민씨의 남동생들을 숙청할 구실 중 하나가 된다.[5] 이때 김씨는 물론 김씨를 모시던 하인인 금녀 또한 달갑지않게 받아들이는데, 그도 그럴게 아이에 대한 모정도 모정이지만, 보내는 곳이 하필 민씨의 친정인지라 아이를 적진에 홀로 보내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 김씨 역시 이 점을 인지하고 있어 민씨가 보낸 여종에게서 아이를 민씨의 친정으로 보낸다는 말을 듣고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할지 알고 보내냐며 극렬히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6] 활 솜씨가 뛰어나 태종이 사가 시절부터 아끼던 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의 의도는 충녕대군에게 거문고를 준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에 뜻을 두지 말고 활이나 쏘면서 세월을 보내라는 것.[7] 집안이 풍비박산나버린 원경왕후의 불우한 말년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