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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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일본의 문화유산. 710년부터 784년까지 나라 시대의 수도로 기능했던 나라시의 주요 유적들을 모아 등재했다. 5곳의 사찰, 1곳의 신사, 1곳의 궁전(터), 1곳의 숲으로 구성되어 총 8곳의 유적이 등재되어 있다.
2. 등재 현황
-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헤이안 시대의 후지와라 씨족의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 엄청나게 많은 석등과 등롱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수가 3천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세쓰분 기간 중에 큰 규모의 마츠리가 열리는데 2월과 8월에 해당한다.
- 가스가산 원시림(春日山原始林)
가스가타이샤가 있는 가스가산은 영산(靈山)으로 여겨져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냥과 벌목이 금지되었다.
- 간고지(元興寺)
- 고후쿠지(興福寺)
헤이안 시대에 전성기를 누린 막강한 씨족 가문인 후지와라의 시조가 되는 인물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정실인 카가미노오키미(鏡王女)가 669년에 남편의 쾌유를 빌며 현재 교토시 야마시나구 일대에 세운 사찰인 야마시나데라(山階寺)가 기원. 이후 710년, 겐메이 덴노가 수도를 지금의 나라시인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하여 나라 시대가 열리면서 옮겨진 후 그때부터 현재의 이름인 고후쿠지로 불리고 있다. 후지와라 가문의 시조와 연관된 사찰이기 때문에 조정의 강력한 보호를 받았다.
특히 후지와라 가문이 가장 막강했던 때인 헤이안 시대에는 가스가타이샤의 실권까지 가지고 있어 사실상 야마토국(大和國)을 장악하고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에도 그 영향력은 여전해서 막부는 고후쿠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야마토국에는 슈고 다이묘를 둘 수 없었다. 다만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고 메이지 시대에서는 신불분리령으로 가스가타이샤가 분리되어 나가는 등 피해를 꽤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재건해 현재는 법상종의 대본산으로 존속하고 있다.
특히 후지와라 가문이 가장 막강했던 때인 헤이안 시대에는 가스가타이샤의 실권까지 가지고 있어 사실상 야마토국(大和國)을 장악하고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에도 그 영향력은 여전해서 막부는 고후쿠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야마토국에는 슈고 다이묘를 둘 수 없었다. 다만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고 메이지 시대에서는 신불분리령으로 가스가타이샤가 분리되어 나가는 등 피해를 꽤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재건해 현재는 법상종의 대본산으로 존속하고 있다.
일본에 율종을 전파한 당나라의 승려 감진(鑒眞)이 759년, 쇼무 덴노의 지원을 받아 세운 사찰. 이 사찰의 금당은 나라 시대에 세워진 건물들 중 현재까지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또한 강당은 궁전의 접견소를 옮겨와 개축한 것으로 다소 변형이 있긴 했으나 이 역시 나라 시대의 궁전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 야쿠시지(薬師寺)
680년, 덴무 덴노가 황후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당시 수도였던 후지와라쿄(藤原京)에 세운 사찰. 다만 본인은 사찰 건립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사찰의 건설은 다음 천황이 이어받게 되는데 그 천황이 황후였던 지토 덴노이고 사찰의 최종적인 완성은 그 다음 천황인 몬무 덴노 대에서 이뤄진다. 718년에는 새로 천도한 수도인 헤이조쿄로 옮겨가게 되는데 후지와라쿄에도 그대로 사찰이 남아있어 같은 이름의 사찰이 공존하기도 했다. 973년의 화재와 1528년의 화재로 인해 동탑을 제외한 다른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그 이후에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 헤이조 궁(平城宮)
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헤이조쿄는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적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번영기에는 10만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784년, 간무 덴노가 수도를 헤이안쿄로 옮기며 헤이안 시대가 열리면서 궁전은 버려졌고 크고 작은 재난을 겪은 끝에 사라져 농지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