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센이치
1. 개요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감독.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구단 부회장을 역임했다.
특유의 지고는 못 사는 불같은 성격으로 '투장', '열혈남' 등의 별명으로 불리웠다.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후로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장을 자처하여 온갖 에피소드를 쏟아냈으며, 끝끝내 꿈도 희망도 없어보이던 땅에서 언더독#s-2 신화를 일구어낸 인간승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의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은사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한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안티 쿄진의 화신이 되다
오카야마현립 구라시키 상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고3때 주고쿠 지역예선 결승전에서 패하는 등 명성에 걸맞지 않게 고시엔 출전 경력은 한번도 없다. 고교 졸업 후 메이지대학에 진학, 1학년 때부터 에이스로 활약하며 호세이대학의 타부치 코이치, 야마모토 코지, 토미타 마사루[2] 트리오 등과 함께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로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번번이 호세이대학의 벽에 가로막혀 대학 시절에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1968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하 요미우리)가 만약 친구인 타부치 코이치의 지명(선제교섭권 획득)에 실패할 경우 자신을 1순위로 지명하기로 약속했으나, 요미우리는 약속을 깨고 호시노가 아닌 1950년생인 시마노 오사무(島野修)라는 고교생 투수를 지명한다.
당시 요미우리는 강력한 투수진을 갖춘 팀이었다. 그래서 요미우리 감독 카와카미 테츠하루는 타선 보강을 위해 1순위로 호시노의 친구 타부치 코이치를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한신 타이거스가 먼저 지명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고,[3] 이에 "즉시 전력감보다는 소질이 있는 유망주를 뽑자" 고 하여 시마노를 지명한 것이었다. 사실 시마노는 호시노와는 달리 코시엔에 2번이나 진출했을 뿐더러 코시엔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친 만큼, 요미우리가 그를 지명한 데는 갑자기 뭔 이상한 생각이 든 게 아닌 나름 이유가 있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호시노와의 약속을 깨버린 건 엄연한 사실. 호시노는 그 소식을 듣고 '''"호시(星)랑 시마(島)를 틀린 거 아냐?!"''' 하며 엄청나게 분노했고, 이 때부터 쿄진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안 그래도 쿄진의 전통의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 팬이었던 그였기 때문에[4] 그 분노는 더욱 컸을 것이다. 이후 철저한 '안티 쿄진' 행보를 하게 된다.
여담으로 호시노 대신 요미우리에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시마노는 선수 생활 동안 '''단 1승만''' 거둔 후 요미우리에서 버림받았고, 1978년에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은퇴했다.[5]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나는데, 1981년 구단 마스코트 '브레이비' 의 슈트 액터 역할을 맡아 브레이비 가면을 쓰고 나름 유명 마스코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분은 팀이 오릭스에 매각되면서 팀 마스코트가 네피로 바뛴 뒤에도 마스코트 슈트 액터 역할을 계속하며 1998년 리그 최종전까지 꾸준히 마스코트로 활약하며 비공식 연속 경기 출장기록을 세우는 쾌거를 달성한다. [6] 그래도 마스코트 연기자로써의 인기와 명성은 굉장했기 때문에, 지금도 다른 구단의 마스코트 연기자들까지 "시마노 씨의 네피처럼 되고 싶다" 라고 할 정도였다.
시마노는 그 후에도 구단 직원으로 일했으나 2004년 병으로 퇴직. 그 뒤 2010년 뇌출혈로 향년 60세의 나이로 작고했다.[7]
2.2. 선수로 콩라인
1974년 선발 투수와 중무리 투수를 오가며 맹활약, 그해 사와무라상, 센트럴리그 최초의 세이브왕까지 따내면서[8]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0년 연속 센트럴리그 우승 겸 일본시리즈 진출을 저지'''하고 1954년 이후 주니치의 사상 2번째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공교롭게도 오 사다하루와 함께 거인군의 ON타선을 이뤘던 나가시마 시게오는 그 해를 끝으로 은퇴하고[9] 감독인 카와카미 테츠하루도 그 해를 끝으로 사임하면서 거인의 V9시대는 성적이나 인적 구성으로나 완전히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는 롯데 오리온즈(現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2승 4패로 패배.'''[10][11][12] 하지만 주니치 빠들은 그때까지 경쟁자가 없었던 교진군의 V10을 저지한 이 1974년을 엄청 좋아한다.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1974년 다이요 훼일즈와의 시즌 마지막 맞대결에서 이 양반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뒤 모자를 거칠게 벗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지금도 1년에 최소 한 번씩 나고야 지역 민방에서 볼 수 있다. 팀이 이겨서 그런지, 교진군을 발라서 그런지...
그 후로도 주니치의 간판 투수로 활약했으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전성기 대두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부활,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갑툭튀 등등으로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2년에는 시즌 막판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와의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이기면 주니치 드래곤즈가 리그 우승을 하고, 지면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리그 우승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주니치의 에이스 코마츠 타츠오가 완봉승으로 활약하여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 에게 2승 4패로 패했고''',[13][14][15] 호시노는 그 해를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통산 성적은 '''146승 121패 34세이브, 평균자책점 3.60, 1225탈삼진.'''
불과 14시즌(1969~1982)밖에 뛰지 못했고, 시즌 당 평균 승수도 10.6승에 불과하였으나 거인전에서만 무려 '''35승'''을 챙겼다.[16] 신인시절에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부상 이후 변화구를 주로 던지며 기교파 투수로 변모했고, 구원투수와 선발투수를 겸업하며 마구잡이식으로 등판하면서 거둔 성적이라서 드러난 성적에 비해 훨씬 더 팀 공헌도는 높았다고 평가된다.
2.3. 감독으로 콩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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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6년 시즌 종료 후, 39세의 젊은 나이로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이로서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감독이 되었다.(2번째는 동년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한 아리토 미치요.)
1988년 시즌엔 7월 9일 이후 무려 '''50승 15패 3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역전우승'''을 차지하였으나''' 또다시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무너졌다.'''[17] 1991년에 일신상의 사유[18] 로 감독직을 사임했고 감독 자리는 선배이자 주니치의 또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다카기 모리미치에게 넘긴다.
