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남

 


'''남기남'''
[image]
'''출생'''
1942년 4월 17일 ~ 2019년 7월 24일 (향년 77세)
'''출신'''
전라남도 광주시
'''학력'''
서라벌예술대학
1. 개요
2. 상세
3. 작품 목록


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주로 액션이나 무술 영화를 많이 찍었으며 7080 세대들에겐 어린이 영화 감독으로 유명했다. 별명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카메라잡이'''였다.

2. 상세


1942년 전라남도 광주시 출생으로, 17세 때 영화배우를 꿈꾸며 상경했으나 명동의 한 다방에서 인기 배우 최무룡과 마주치고는 이 정도 외모 갖곤 안되겠다 싶어 연출가로 방향을 틀었고, 서라벌예술대학[1]을 졸업한 후 1960년 한형모 감독의 《왕자 호동과 낙랑 공주》 연출부에 들어가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변장호, 장일호, 임원식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받다가 1972년, 《내 딸아 울지 마라》로 감독 데뷔한 이래 주로 무술, 코미디, 액션 분야에서 100여 편이 넘는 셀 수 없는 작품을 감독했다. 셀 수 없는 건 일단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1996년에 법적으로 영화 의무납본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영화나 방송 프로그램, 음반 등이 체계적으로 보존되지 않아 당대에 영화와 방송자료들의 보존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서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등 각종 영화 사이트마다 그의 작품 수에 대한 설명이 각각 다르다. 생전에 본인도 그 수가 헷갈린다고 한다.
현역 시절 별명답게 빨리찍기가 특징인데, 예를 하나 들자면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를 찍었을 당시 영화 도입부에 갈갈이 삼형제에서 내려오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잘 찍고 갑자기 남 감독이 삼형제에게 제자리 점프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지만 영화를 완성하고 시사회장에서 그 이유를 알았다고 한다. 바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야말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찍은 셈.
한국의 에드 우드라는 비교를 하기도 한다. 이 비교는 씨네21에서 처음 시도했다. 하이텔 시절의 모 평론가는 그를 로저 코먼(Roger Corman 1926.04.05~)에 비유했다. 사실 유명인사들의 리즈시절에 작업했다는 점이나 현역 유명인들을 출연시키는 점에서는 로저 코먼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남기남이 심형래, 최수종, 백일섭 등과 작업했듯이 코먼은 잭 니콜슨,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작업했다. 그리고 이들이 유명해진 뒤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하다! 로저 코먼은 컬트 영화 《공포의 작은 가게(Little Shop of Horror)》는 이틀 만에 찍어서 기네스북에 오른 적도 있다.
그렇게까지 많이 찍을 수 있었던 이유는 비슷한 처지였던 고영남 감독 문서에 잘 나와 있지만, 1970년대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영화관객수가 떨어진데다가 사전검열이 강화되면서 국내영화의 경쟁력이 급속히 저하되자 영화업계에 대한 일종의 당근으로 영화수입편수를 크게 제한했는데, 1973년에 외화수입권을 국내영화를 많이 찍은 영화사에게 우선권을 주는 방향으로 영화법이 개정되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해서 영화업자들이 싸구려영화를 몇편씩 찍고 영화수입권을 얻는 식의 편법이 영화업계에서 횡행해지게 되었고, 그때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빠른 시간 내에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감독 남기남이었다.[2] 저예산과 적은 시간 안에 빠르게 영화를 찍어냄으로서 부족한 작품을 채워내는 감독으로의 역할을 한 것. 사실 스크린 쿼터제 폐지론자들은 이런 제도의 악용을 지적한다.[3]
