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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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영남(高榮男)
'''본명'''
진석모(陳錫模)
'''출생'''
1935년 2월 22일
'''출생지'''
충청북도 중원군
'''사망'''
2003년 9월 17일
'''사망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가족'''
슬하 2남 2녀
'''직업'''
영화 감독
1. 개요
2. 감독 초기
3. 다작의 대명사
4. 사후
5. 항목이 있는 연출작품 일람


1. 개요


1970년대와 80년대의 대표적인 한국 영화 감독. 남기남과 함께 다작으로 유명하다.

2. 감독 초기


홍익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조긍하감독의 육체의 길의 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했으며, 1961년 김기덕 감독[1]의 데뷔작인 5인의 해병에서 조감독을 맡게된다. 1964년 잃어버린 태양이라는 작품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이듬해 찍은 활극 영화 <명동 44번지>가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흥행 감독이 되었다...

3. 다작의 대명사


그는 이때부터 미친듯이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하여 '''엄청나게 다작한 감독'''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 최다연출 기록은 김수용의 '''109편'''인데, 고영남은 여기 딱 하나가 모자란 '''108편'''을 연출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사실 당시 영화법 때문이었다. 1962년 개정된 영화법은 지금은 상상도 못할 규정으로 이뤄져 있었다.
  • 외화를 수입에 제한이 있다. 연간 수입가능한 외화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연간 최대 60편 이상을 넘길수없을만큼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이중 일부는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우수 작품상 수상작[2], 당대최고의 반공영화 등을 제작한 회사에 주어졌고, 일부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분배되었다. 하지만 2/3는 당시 16개 등록영화사에 각 1편씩 분배되었다.
  • 문제는 이 등록영화사 유지조건인데, 연간 15편 이상의 장편영화를 제작해야 했다. 이 당시 외화 수입허가권은 당연히 흥행대박의 보증수표이기도 했지만, 그 수입권 자체가 당시 돈으로 억단위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1960, 70년대의 억이다. 당연히 영화사들의 모든 관심은 이 수입허가권을 획득하는데 있었다. 예를 들어서 당시 영화사들은 대종상 수상만 노린 영화들을 제작했고, 대종상을 수상하지 못하면 그 영화는 창고로 들어간 예도 많다. 반공영화에 열을 올린 것도 이 외화수입권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운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가장 안정적으로 1년 1개의 수입권을 얻으려면 연간 15편의 장편 영화 제작 요건을 채워야 했다. 문제는 당시 영화사들로서는 연간 5,6편도 만들기 버거워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10편을 어디서 채우느냐? 그래서 개인프로덕션들이 생겨나서 등록회사의 이름을 걸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3] 이들의 목표는 영화 편수를 채우는 것이었다. 흥행이 되면 좋지만 안되어도 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찍어대었고, 이 때문에 이 당시 영화는 평균 2,3달, 짧으면 2,3주 수준으로 찍혀 나왔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이들이 감독으로는 김수용, 고영남, 그리고 남기남, 배우로는 신성일[4] 같은 이들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안정적 퀄리티로 영화를 양산해내는 것이었다.
고영남이 여기에 부합할 수 있었던 것은 연출력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미친듯이 작품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그의 영화들은 아무리 못해도 평균 이상의 퀄러티는 보장되었고, 이로 인해 흥행 성적 역시 어느 정도 보장이 되었다. 덕분에 제작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여기저기 불려다닐 수 밖에 없었는데, 본인 스스로는 이러한 상황에 자괴감을 느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결국 여행을 핑계로 77년 일본으로 도망쳐 스스로 강제 휴식기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인기 있던 장르가 활극이었기 때문에 커리어 중 활극의 비중이 높지만, 코미디나 문예물 등 다른 장르 역시 두루 연출하였다. 이중 1979년 작 소나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제법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70년대 한국 영화계는 암흑기라 불릴 정도로 저예산 B급 영화 위주로 돌아가던 시대. 결국 수많은 작품들 중에 고영남만의 개성이 담긴 영화는 소수에 불과하며, 이로 인해 그의 수많은 70년대 작품들은 대부분 후세 사람들에게 잊혔다.
80년대에 들어오자 간신히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발단은 외화수입자유화였다. 1984년 외화 수입이 완전 개방 되었고, 1988년부터는 헐리우드 영화 직배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더 이상 영화를 무리해서 십수편씩 찍어낼 이유가 없어진것이다. 더군다나 이후의 한국영화가 1987년을 기점으로 점유율이 30% 아래로 떨어지면서 1999년 쉬리 개봉 이전까지가 대표적인 침체기를 겪었고 그 시절에 차라리 비디오 에로영화를 찍는것이 더 돈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극장에 영화를 걸을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어진.., 수준을 넘어서 정상적으로 찍은 영화도 화제작이 아닌 이상 극장에 내걸어도 수익을 내기 쉽지 않았다.[5] 이때부터 뒤늦게 커리어가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한국 영화사의 걸작' 정도로 평가받는 작품은 없지만, <빙점81>이나 <깊은 밤 갑자기> 등은 지금까지도 비교적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특히 <깊은 밤 갑자기>의 경우, 호러 매니아들에게는 한국 호러 영화의 숨은 걸작 중 하나로까지 평가받고 있으며 suddenly in the dark라는 제목으로 미국에 수출되어 2016년에 블루레이까지 화질개선이 되어 나올 정도였다.
다만 80년대 작품들에도 당연히 졸작들은 존재한다. 매춘2는 별로 평가가 좋지 않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벗는 장면이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 것에 실망(...)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1988년작 <위험한 향기>는 한국 영화 표절 역사상 가장 용맹한 영화 중 하나다. 당시 해외영화 직배가 허용되어서 이미 한국에 지사를 세웠던 UIP가 배급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화 <위험한 정사>를 표절했다. <위험한 정사>는 UIP의 직배영화 1호였기 때문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그의 마지막 연출작인 1999년 작인 <그림일기>. 이 영화의 주연은 바로 이휘재인데, 이휘재 본인조차도 이 영화를 찍은 것을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1993년에는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다. 고영남 본인은 헬리콥터에 탑승하지 않아서 화를 면했지만, 영화 자체는 당연히 제작이 무산되었고, 고영남도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활동을 쉬어야 했다. 한강 영화촬영 헬기 추락 사고 문서 참조.

