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동음이의어)
1. 태양계의 행성
2.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
경주 분지에 위치한 고대 도시이자 신라 991년간의 수도로, 한자로 '쇠 금(金)'자에 '재 성(城)' 자를 써서 금성(金城)이라 표기했다. '서라벌'이라고도 불렸다.
금성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서라벌(쇠벌)을 그대로 한자로 옮겼다는 설이 정설이다. 신라의 국성인 경주 김씨와의 관련설도 있으나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9년조를 보면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금성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의 정궁인 경주 월성 유래설도 있으나, 월성은 2세기 초 파사 이사금 때 건립되었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금성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월성이 생긴 것이므로 훨씬 나중의 일이 된다.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9년 춘삼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날의 금성 지역은 경주시 문서를 참조.
2.1. 초기 신라의 궁궐
문헌기록에 따르면 신라 초창기에 제1대 임금 혁거세 거서간부터 제5대 파사 이사금대까지 신라왕이 거처했으며, 이후에도 한동안 사용되었다.
현재 기록상에서 찿아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금성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 수 없으나 이 기록에서는 월성이 금성 동남쪽에 위치하였다고 나온다. 즉 역으로 해석하자면 금성은 월성 서북쪽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경주 월성의 위치는 현재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이를 통해 금성의 위치를 역추적할 수 있다.기원후 101년(파사왕22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하였다.'''
혁거세 21년(기원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다. 시조 이래로 역대 임금이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월성으로 옮겨갔다고 되어있다. 동문이나 서문이 무너지고 하는 기록상 동서남북문이 존재했던 듯 하다. 101년 파사이사금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금성은 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논하는 정사당(政事堂)을 138년 2월에 세우는 등 계속 사용되다가, 중기 이후 완전히 월성에 정궁 역할을 넘겨주고 기록에서 사라진다.
금성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만 나오고 곧 월성으로 옮겨버리는데, 초기 기록으로 갈수록 고고학과 합치하지 않고 모호한 부분이 많아지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나 형태에 대해서는 막연한 추측만이 가능한 상황이다. 일단 1세기경에 그런 성이 있었다면 작은 토성이나 단순한 주거시설로만 구성된 공간일 것이라 현대에 찾아낼 가능성도 거의 없는 상태라고 봐야 한다.
금성의 위치는 여러 있는데, 우선 경주 월성과 동일시하는 의견이 있다. 금성이 월성과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동일한 공간에서 개축하고 이에 따른 명칭 변경만 있었다는 것이다.
또는 월성 서쪽 인근인 계림과 첨성대 인근이 금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월성을 중심으로 보면 첨성대와 계림 일대는 월성 북쪽 혹은 서북쪽에 있다고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동남쪽에는 월성이 있다. 그리고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삼국유사)"라는 기록을 근거로 금성이 시림(=계림 숲) 동쪽에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의 경주 구시가지 지역에 해당하는 경주읍성 위치에 금성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금성의 동남부에 경주 월성을 쌓았다고 하므로 이를 토대로 월성 서북쪽 어딘가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대표적으로 지금의 경주읍성 및 그 인근 지역들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즉, 지금의 경주읍성이 있는 자리에 금성이 세워졌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다만 경주읍성이 있는 자리에서는 정작 통일신라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물들이 확인되지 않는 것이 약점이다. 읍성이 거기에 자리잡은 것도 신라 멸망 후 고려왕조부터였다.
분황사 북쪽 알천 유역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석탈해의 장지에 관한 기사와 현재 전탈해왕릉의 위치, 그리고 조선시대 사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등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즉 초기 금성의 유구는 탈해왕릉과 분황사 사이에 있었지만 알천의 범람으로 인멸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혹은 북천 북쪽의 황성동 지역에 초기 신라의 금성이 있었다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으며[1] 이종욱 교수는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에 금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비정하기도 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경주 서남쪽 창림사 자리가 신라 초기의 궁(금성)이라고 쓰고 있다. 이곳도 나정이나 오릉과도 가까운 곳이다. 이곳도 조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2018년까지 창림사로 보이는 사찰의 흔적은 찾았으나 왕궁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출토되지 않고 있다.
https://m.blog.naver.com/jw1405/129152264 이 싸이트에서는 금성의 위치를 추정하는 글을 자세히 적어놓았다.