사실 임권택 감독도 B급 영화라든가 정부 우수영화, 반공영화 등을 찍었으나,[4] 적어도 그는 이런 와중에서도 《짝코》나 《아벤고 공수군단》 같은 진짜 걸작도 꽤 찍었다.
이름이 남기남인 이유가 '필름을 왜 남기남?'이라는 썰렁한 농담과 비판이 있을 정도로[5] 많은 작품을 빠른 시간 안에 찍어내는 특유의 기술로 유명하다. 데뷔 초기에는 드라마를 찍었으나, 시대가 뒤집혀서 그가 일을 못하게 된 상황에서[6] 타이완의 제작자와 손잡고 당시 이소룡의 사망 이후의 틈을 탄 짝퉁 이소룡 영화들를 찍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빠른 작업속도는 충무로에서 알려져서 여러 싸구려 영화들을 찍게 됐다. 그러다보니 그의 작업 전반은 개그맨의 캐릭터에 의지한 개그물이나, 액션만 있는 액션물로 차게 되었다. 그래도 본인 입장에서 아쉬움이 있었는지 간간히 예술성 있는 영화를 찍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시도'''다. 하지만 그 특유의 엉성함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그 빠른 속도에는 대부분 리허설을 시켜도 카메라를 돌려서 끝내버리고, 소림사 촬영 당시 허가를 안 받고 찍고 물러가서 스태프가 빨리 가서 허가를 받으면 다시 찍을 수 있다고 하자 이미 다 찍었는데 뭘 찍냐고 했다는 등, 리허설시키는 것과 동시에 찍기로 유명하다. 《무릎팍도사》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심형래의 영화 방식이 바로 남기남식이다. 시간이 아까워서 빨간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 카메라 렌즈 위에 빨간 셀로판지를 덮어씌운 일화는 유명하다. 또 다른 일화로는 《영구와 땡칠이》의 실내 세트를 짓는 일주일 동안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타킴》라는 제목의 액션 영화를 미국 가서 찍었다. 이 작품에선 '''강석현'''과 '''신성일'''이 나온다. 최수종을 캐스팅해서 슈퍼맨 일지매라는 영화를 찍었을때도 최수종의 스케줄이 위낙에 바빠서[7] 클로즈업, 표정샷만 잔뜩 찍고 뒷모습이나 복면쓴 장면은 대역을 활용해서 찍은 다음에 편집을 통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재빨리 영화를 만들다보니 최수종이 신기해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만큼 빨리빨리 영화를 찍어서 그럴듯한 영화 만들기에는 그야말로 천부적인 천재성을 발휘했던 것. 영화 자체의 작품성이나 예술성과는 큰 관련이 없는 재능이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1989년, 비공식적 기록으로는 180만 관객을 동원한 《영구와 땡칠이》로 반짝 전성기를 맞기도 했으며 당시 《영구와 땡칠이》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을 흥행에서 눌렀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확실히 영구와 땡칠이가 큰 흥행을 한 것은 맞아서 1990 년 1월호 로드쇼에선 아예 이 영화가 집계에 없던 반면에 스크린 지에선 1위로 선정했다. 스크린 관객 수치에선 적어도 서울 43만으로 서울 30만이 채 안되던 《최후의 성전》을 이기기는 했다. 아무튼 큰 흥행을 기록했다는 점에 대해서 이견이 없지만 전국 관객수가 180만인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서울에서나 관객수 집계를 하던 수준이었고 전국기준으로 집계한 것이 1990년대 후반으로 생각보다 오래되지도 않았다. 그나마도 체계가 완전히 잡히게 된 것은 2003년의 일이었고. 하여간 인기는 정말 대단했고, 대원동화가 이때 번 돈으로 애니메이션 판권사업과 만화출판 사업을 시작하면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는 업체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 만화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영광을 뒤로하고 남기남은 자신의 주특기(?)인 어린이 영화나 무협, 액선, 코미디 영화에서 벗어난 진지한 정극 영화를 찍으려다가 지속적인 흥행실패로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는데 본인 말로는 32억원이 공중분해되었다고 한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외화수입개방 때문이다. 1984년 외화수입이 전면 개방되고,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부터는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등장한다. 