4년간 해설자 생활을 하다가 1996년 다시 주니치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 시기에 선동렬, 이종범, 이상훈을 영입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 되기도 했다. 1999년 또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나, '''일본시리즈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1승 4패로 무너져 또다시 준우승을 차지'''[19][20] 하였다. 그 후 2001년 성적 부진과 수뇌부와의 불화로 감독직을 야마다 히사시[21] 에게 내주고 이듬해인 2002년에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맡게 된다. 호시노 센이치가 없는 주니치는 2007년에 기어코 53년간의 한을 풀고 일본제일을 이룩하게 된다.
2.4. 한신으로 가서도 콩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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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당시 1987년 이래로 '''66566'''2[22] '''4466566664456656666'''이라는 비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리그 밑바닥을 찍 던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맡았다. 참고로 저 밑의 6666은 한신 타이거즈 팀 최다 연속 꼴찌기록(4년 연속).
2002년 시즌이 끝나고 히로시마의 가네모토 도모아키, 텍사스 레인저스를 떠난 이라부 히데키 등을 FA로 영입하고, 이마오카 마코토, 세키모토 겐타로, 후지모토 아츠시 등을 등용하며, 그 해 B클래스(리그 4~6위권) 탈출에 실패했지만 센트럴리그 4위를 기록하며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노무라 카츠야의 유산 덕택이라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결국 2003년에는 한신 타이거즈에 18년 만에 우승을 안기며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으나 4년 전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시절에 맞붙었던 팀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23][24] 이게 진짜 아까웠던 게 다이에에게 후쿠오카 돔에서의 1~2차전을 내준 후, 코시엔에서 내리 3연승을 하며 리버스 스윕을 할 뻔했으나 이후 후쿠오카 돔에서 또다시 6~7차전을 연달아 내주며 역관광당하고 말았다(...). [25] 호시노는 그 해를 끝으로 건강상의 이유로 인해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게 된다.
이 해 한신이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며 18년만의 우승 가능성이 비치기 시작하자 미디어들이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한신과 호시노 감독을 따라 다녔고, 팬들이 1승 1패에 일희일비하는 낙차가 매우 컸다. 특히 리그 우승 매직넘버가 켜진 이후로는 팬들과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미디어들의 조급증이 극에 달해서 매일매일의 승패에 따라 '''간사이지역 전체의 분위기'''가 '''거의 조울증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꽤 여유있게 우승을 차지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전체가 우승을 확정짓기까지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철권으로 소문났고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를 혐오하는[26] 호시노가 고혈압을 견디지 못해서 경기 도중에 자리를 떠서 응급조치를 받을 정도였고 우승이 결정된 후에 이어진 우승감독 인터뷰에서 아나운서가 소감을 물었을 때 첫마디가 "아~ 신도캇타(힘들었네)[27] "일 정도였다. 이러한 점이 일본시리즈 패배와 시즌 후 호시노의 사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2003년, 18년만의 우승으로 이쪽 동네가 아주 폭발하게 된다.. 호시노가 나오는 광고가 전국구로 홍수를 이룰 정도니깐.. 하지만 결과는 극적인 콩라인이고.. 오카다에게 감독 자리를 물려준 이후인 2005년에 또 다시 한신은 센트럴리그 우승을 하여 일본시리즈에 올라가지만.. '''그 결과는 매우 끔찍했다(...)''' 그 뒤에도 2014년 와다 유타카의 지휘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리그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도쿄돔에서 4연승으로 박살내고 일본시리즈에 올라왔건만.. 1승 후 4연패에 4차전 오승환의 끝내기 홈런 허용에 니시오카 츠요시가 5차전에서 대형사고를 침으로써 어이없게 우승컵은 안드로메다로...
2.5. 한신 감독 사퇴 이후
한신 타이거즈의 시니어디렉터(SD)라는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애매모호한 직함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중의 행보를 살펴보면 답이 없던 한신 타이거즈를 다시 일으켜세워 전국구 인기팀으로 탈바꿈시킨 전임 감독 경력을 활용해 카리스마형 경영자의 롤모델 기믹으로 여기저기 강연회 돌아다니면서 강연료 챙기는게 주업이었던 것 같다. 다만 2009년 FA 시장에서 조지마 겐지를 설득해 한신이 조지마를 영입하는 데 깨알같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2.6. 베이징 올림픽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악연 최정점'''[29]
한신 타이거스의 시니어 디렉터라는 애매한 직책에서 강연회 알바를 뛰는 외에도 간간이 NHK에서 야구해설가 를 맡다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지만...
대한민국과의 본선 경기에서 이와세 히토키가 불질을 하는 바람에 3대 5로 패해 삐꺽대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쿠바와의 경기를 피하려고 미국에게 지기 위해 일부러 승부치기[30] 까지 끌고 가서 끝끝내 져주기 게임을 실행하여 4강에서 대한민국과 재대결을 펼쳤지만....
처음엔 앞서갔다가 베이징에서 내내 부진했던 이승엽의 역전 투런 홈런이 터지고 뒤이어 고영민의 쐐기 안타에, G.G.사토가 플라이 타구를 떨어뜨리는 삽질을 저지르는 바람에 2:6으로 밀리면서 '''3, 4위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미국과의 3, 4위전에서도 처음부터 앞서나가다가 후반부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4대 8로 '''패배'''하여 대한민국 네티즌들로부터 목메달이라는 불명예스런 칭호가 걸렸다.