4. 사후


고영남은 2003년 폐암으로 사망했는데, 이 무렵 그의 아들인 진형태가 아버지의 작업을 돕기 위해선지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이후 진형태는 2011년 <스트레인저>, 2013년 <좋은 친구들>[6]이라는 영화를 감독했으나 평가와 흥행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수준.

5. 항목이 있는 연출작품 일람



[1] 악어의 감독 김기덕과는 전혀 다른 인물. 대표작으로 이순재주연의 용가리가 있다.[2] 이게 대종상이 한국 최고권위의 영화제 지위를 유지한 가장 큰 이유이자, 대종상에 수많은 비리의혹이 이어졌던 근거이기도 하다.[3] 1960년에 연간 90편을 못 찍던 한국 영화계는 1969년에는 연간 200편을 넘게 찍어대고 있었다.[4] 신성일은 30편의 출연계약을 동시에 하고 하루에 3가지 영화를 동시에 찍었으며, 신성일과 계약하고 한달을 기다려야 했던(30편이 한달에 다 찍었다는 이야기다) 영화사들은 신성일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영화를 한편 뚝딱 찍어대고는 했다.[5] 이 과정에서 수입권에 올인했던 기존 영화사들은 대부분 다 망했고, 개인프로덕션들은 독립영화의 길을 열었다.[6]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좋은 친구들#s-3과는 제목만 같은 다른 영화이다. 어차피 두 영화 다 스콜세지의 영화 제목을 카피했지만, 진형태 쪽이 1년 더 빨랐다. 그러나 평가와 흥행은 뒤에 나온 영화가 더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