기존 남기남의 방식으로는 어린이 영화를 만드는 것[8] 외에는 통용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린이영화로는 먹어줄만했지만 새로 진지한 정극영화를 찍기에는 유행에서 심하게 뒤쳐져 버렸고 빨리찍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작품성을 높일 연출실력도 부족한데다가 경쟁자도 많다보니 걸어줄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 후 나름대로 재기를 시도하지만 시원찮았고[9], 2002년에 <너 없는 나>로 복귀한 후 2003년에 개그 콘서트 출연진을 주연으로 한 여름시즌 코미디 영화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큘라》로 그럭저럭 흥행을 했지만 그뒤로 비슷한 류의 여름 영화가 몇 편 나오다 말았고 본인이 만든 '바리바리 짱'조차 그 분위기에 휩쓸려 묻혔다. 이후로도 영화는 만들기는 했지만 몇편 건것이 전부 그나마 극장개봉도 아니고 그리 유명한 것도 아니다. 아마추어 평론가는 제외하더라도 씨네21에서 지속적으로 밀어주었으나....남기남 감독이 2000년 초반, 호러존이란 사이트와 인터뷰를 한 걸 보면 씨네21에서 은근히 괴작감독으로 까듯이 소개한 탓에 여길 무척 싫어했었다. 2001년 6월 18일부터 22일까지 KBS2 <인간극장> '충무로의 전설, 찍지 남기남' 편이 방영된 바 있다.
씨네21의 인터뷰를 봐도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신이 멍할 수준이다. 저작권의 개념은 없고[10] 빨리 싸게 찍는다면 무슨일이라도 하는 타입이다. 씨네21 인터뷰는 그나마 포장을 하려고 했는데도 그 모양이다. 코먼과 비교하려고 해도 비교하기가 미안해지는 수준이다.
물론 남기남이 한창 전성기였던 1970~80년대에는 세계저작권협약 및 베른협약 미가입국이라 저작권 인식이 시궁창이던 시절이기에, 해적판이 넘쳐났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11] 코먼은 할리우드에 엄청난 공헌을 한 전설적인 감독이자 제작가이다. 코먼은 돈될 만한 영화와 저예산에 집착한 상업성 때문에 까이지, 감독이나 제작자로서의 역량은 우수한 편이다.[12] 지금 한국영화인들 중에서 심형래박준형을 제외하면 남기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 하지만 심형래처럼 언플을 이용해서 자신을 과도하게 포장한 적도 없고 또한 영화를 만들면서 흥행은 몰라도 막상 순익을 올린 적이 거의 없는 심형래와 다르게 남기남은 수입을 짭잘하게 거둔 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형래와 비교하기 미안해진다. 거기에다가 아무리 싸구려 작품을 찍어낸다해도 영화사로부터 러브콜을 수없이 받아본 적까지 있었으니 심형래와 비교하면 최소한의 능력은 있었던 셈이다. 물론 심형래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후로 단순히 영화를 빨리 찍는 것이나 배웠을 뿐 다른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찍는 방식을 따라하는 식으로 노력을 해야되는데 그런 노력을 안했다는 것도 컸기는 했지만.
2010년에 동자대소동이 공개되고 2010년 1월 10일 전국 6군데정도 극장에서 상영하다가 2011년 1월 6일 개봉 후 대한극장에선 나흘 정도 상영되고 막을 내린 듯하다. 애초에 2008년도에 제작되었는데, 홍보비가 없어서 이때까지 개봉을 시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2010년 10월 29일에 DVD출시 예정이었다가 공식적으로 '''4번 이상''' 밀렸다. 결국 2011년 DVD발매 되었다. 차기작은 성인영화로 이번에는 부동산이나 철거 문제를 다루는 등, 사회적인 내용이라지만 제작가능성이나 개봉가능성은 희박하다.
2019년 7월 24일 오후 6시 30분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 고인은 당뇨로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했으며 약 3개월 전 순천향대학교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고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하다 병상에서 눈을 감았다. 유언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고 한다.(관련 기사). 유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가 있다.