일본시리즈 우승 경력이 없는 지도자답게 단기전에서의 직관력과 통찰력, 유연성있는 운영능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는데 그 면모가 베이징 올림픽에서 드러났다는 분석이 많다.[31] 아무튼 이 일로 안티가 엄청나게 생겼으며 오죽하면 일본위키에 그를 일본명인 星野仙一 로 검색하면 연관어로 '''호시노 센이치 재일(星野仙一 在日)'''이 나왔을 정도...[32]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자기 후원회인 코센카이(虎仙会)에서의 강연 내용이 시사주간지 FLASH를 통해 공개되었는데, 애꿎은 심판과 올림픽 조직위원회, 공인구, 한국의 징병제 탓을 했다...[33]
2.7. 폐허의 땅에서 우승기를 들어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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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의 실패 이후 두 번 다시 감독직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2011년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라쿠텐의 의도는 한신이 노무라-호시노 라인으로 개막장이던 팀을 기적적으로 부활시켜서 초인기 강팀으로 탈바꿈시켰으니 노무라 다음에 호시노를 감독으로 앉히면 혹시 한신 같은 강팀으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였던 것 같다. [34]
어쨌거나 라쿠텐 부임 첫 해에는 토호쿠 대지진 등의 여파로 정상적인 팀 운영이 힘들었던 상황이라[36] 5위를 기록하게 된다. 놀랍게도 2011년도 꼴찌 자리는 전년도 일본시리즈 우승 뒤에 미네소타 지역 한정 금지어의 MLB 진출과 김태균마저 도망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차지.
그러나 부임 2년차인 2012년 시즌 후반기부터 팀이 서서히 정비되기 시작하더니 승수를 쌓으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을 사정권에 놓기도 했다. 결국은 전반기의 성적이 영향을 미쳐서 4위에 머물러 가을야구를 실패했지만 라쿠텐 구단 창단 이후 두번째로 승률 5할로 이끌었다. 투수 출신 감독 최초의 1000승 달성은 덤.
2.7.1. 2013년
그 여세를 몰아서 초반부터 선전을 거듭하면서 상위권에서 놀더니 7월 이후에는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8월에 들어와서는 2위 그룹과 3~5게임 차이의 선두를 유지하면서 여유 있게 순항한 끝에 9월 26일 팀의 첫 정규리그우승을 개막 22연승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세운 다나카 마사히로을 위시해 이끌었다.그리고 이어진 2013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라쿠텐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다만 11월 2일 경기 선발인 다나카 마사히로를 9회까지 160개를 던지게 하고 그 다음날 9회말에 또 마무리를 시킨 것으로 해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너무 혹사시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다만 메이저리그와 메이저리그식의 투수운용이 주가 되어버린 한국에서 비판이 더 많았고 아직도 '''에이스라면 닥치고 완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은 일본에서는 생각보다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어차피 다나카 본인도 일본에서의 마지막 투구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경기는 미련 안 남게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던지겠다는 자세를 견지했고[37] 정작 일본에서는 국내에서의 마지막 등판에서 팀의 우승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미화되었다. 물론 투구수 과다와 관련된 기사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대"라면서 미국에서의 걱정스러운 반응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여기까지가 이전 버전의 서술인데, 확실히 이 상황을 깐 일본야구인이 있다. 바로 다르빗슈 유. SNS를 통해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며 대차게 까내렸다. 전적으로 선수생명을 걱정하는 멘트였다. 메이저리거 선수 신분으로 미국에서 깐 거니까 미국의 반응일지도..[38] 어쨌거나 11월 3일 7차전에서 3:0으로 승리하여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함에 따라 콩라인에서 탈출하였다. 드디어 '''감독생활 27년, 프로야구 입문 44년 만에 일본제일'''이라는 평생의 목표를 실현하였다. 게다가 시리즈 상대도 그렇게 타도를 외쳤던 교진. 참으로 인간승리가 아닐수 없다.[39]
아무튼 우승이 목표였던 주니치나 한신 시절과는 달리 '''효율적 경영을 목표로 하는''' 라쿠텐에서는 콩라인만 해 줘도 영구결번 시켜줄 판에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우승까지 시켜줬으니 영구결번에 레전드 감독 자리는 예약일 듯. 어쨌거나 생소한 상대를 만나는 단기전보다 같은 상대를 여러번 상대해야 하는 장기전에 특화된 감독임은 라쿠텐에서의 선전으로 증명된 듯 하다. 워낙 올림픽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생각만큼 막장 감독은 아니라는 증거.
그러나 2013 아시아 시리즈 2라운드에서 대만의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에게 4:1로 패하면서 아시아 시리즈 최초로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일본팀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덤으로 이로인해 이승엽과의 재맞대결 무산은 덤.[40]
2.7.2. 2014년
시즌 초반부터 요추추간판탈출증 이라는 일종의 허리디스크를 앓으면서 5월 26일자로 경기에서 빠지고 수술을 받고 요양을 가게 되었다. 당분간은 사토 요시노리 투수코치, 오쿠보 히로모토 2군 감독이 대신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다. 사실 디스크는 라쿠텐 감독을 맡기 시작했던 2011년도부터 앓고 있었다고 하며 지난해 요미우리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진통제를 먹고 출장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걷기도 힘든 상태라 올스타전 감독직을 맡는것은 불발됐다.
다나카 마사히로의 부상에 대해 인터뷰를 하였다. 그리고 이 인터뷰 내용에 대해 혹사 의혹으로 논란이 상당했다.
결국 라쿠텐은 최하위로 추락하는 치욕을 당했고, 호시노는 성적부진의 책임으로 시즌 종료후 사임을 발표하였다. 이후 10월 7일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은퇴식을 거행하며 라쿠텐에서 퇴단을 하게 되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전부터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었고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프로팀 감독을 맡기는 어렵게 되었다.