3. 전라남도 나주시의 옛 이름(錦城)
후삼국 시대 후백제의 영토였으나, 당시 후고구려의 장수였던 왕건에게 점령된 이후 나주로 개명됐다. 나주의 '나(羅)'가 '비단 라' 자여서, 뜻이 같은 '비단 금(錦)' 자와 통한다.
이후 나주목, 나주군으로 계속 유지되어 왔다가, 나주군의 중심부(나주읍)가 농업도시로 발전하면서 1981년 7월 1일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금성시'로 승격하여 '금성'이란 지명이 일시적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당시의 시군명 명명 관행에 따르면 군의 중심 읍이 시로 승격되면 군(읍)의 이름을 시의 이름으로 하고 기존 군의 이름은 원래 이름에서 변형하거나 역사적 연원이 있는 이름을 따와 개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2] , 나주의 경우 이와는 반대로 '나주시+금성군'이 아닌 '금성시+나주군'이 됐다는 것. 이후 1986년 1월 1일 금성시를 '나주시'로 다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강원도의 옛 행정구역(金城)
강원도에 있던 행정구역이었다. 한자는 1의 경주의 옛 이름 금성과 같다(金城).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김화군에 합쳐져 폐군되었다. 합병 당시 김화군 동, 남, 북면과 금성군 동, 남, 북면을 구별하기 위해 김화군 출신 면에는 근(近)을, 금성군 출신 면에는 원(遠)을 붙였고 이게 오늘날까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금성군에도 서면이 있었는데, 군내면과 함께 금성면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김화군 서면은 그 명칭을 유지하였다.
6.25 전쟁 때 금성 전투가 있었다. 휴전 후 옛 금성 지역의 대부분은 북한이 가졌지만, 극히 일부(철원군 원남면, 원동면, 임남면 각 일부)는 남한이 가져갔다. 김화군이 남한 철원군에 편입되면서 이들 지역은 지형상 한탄강 유역이 아닌 북한강 유역이라 화천군으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철원에 속하고 있다. 실제로 나머지 철원군 지역은 제3보병사단관할인데 금성지역 3개면은 화천의 제7보병사단이 관할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서는 원래 김화군지역을 남한이 가져가면서 금성지역으로 군청을 옮겨놓았다. 철원군이 경기도로 편입될 경우 금성지역 3개면은 남북통일때까지 강원도 화천군에 일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5. 후한의 행정구역
오늘날 간쑤성에 해당되는 곳으로 한수와 마등의 근거지이다.
낙양에서 10시 방향으로 2,800리 정도 이격되어 있다.
6. '''LG전자'''의 전신 금성사
1995년 3월 1일 금성사에서 LG전자로 이름을 바꿨다. 참고로 금성(행성)의 영문 명칭은 위에서 보듯 Venus인데 금성사의 영문 명칭은 그대로 직역한 GoldStar였다.[3] 약칭은 GS인데 현 GS그룹의 GS가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LG전자로 가서 보자.
7. 출판사 이름
금성출판사 항목 참조.
[1] 황보은숙, 2009, 금성의 위치비정[2] 가령 수원군→수원시+화성군, 강릉군→강릉시+명주군, 청주군→청주시+청원군, 천안군→천안시+천원군, 전주군→전주시+완주군, 순천군→순천시+승주군, 경주군→경주시+월성군, 진주군→진주시+진양군 등.[3] 중간의 S가 대문자다. 즉 금(Gold) 성(Star)으로 분리한 것. 1982년 이전에는 아예 GOLD STAR로 중간을 띄어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