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빈 김씨

 


'''조선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 | 孝嬪 金氏
'''
'''빈호'''
효빈(孝嬪)
'''출생'''
미상
'''사망'''
1454년(단종 2년) 2월 26일
(향년 알 수 없음)
'''부군'''
태종
'''자녀'''
1남
(장남) 경녕군
'''묘소'''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 141
1. 개요
2. 생애
2.1. 실록
2.2. 야사의 기록
2.3. 반론
2.4. 추측
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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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종후궁. 태종의 서장자가 되는 경녕군의 어머니다.

2. 생애



2.1. 실록


실록에 의하면 태종이 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와 부인인 원경왕후를 받들던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던 당시 나갔던 집안의 말이 홀로 돌아온 것을 보고 태종이 패한 것으로 오해한 원경왕후가 자신도 나가서 싸우다 죽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것을 말리던 이 중 하나가 그녀였으며, 태종 총서에서는 태종이 왕이 되기 전 송도에서 살았을 때 집에 흰 용이 나타난 걸 보고 이를 집안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 그녀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 태종 15년, 1415년 겨울, 태종 이방원이 처가인 민씨 일가를 처리하던 과정 중에 정실 원경왕후 민씨의 지나친 투기를 비난하며 그녀의 출신과 경녕군의 탄생배경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의 친정에서 거느리던 노비로 태종의 아이, 즉 훗날의 경녕군을 임신한 지 3개월 후 궁을 나가는데, 이후 원경왕후는 궁 밖으로 있던 그녀를 학대하였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한겨울인 음력 12월에 만삭인 김씨가 출산이 임박해지자 이를 들은 원경왕후가 (태종의 생각으론) 마치 얼어죽기를 바라듯 자신이 그 소식을 알려준 계집종을 시켜 문 바깥에 방치하였는데, 김씨의 오빠인 화상이란 이가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만든 천막에서 그녀가 출산을 하자, 다시 계집종들을 시켜 화상이 마련해준 침구들을 빼앗고 숭교리[1]의 벌개라 하는 궁노의 집 앞 토담집으로 그녀를 옮겼다. 그러나 한상좌란 이가 동정심에 마의를 가져다 줘서 김씨는 7일을 버틸 수 있었고, 그제서야 원경왕후가 김씨의 아비와 화상으로 하여금 소에 실어 교하[2]의 집으로 보낸 것이 그 이야기의 끝이다.[3]
이후 단종 2년에 사망하여 궁에서 쌀과 관 등을 보내어 부조를 한 것이 기록의 전부이다. 다만 고종기의 승정원 일기에서 효순궁주라 불리던 그녀를 효빈으로 올렸다는 기록이 더 있다.

2.2. 야사의 기록


실록과는 달리 야사에 의하면, 사실은 원경왕후가 아니라 양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정에서 부리던 여종이었다고 한다. 강씨가 입궁하면서 김씨도 같이 입궁해 궁녀가 되었는데, 미모가 뛰어나서 신덕왕후가 태조의 앞에 내놓기를 꺼렸다고 한다. 다만 태종이 왕자 시절에 김씨와 하룻밤을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은 사실. 다만 원경왕후는 시어머니인 신덕왕후를 싫어해서인지 김씨에게 잘했다(?)고 한다.
즉 태종은 아내를 음해하기 위해 김씨의 출신에서부터 얼어 죽이려 했다는 사실 등을 모두 지어낸 셈이다. 이 때가 민무구, 민무질 4형제 등 외척 세력을 한참 때려잡던 때다 보니, 적절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 다만 김씨를 해하려 했던 책임을 원경왕후보다는 민씨 형제에게 전가했는데, 원경왕후가 했다고 해버리면 폐비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고 세자인 양녕대군의 입지도 위험해지기 때문이다[4].

2.3. 반론


그런데 진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 실록에 따르면 즉위 초부터 태종이 다른 여인에게 승은을 내린것을 알고 원경왕후가 그 여인을 데려다 꾸중했다는 이유로 태종이 중궁전의 궁인들을 전부 교체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녀의 질투심을 못 견디고 태종이 침실을 옮겼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뤄볼 때, 또한 태종 실록이 세종 13년에 편찬되었던 것을 통해, 효자였다던 아들인 세종이 왕으로 있던 시기에 만든 실록에 이러한 기록들이 실린 것을 통해 짐작해본다면 원경왕후의 행동이 더 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4. 추측


그렇다면 이런 정도의 사건을 왜 13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끄집어 냈냐고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서야 알았거나 위에서 말했듯 민씨 가문 제거를 위해서 였을 수도 있지만, 경녕군이 태어난 시기, 실록에 언급된 임오년 중 가장 경녕군과 일치하는 1402년를 통해 추측해보면 사건이 발생했던 때가 태종과 아버지 태조 이성계 간의 대립이 있었던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고 있어 태종이 그 사건에 집중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설령 알게 되었다고 해도 태종으로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 조사의의 난만 해도 초유의 사건인데, 아들과 아버지 간의 대립이 겨우 마무리가 된 상황에서 왕실에 또다른 갈등이 생길 수 있는, 또한 왕실 이미지를 망가뜨릴 수 있는 사건을 들추는 게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고, 좀 상황이 안정된 시기인 몇 년 뒤에야 이를 끄집어 내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3. 대중매체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김혜리가 연기했다.[5] 실록의 기록에 따라 원경왕후의 몸종 출신으로, 온갖 갈굼과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아 빈의 지위에 오른다. 이방원을 모실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는 선한 성격으로, 대놓고 대비 자리를 꿈꾸는 선빈 등을 제지하며 내명부의 평화를 지키려 애쓴다. 잠저 시절부터 그녀를 경계하며 매우 갈구던 원경왕후도 끝내 효빈의 성품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지만,[6] 어느 순간부터 출연이 없더니 아예 극에서 퇴장해버렸다[7].
대왕 세종에서는 김성령이 연기했다. 용의 눈물과는 다르게 상당한 야망을 가지고 아들을 세자로 올리려 하며, 세종이 즉위한 직후까지도 아들의 대권을 노리지만 결국은 세종에게 감화된다.

[1] 개경의 한 고을.[2] 현재의 파주시 관할 운정신도시, 교하동 일대[3] 태종 15년 12월 15일 무인 1번째기사,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2월 17일 경진 1번째기사, 태종 15년 12월 23일 병술 3번째기사를 종합한 이야기이다.[4] 태종의 입장에서는 세자를 비롯해 아들을 넷이나 낳은 왕비를 내칠 필요가 없었다. 또 내친다면 새로운 외척이 등장할 테고 그 쪽을 또 때려잡아야 한다. 이것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친정인 심씨 집안을 숙청하면서도 소헌왕후 폐출을 윤허하지 않은 점에서도 드러난다.[5] 김혜리는 이후 후속작인 태조 왕건에서 강비를 연기했다.[6] 이 무렵 태종이 처가를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린지라 왕후 자리에 집착하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허탈감과 후회를 느껴 심정에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7]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장면은 후궁 김씨와 하룻밤을 보낸 태종이 김씨가 헛된 야망을 품지 않도록 타이르기 위해 '효빈이나 신빈 등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느냐'라고 묻는 대목. 이에 김씨는 둘 다 외롭게 지내고 있는 줄 안다고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