2.8. 라쿠텐 구단 GM이 되다
라쿠텐 감독 퇴임 이후 한신 시절처럼 시니어 어드바이저(SA)라는 명예직으로 활동하다가 2015년 9월 구단 부회장에 취임하며 사실상의 GM 역할을 맡게 되었다. 취임 후 신임 감독으로 나시다 마사타카 前 긴테츠, 닛폰햄 감독을 영입하고, 레다메스 리즈와 이마에 토시아키를 영입해 선발투수와 클린업 트리오의 한 축을 보강하는 데 성공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라쿠텐은 4월 10일까지 퍼시픽리그 선두를 마크했다. 하지만 역시나 빈약한 전력이 금방 뽀록나면서 성적이 하락해 6월 12일 기준으로 꼴찌를 순항하는 중이다..였으나 6월 20일 기준 오릭스, 세이부의 삽질로 5위로 다시 상승한 상태. [41]
한가지 희망적인 게 있다면 드래프트 1순위 지명에서 센다이 출신의 히라사와 타이가를 롯데와의 경합 끝에 놓치고 대신 지명한 나이지리아계 혼혈 오코에 루이가 기존의 일본 프로야구계의 상식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성장 스피드를 보여주고 있고[42] , 3순위로 뽑은 대졸 모기 에이고로가 일찌감치 유격수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2015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신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강력한 신인왕 후보가 되고 있는 등 신인 농사는 굉장히 잘 지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2016년 당장은 아니더라도 팀의 에이스인 노리모토만 큰 부상없이 건재하다면 진짜로 다음해, 다다음해에는 기대를 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2017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결정되었으며 헌액식은 나고야 돔에서 열린 올스타전 1차전에 이뤄졌다. 그 해 세이부에서 FA를 선언한 키시 타카유키를 잡는데 성공하면서 전력 강화에 성공했다. 오릭스와의 개막 3연전 스윕을 시작으로 올스타전까지 라쿠텐이 '''하루(7월 8일)을 제외하고 1위를 유지하면서''' 호시노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그러나 8월 중순 이후 팀이 무섭게 내리막길을 타면서 DTD를 시전. 다만 그렇게 DTD를 해도 4년만의 포스트시즌에 성공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2위 세이부를 업셋하고 시즌 94승의 우승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두는 등 팀을 재건하는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다.
2.9. 투장, 돌아오지 않는 별이 되다
이후로는 건강문제로 구단 운영에서 한 발짝 물러난 상태로 요양과 야구 보급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2018년 1월 4일에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췌장암. 향년 70세.
현지에서는 불과 2달전 본인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축하하는 모임[43] 까지만 해도 행사에도 출석해서 암 환자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건재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갑작스러운 부고에 상당히 충격이 큰 듯 하다. 그 때의 모습은 말기 암 투병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항암치료로 초췌해진 모습이나 복부에 복수가 차 있는 모습 등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갑작스러운 부고에 놀란 모습들.[44]
또한 사망 소식이 알려진 것은 이틀 가량 지난 1월 6일 새벽이었고, 이로 인하여 이 날 오하요 닛폰 등의 아침 뉴스에서야 사망 소식이 보도가 되었다.
구단 발표에 의하면 임종 직전까지도 '''"(며칠 뒤에 있을) 코칭스탭 회의에는 나갈 수나 있으려나"'''라면서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 앞으로의 팀 운영을 걱정했다고 한다. 평생 야구에 정열을 바친 고인 다운 마지막 한마디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라쿠텐 구단은 고인을 추모함과 동시에 그 동안의 공적을 기리며 라쿠텐 감독으로 달은 등번호 '''77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 팬 넘버로 영구결번시킨 10번을 뺀다면 사실상 라쿠텐의 첫 영구결번이며, 이로써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감독으로 영구결번이 제정된 인물이 되었다.
3. 역대 감독 성적
4. 기타
- 안티 거인의 선봉장 이미지가 강하지만, 나가시마 시게오나 오 사다하루 같은 거인 OB들과는 친하게 지냈다. 또한 학창 시절부터 선수 시절까지 한번도 같은 팀에서 뛴 적 없이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야마모토 코지, 다부치 고이치 등과도 대학과 프로 입단 동기로서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유명한 교우관계였다. 이러한 친목질은 호시노에게 "그라운드에서는 철저하게 승부하지만 사생활에서는 경기장에서의 일은 잊어버리고 라이벌과의 친교를 두둑히 하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상남자"의 이미지를 가져다 줬다. 친목질로 형성한 일본 프로야구 내의 인맥과 이미지는 호시노가 일본프로야구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법이었다.
- 한신의 감독으로 가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주니치의 얼굴이자 상징같은 존재였으나, 2001년 감독직 사퇴시에 구단과 모종의 알력이 있었던 듯 하다. 주니치 감독 자리를 물러날 때 호시노의 반응이 "내가 평생을 선수, OB, 감독으로서 이 팀을 위해 분골쇄신을 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대접하냐?"라는 서운한 반응을 보였다. 한신의 감독직 제안을 받았을 당시, 그래도 주니치의 상징이라는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으나 나가시마 시게오의 전화를 받고 수락을 결심했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당시 "센짱(호시노의 애칭), 뭘 고민하고 있나? 요새는 쿄진-한신 전을 전통의 일전[46] 이라고 부르는 게 옛말이 되고 있다네. 자이언츠를 보라고, 열심히 하고 있잖은가" 하며 한신을 라이벌로 부활시켜 야구계를 부흥케 하자며 독려했다. 한편 주니치 측에서도 호시노의 한신 감독 취임에 "팀의 간판으로서 그렇게 섭섭하게 대우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30년 가까이 정든 팀을 뿌리치고 그렇게 간단하게 다른 팀 감독자리에 앉을 수 있냐."라는 식의 반응이었고 고인이 된 지금까지도 주니치 구단이 호시노를 보는 시각은 상당히 냉담하다.[47]
- 선수들에게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고 가차없는 폭력까지 행사하는 카리스마형 감독이지만 막강한 기업가, 부자들이 많기로 소문난 자신의 후원회가 마련한 외제차 등을 수훈선수들에게 선물하는 등 채찍과 당근을 잘 배합하는 지도자였다. 참고로 말하면, 선수들을 때리더라도 그 다음날 그 선수의 출장기회를 보장해주고[48] , 유부남 선수는 가족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때리지 않는 등 폭력에도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철권 감독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따르는 선수들이 꽤 많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카무라 다케시 포수(전 KIA 타이거즈 코치). 코 모양이 변했다고 한다.
-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했던 듯 하다. 아무래도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이 섞여 있으면 선수들 사이에서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던 듯. 그래서 호시노가 감독으로 취임하면 기존의 고참급 선수들을 중심으로 방출 내지는 트레이드의 소용돌이가 한번 지나가고는 했다. 그리고 팀의 중심이 될 고참급 선수들은 오치아이 히로미츠나 가네모토 도모아키 등 자신이 지휘하지 않았던 타 팀에서 영입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가장 비근한 예로는 라쿠텐에 감독으로 취임하자 마자 최고참급이자 중심타자인 야마사키 타케시를 방출한 것. 야마사키는 주니치 감독시절의 제자로 개인적으로는 둘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하지는 않지만 호시노 본인이 팀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49] 그리고 팀을 이끌어갈 고참의 자리는 메이저리그에서 방출당한 마쓰이 가즈오와 이와무라 아키노리 등의 영입으로 채웠다.
- 한신 시절 주전 유격수였던 후지모토 아츠시가 유난히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벤치에서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뒤통수 맞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고. 한 카리스마 한다는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쫄게 만들 정도로 그 성질머리가 대단했다.[50] 하지만 2003년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 후지모토가 결승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팀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데 이 때 인터뷰에서 후지모토에게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감독에게 무슨 지시를 들었냐'라는 질문에 '부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와라! 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등 위에서 기술한대로 때로는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줄 줄도 아는 감독이기도 했다.
- 초창기 주니치 감독 시절 요미우리와 벤치 클리어링이 잦았는데 호시노 감독의 성향상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때 오 사다하루 감독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이면서 '너님 나랑 맞짱깔거삼?'하고 도발하기도 했고 오 사다하루 감독이 그 기세에 위축된 모습을 보여서 요미우리 팬들은 실망&요미우리 안티팬들은 호시노 킹왕짱 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실상은 요미우리의 용병 워렌 크로마티가 빈볼을 맞자 주니치 투수인 미야시타를 주먹으로 가격했고 벤치클리어링 과정에서 호시노가 오 사다하루에게 주먹을 내밀며 "주먹으로 가격하는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어필한 것 뿐이라고. 비록 안티 거인으로 유명한 호시노이지만 선배격인 인물들에게는 굉장히 예의바르다고 한다.[51] 그 덕에 일본야구계의 마당발로 통하기도 하고...
- 선동열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선동열이 주니치에 입단했을 때 일본 적응을 많이 도와주었다. 물론 이름값같은 걸로 봐주는 게 전혀 없는 호시노답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꾸지람도 아끼지 않긴 했지만. 은퇴 후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교류를 하였다. 선동열의 감독 스타일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52]
- 이상훈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선동열이 은퇴하고 이상훈을 중심으로 불펜진을 구상하던 무렵, 이상훈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라면 큰물에서 놀아야 된다' 라고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오오 상남자 오오.
- 이종범과는 상성이 서로 맞지 않았다. 이종범은 김응룡 감독 하에서 활동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능력을 맘껏 발휘하는 자율야구에 익숙하고 이를 선호했는데, 호시노는 감독의 지시대로 선수단이 움직이도록 하는 관리야구형 감독이었기에 마찰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종범은 호타준족+허슬 플레이라는 호시노 감독이 선호하는 야수의 특성을 갖고 있었기에 호시노 감독은 물리적 구타까지 동원해가며 어떻게든 써먹어보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으며, 의도와 달리 부상, 부진과 함께 이종범의 플레이를 위축시키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53][54]
- 재일 루머가 많은 일본의 유명인 중 한 명이다. 한국 언론에서 심심할 때마다 떡밥을 살포한 탓에 한국과의 인연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자아냈다. 그러나 일단 본인이 재일이라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고 가네모토 도모아키나 아라이 타카히로처럼 관보에 귀화 고시가 확인되지 않은 관계로 말 그대로 루머로만 취급되고 있다. 루머 자체는 재일 한국인들 사이에서 나온 루머지만 어이없게도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일본의 혐한초딩들은 호시노를 까기 위해 호시노가 '한국계라서 일부러 한국에 져준거다'라는 중상모략을 하기도 했다. 2019년 출간된 선동열의 자서전에서 재일교포라는 증언이 나왔는데, 책에서 선동열은 호시노가 재일교포이고 그러한 점에서 일본에서의 첫 시즌 부진했던 자신을 믿어주었고, 같은 한국계라 통하는 면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이것이 친한 측근들에게만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인지, 호시노의 용인술이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55]
- 폭력 감독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기부천사 성향이 있다고 한다. 매년 고향에 있는 복지시설들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고, 선수들에게 "인생의 1%는 자원봉사에 투자하라"고 조언할 정도라고 한다. 호시노의 이러한 성향은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낸 것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라쿠텐 감독 취임 첫 해 시즌 시작도 하기 전에 도호쿠 대지진으로 도호쿠 지역이 쑥대밭이 되자 2년 가까이 시즌을 치르는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선수들을 대동하고 피해지를 방문해서 이재민들을 위로, 격려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 위에 적혀있듯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평생의 적으로 여기고 요미우리 전에 나왔다 하면 말그대로 투지에 불타오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는데, 투수코치 겸임 중이었던 1981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연속 경기 득점 기록 저지[57] 에 나섰으나 팀 동료 유격수 우노 마사루의 실책으로 기록 저지에 실패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글러브를 홈 플레이트 근처에서 내팽개친 영상이 유명하다. 우노 마사루 항목 참조.[58] 당시 선수들은 우노가 호시노에게 죽도록 맞을까봐 다들 기겁한 상황에 벌벌 떨었는데 경기 끝나고 숙소에 오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호시노는 우노의 안면에 장렬한 죽방을 날려주었다고 한다.(...) 정작 그경기에서 결국 완투승을 달성했는데 결승타점은 우노 마사루의 투런포였다.
- 한신 감독 시절 이가와 케이라는 희대의 돌아이 겸 에이스가 "연승 중에는 머리를 깎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가 그만 12연승을 하는 바람에 3개월동안 머리를 안 깎아서 삼손 리도 울고갈 장발이 되었다.[59] 그래서 호시노가 머리 깎고 오라고 호통쳤더니 1cm, 팬이 머리 깎으라고 이발비를 줬을때 2cm를 깎고 왔다. 결국 빡친 호시노는 이가와를 죽도록 팼다.
5. 관련 문서
[A] A B C 시즌 도중 사임.[1] 원래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뇌졸중으로 감독수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본선에서는 나카하타 키요시 대행을 맡았다. 본선 때에도 나가시마 시게오를 명목 상의 감독으로 등록하고 수석코치였던 나카하타를 감독대행으로 하려고 했으나 IOC 측에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나카하타가 정식 감독으로 올림픽 본선에 출전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여전히 나카하타는 감독대행 취급이고 나가시마 시게오를 감독으로 간주하고 있다.[2] 난카이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즈,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1969년부터 1981년까지 13시즌을 뛴 선수.(은퇴는 1982년 시즌 종료 후 호시노와 같이 선언했다. 이 해엔 1군 경기에 한번도 못 나감.) 커리어는 호시노, 타부치, 야마모토보단 못하지만 은퇴 이후 해설가, 탤런트로 활약했고 이후 경비회사 탑 아카데미를 창업해 연매출 1억엔에 직원이 100명에 달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사업가가 되었다. 2015년 5월 28일 폐암으로 사망.[3] 이 당시엔 드래프트에서 중복 지명이 나왔을 시 경합으로 뽑는 제도가 없었다.(사실 드래프트가 처음으로 열린 해인 1965~66년에 있긴 했지만 그 후 폐지되었다. 후에 다시 부활) 그래서 지명 순서가 앞에 있는 구단이 원하는 선수를 뽑아버리면 그냥 망했어요(...)[4] 다만 한신엔 뭔 짓을 해도 가기가 힘들었다. 당시 호시노의 모교인 메이지대학과 한신 타이거스 간의 사이가 나빴기에 만약 한신이 호시노를 지명하면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로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 결국은 나중에 감독으로 입단했다.[5] 1976년에 한큐에 이적한 이후 3년 동안 단 한번도 1군 경기에 등판하지 못했다.[6] 하지만 그저 나쁜 운만으로 보기도 그런 것이, 이 1968년 드래프트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로 남았다. 호시노 센이치, 야마모토 코지(히로시마), 타부치 코이치(한신-세이부), 야마다 히사시(한큐), 아리토 미치요(롯데), 히가시오 오사무(라이온즈), 노무라 오사무(타이요), 오오하시 유타카(토에이)등등 다른 팀에 1순위로 지명받은 선수들은 대부분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했다. 또한 여러 팀을 떠돌아다니며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지는 못했어도 노무라 오사무의 경우는 사상 첫 '''12구단 상대 승리투수''', 친구 토미타 마사루는 사상 2번째 '''12구단 상대 홈런'''이란 타이틀을 얻었고, 오오하시 유타카는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뛰어난 수비로 퍼시픽리그 4연패, 일본시리즈 3연패에 공헌했다. 이뿐만 아니라 2~3위의 상위 지명에서도 카토 히데지, 오오시마 야스노리(이 2명은 명구회 회원), 미즈타니 노리히로, 미즈누마 시로 등 꽤 많은 선수들이 프로에서 활약하였으며, 하위 지명에서도 카도타 히로미츠, 나가사키 케이이치, 이나바 미츠오(단 이 3명은 지명거부를 했다가 몇년 뒤 재지명으로 데뷔), 후쿠모토 유타카, 시마타니 킨지, 후지와라 미츠루, 카네다 토메히로 등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단카이 세대라 불리우는 베이비붐 세대가 프로에 들어갈 나이가 된 것이 1968년 무렵이었기 때문에 우수한 선수자원이 풍부했던 것. 반면 가능성만을 믿고 고교생 투수 시마노를 지명한 요미우리는...ㅠ[7] 그 후 오릭스 버팔로즈는 시마노를 기리는 의미에서 마스코트 변경을 발표. 네피는(덤으로 같이 활약하던 리프시도) 마스코트로써 은퇴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받은게 버팔로 불과 버팔로 벨.[8] 다만 이 해 호시노가 거둔 세이브는 10개뿐이었다. 요즘처럼 1이닝만 던지고 세이브를 따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현대의 전문 마무리에 비해 현저히 적은 세이브 수.[9] 그리고 요미우리에서 중심타선을 보강하기 위해 1975년 시즌 종료 후 데려온 것이 하리모토 이사오.[10] 당시 롯데 오리온즈 감독은 공교롭게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이자 영구결번 No.34''' 가네다 마사이치였다. 참고로 가네다의 투수 통산 400승 겸 마지막 우승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이뤄낸 것이다.(1969년 10월 10일) '''거기다 그날 패전투수가 바로 다름아닌 호시노 센이치였다(...)''' [11] 또 이 해 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인 6차전이 다름아닌 드래곤즈의 홈구장이었던 나고야 구장에서 열렸다. 주니치에겐 이만한 굴욕도 없을 듯.(롯데는 현재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홈구장에서 결정지은 적이 없다.)[12] 게다가 호시노는 패배가 결정된 6차전에서 7회부터 구원등판했다가 연장 10회에서 '''3루 희생타 - 2루타'''를 연달아 얻어맞고 결승점을 내주면서 패전투수가 되는 바람에 주니치를 패배시킨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6차전 이전에도 1~2차전 2번 연속으로 구원등판해 1차전 승리투수, 2차전 패전투수가 되었던 상황이었다.[13] 공교롭게도 이때 세이부 감독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인 히로오카 타츠로였다. 참고로 히로오카는 1978년 야쿠르트의 첫 일본제일을 이룬 감독이기도 하다.[14] 이 해 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인 6차전도 나고야 구장에서 열렸다.. [15] 또 공교롭게도 당시 세이부의 주전엔 '''다름아닌 그의 대학 시절 라이벌이자 친구인''' 타부치 코이치가 있었다.[16] 한편 패전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31패도 거인전에서 쌓았는데, 보다시피 거인전 승률이 5할을 넘는다. 호시노가 데뷔했을 당시의 요미우리가 한창 V9를 찍고 있던 원탑 초강팀이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요미우리 킬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17] 참고로 이 때의 세이부 감독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 모리 마사아키였다. 덤으로 이 해 세이부는 10.19 때 긴테츠 버팔로즈가 1승 1무로 머물러 간신히 우승을 차지했다.[18] 본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아내의 백혈병 발병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호시노의 아내는 투병 끝에 1997년 1월경에 세상을 떠났다.[19] 참고로 이때 감독은.. 뭐 말이 더 필요한가? 역시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이자 영구결번 No. 1''' 왕정치. [20] 이 해 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인 5차전이.. 또 주니치의 홈구장인 나고야 돔에서 개최되었다(...) 거기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는 승리한 2차전, 다이에의 우승이 결정된 5차전을 제외한 나머지 1, 3, 4차전에서 전부 '''영봉패'''로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고, 5차전에선 1회말 1점을 먼저 얻으며 잘 나가나 싶더니 3회초 '''6실점'''이나 하면서 대역전 당했고 이후 3점을 더 얻으며 반격에 나섰으나 결국 패배했다(...) 여담으로 이 해 일본시리즈는 사상 최초로 돔구장에서만 시리즈 전 경기가 열린 시리즈였다.[21] 위에 나오듯이 한큐 브레이브스(現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던 투수로 프로 통산 284승을 기록, 언더핸드 투수 중에서는 NPB 통산 최다승 투수이다. 원래대로라면 한큐 브레이브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오릭스에서 감독직을 맡을 가능성이 컸지만, 오릭스가 한큐 색깔 지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이라... 어쨌든 호시노와의 인연으로 투수코치를 하고 있어서 감독 후보로는 물망에도 오르지 않았는데 본인도 갑작스럽게 감독을 맡은 듯. 즉 호시노의 사임에는 구단과의 알력이 작용했으며 이 때문에 감독 교체도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야마다는 성적부진으로 2003년 시즌 도중 해임당하고 말았다(...)[22] 1992년 당시 성적. 사실 이것도 그 해 세리그 우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우승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성적은 69승 1무 61패로 우승팀 치고는 그리 좋은 성적도 아니었고 1위와 최하위 주니치간의 게임차가 9.0게임밖에 나지 않았다.(당시 주니치 성적은 60승 70패) 1위 야쿠르트와 4위 히로시마와는 3.0경기차였고 히로시마조차도 66승64패의 성적으로 우승을 노릴 정도로 대 난전이었다. 이 해 한신 타이거스도 67승 2무 63패로 2위팀 치고는 승률이 높은 편도 아니었다. 그나마 그 2위도 '''요미우리'''하고 공동 2위였다.[23] 이때 감독도 오 사다하루. [24] 7차전 상대팀의 선발 투수는 와다 츠요시였고 주니치에 8안타를 맞았으나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팀을 일본제일로 이끌었다. 와다는 그 해 퍼시픽리그 신인왕에 만장일치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25] 즉, 2009년 한국시리즈처럼 전부 홈팀이 승리한 시리즈였다.[26] 불과 사망 한달 반 전에 본인의 명예의 전당 입성을 축하하는 공식 행사에 나왔는데 아무도 그의 병세를 눈치채지 못했고, 사망 3주일 전에 나고야 지역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본인의 주니치 시절을 회고하는 무려 한시간짜리 대담 프로그램을 소화할 정도였다. 참고로 이 때 진행자는 호시노의 주니치 감독 시절 중계방송을 주로 담당했던 고참 아나운서 쿠노 마코토로(참고로 이분은 그 타올라라 드래곤즈의 1988년, 1991년, 1993년 버전을 맡은 적이 있기에 주니치 팬들에겐 나름 네임드 있으신 분이다.) 호시노와의 교분도 무려 40년 가까이 되는 사람이었는데도 병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평소보다 약간 수척해 보인다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70대에 접어들어 다들 나이가 들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정도. 그 정도로 혼자 있을 때는 몰라도 사나이라면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무조건 강한 모습을 보여야 된다는 것이 평생의 신조였던 사람이었다.[27] '신도캇타'는 힘들다를 의미하는 사투리 '신도이'의 과거형이다[28] 이 헹가래는 12년간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던 한 여성 팬의 소원('호시노 감독의 헹가래를 보고 싶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29] 요미우리 소속 선수들 중 베이징에 출전한 선수가 고작 3명인데 이승엽, 우에하라 고지, 아베 신노스케 이게 다이고 우에하라 고지는 이해 2군시절 룸메인 이승엽과 투타에서 같이 삽퍼고 있어서 그런지 출전조차 못하고 국대은퇴선언을 해버렸다.[30] 베이징 올림픽 야구부터 도입된 제도. 11회에 처음부터 주자를 1, 2루에 두고 진행하는 방식으로, 일본 아마야구의 규칙에서 유래했다. 자세한 방식은 승부치기 문서 참조.[31] 사실 베이징 올림픽 때 한국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의 김경문 감독도 한국 시리즈 우승 경력이 없는 감독인 건 마찬가지였다.[32] 그리고 4년 뒤에는 또다른 구기종목에서 똑같은 사태가 벌어졌다.[33] 징병제 이야기가 왜 나왔냐면 한국은 병역면제가 걸려있기에 누구보다도 동기부여가 강한 반면 일본은 그런 게 없어서 근성이 없다는 것. 이를 비하적 뉘앙스가 담긴 말인 '''헤이와보케(平和ボケ)'''로 표현했다. 이는 분명히 일본의 우경화 및 근성론과 엮어서 생각하면 문제가 있는 부분이고, 이와 별개로 호시노의 야구팀 운영 근성론과 철권통치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자주 나온다.[34] 어쨌거나 호시노가 감독자리에 앉고나서 그 성질머리를 배겨내지를 못했는지 감독 취임 조건이었는지 과거보단 조금 지름의 폭을 넓히기는 했다. [35] 수정 전 교세라 돔 오사카로 적혀있었으나, 오릭스가 제1홈구장을 내주고 제2홈구장으로 갈 이유는 없다.[36] 당장 연고지인 미야기는 개박살났고 거기다가 '''홈구장인 미야기 구장마저도 파손.''' 결국 먼 동네 인기없는 친구들의 제2홈구장[35] 을 임시 홈구장으로 써야 했다..[37] 시리즈 후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다나카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호시노가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마운드 운용을 했다고 한다. [38] 애초에 다르빗슈 유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을 공개석상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야구인은 일본에서는 소수파이다. 그나마 다르빗슈는 이란인 아버지를 둔 입장에서 다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느정도 스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발언에 영향력이 생긴 이후로는 다른 '''일반적인''' 일본 야구인들과는 약간 다른 주장을 해오고 있으며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이러한 점도 일반적인 일본 야구인과는 약간 다른 점. 물론 토종 일본 야구인 중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긴 있다. 바로 기요하라 카즈히로와 KK콤비를 이룬 일본 야구 내에서도 괴짜, 이단아 취급을 받는 '''구와타 마스미'''(전 요미우리)이다. 근데 구와타도 일본프로야구에서만 선수 생활을 한게 아니라 선수 생활 말기에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뛰면서 미국 야구를 경험한 선수이긴 하다.[39] 이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교진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자 성골인 하라 다쓰노리, 공교롭게도 호시노가 한신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2003년에 하라 역시 요미우리의 감독이었고 결국 그해 시즌이 끝난 뒤 둘 다 감독에서 물러났다[40] 삼성도 캔버라한테 똥꼬헐리고 탈락.[41] 나시다가 감독을 맡은 팀들은 전부 '''2년차'''에 리그 우승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라쿠텐 항목에 나온 감독들의 사이클을 보면 무능한 감독이 1년을 말아먹은 뒤에 유능한 감독이 취임해서 '''3년차'''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징크스가 있다. 내년에 안 되더라도 다음 해에 희망을 가지자.[42] 스프링 캠프 때 까지는 천부적인 툴은 좋지만 타격자세에 문제가 많아 교정하려면 1~2년 정도는 걸리며 주전으로 정착하려면 3년 후쯤이나 돼야 할 것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불과 3개월만에 타격폼을 교정하고 고졸임에도 1군 클래스로 손색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또한 인터뷰 스킬도 좋고 상당히 모범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장차 구단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후보로서 기대가 큰 상황. 허나 여자친구와 여행을 간 게 신문에 보도되어 잠시 뉴스에 나기도 했다. 그리고 오코에는 프로 4년차가 되도록 주전을 먹지 못하며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다행인 건 히라사와도 거기서 거기라..[43] 2017년 11월 28일에 열렸으니 사망 시점까지 1달 반도 안된 시점이었다.[44] 라쿠텐 구단에 의하면 2016년 7월에 급성췌장염으로 병원에 갔다가 췌장암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업무 수행에 지장은 없는 상태였으나, 2017년 12월 말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고.[45] 시즌 중 허리디스크로 요양[46] 이 전통의 일전은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요미우리, 한신 측에서 브랜드화하여 마케팅에 활용 중이다.[47] 호시노의 서거 이후, 시범경기 때 열릴 추모시합 이외에도 호시노를 기리는 추모의 모임을 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라쿠텐 이글스가 도쿄에서, 한신 타이거스가 오사카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정작 호시노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나고야의 주니치 드래곤즈는 다른 때도 아니고 스프링 캠프 때 추모예정을 가지는 것 이외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심지어 평생의 라이벌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구단 차원에서 추도문을 보내고 애도를 표했고 당시 요미우리 고문인 하라보살이 3일내내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다. [48] 이게 베이징 올림픽 목메달의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됐다. 준결승에서 결정적 실책을 저지른 G.G.사토더러 명예를 회복하라고 다음날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그대로 선발 좌익수로 출전시켜줬지만 그 경기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주니치 감독 시절에도 우노 마사루가 실책할 때마다 아구창을 줄기차게 털었음에도 주전보장은 제대로 해줬다.[49] 그래도 야마사키는 방출통보받고 퇴단회견때 라쿠텐과 호시노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고향팀이자 가장 오래 몸담은 주니치로 복귀해서 2년더 뛰고 은퇴했다.[50] 한신 감독 시절 요미우리와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는데 기요하라가 나서려는 찰나에 호시노가 뒷덜미를 잡고 "이미 끝났어 이 바보야!!(終わっとるんじゃこのボケ!)" 라고 외치며 기요하라를 끌어내버렸다. 기요하라조차 호시노 앞에서는 아무말도 못하고 데꿀멍했을 정도다.[51] 마찬가지로 하라보살도 호시노에게 깍듯하다.[52] 대표적인 게 감독 부임 후 팀의 프랜차이즈 고참 선수를 정리하고, 이적생 출신 중견 선수로 그 자리를 메꾼 것.[53] 이종범은 자신이 타이거즈의 최고참이 되자 해태시절부터 지독하기로 유명했던 타이거즈 팀 내의 구타문화를 없애버렸을 정도로 구타에 거부감이 있었다.[54] 이로 인한 갈등이 꽤 유명했기에 당시 일본야구 팬덤 내에서도 이종범이 오릭스의 오기 아키라와 같은 감독 밑에서 뛰었으면 좀더 성적이 좋지 않았을까라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55] 다만 상술했듯이 관보에 귀화 고시가 된 적이 없고, 부모님의 출신이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호시노가 재일 출신일 가능성은 낮다.[56] 1001을 일본어로 읽으면 '센이치'가 된다.[57] 당시 에이스이자 절친이었던 고마쓰 다쓰오와 내기를 했다고 한다. 결국 고마츠가 무실점 완봉에 성공했는데 이때도 우노 마사루가 결승홈런을 쳤다.[58] 한신 버전으로는 시모야나기 츠요시도 있다.[59] 삼손 리(이상훈)은 주니치 시절 호시노 밑에서 야구를 했다. 다만 이상훈과 다르게 이가와는 머리 관리를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