3. 작품 목록


  • 뒤돌아 보지 마라 - 1979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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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액션영화로 조총련들이 마약을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밀수하려 할 때 한국의 대공수사본부는 수사원 백일섭을 파견한다. 황당한 일들의 연속 끝에 일본 형사들이 급습하여 체포하는데. 격투 장면에서 맞는 장면과 소리가 일치되지 않는다. 다운로드 서비스도 있다.
  • 열번 찍어도 안 넘어진 사나이 - 1980년작. 12월 24일 개봉
이주일, 백일섭 주연. 만수는 광주역에서 라이터 수리점[13]을 한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과시가 심한 성격 탓에 문제를 잘 일으킨다. 교훈과 정의를 중요시하는 당시 검열이나 심의 덕에 '''전혀 개연성없이''' 조폭 박쥐파를 소탕하게 된다.
  • 여자 대장장이 - 1982년작
백하촌에서는 3년마다 마을의 경비를 담당하는 경비대장을 '''권법대회'''로 뽑는다. 현직 대장 조칠은 흉악해서 마을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주인공 호생은 대장간의 딸 취취와 친한데, 취취는 초반부에 악당들과 격투를 벌이고, 그뒤로는 비중이 없다.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 없는데, 소주인이 누구인지 가리는 건 솔로몬왕의 재판(아기를 둘로 자르자고 하니, 아기를 넘겨주겠다는 어머니를 승소시킨)을 카피한 거다.
당시에는 이소룡을 필두로 권격영화가 많이 나와서, 홍콩을 무대로 한듯한 권격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예를 들면 이형표 감독의 애권(愛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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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박치기 - 1983년작
이대근백일섭고등학생으로 나오는 영화. 개연성이 없는데 중반부에 가다가 반일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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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홍콩의 오사원(吳思遠)감독이 제작한 용지닌자(龍之忍者; Ninja in the Dragon's Den)의 일부 신을 무단으로 도용한 다음 몇몇 장면을 새로 찍어서 짜깁기한 작품으로, 퀄리티야 말이 필요없다. 흑역사. 흑룡통첩장의 극장개봉 신문광고와 금성마그네테크[14]에서 출시한 VHS 케이스 표지에서 "一名 : 龍의 忍者"라 표기한 탓에 나중에 1989년 벧엘프로그램에서 VHS로 진짜 용지닌자가 출시되었음에도 용지닌자의 국내 극장 개봉명을 흑룡통첩장으로 아는 사람들이 꽤나 있다. 그러나, 벧엘프로그램에서 낸 용지닌자도 개차반인게 삭제와 오역이 엄청나서 국내 비디오만 보면 욕나온다..... 참고로 이 영화 용지닌자에서 최종보스가 바로 한국배우인 황정리.
  • 심형래의 탐정큐 - 1985년작.
심형래 주연의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표방한 것 같아도, 그냥 황당한 코미디 영화. 심형래와 그 친구들은 무슨 사무실을 차리는데, 어느 집안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죽자 그걸 수사한다. 결국 그집 재산을 가로채려는 며느리(결혼식은 안 올렸다)의 소행임을 밝혀낸다. 그런데 부자라도 집에 방공호가 있고, 그 안에 큰 동굴이 있다. 여기서 집안의 큰아들로 나오는 배우는 김동현(195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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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귀 일곱대 - 1987년작.
심형래가 영구 기믹이 아니라, 천재 기믹으로 나오는 이색작. 백일섭이 회장역으로 나오는데, 심형래가 결혼을 조건으로 백일섭의 따귀 일곱대를 때린다는 내용.[15]
  • 누가 붉은 장미를 꺾었나 - 1990년작.
김청 주연의 액션(?) 영화로 박근형, 김상순, 윤문식 등도 출연한다. 마지막에 엄청난 반전이 있는 영화.
2003년작이며 정창욱 감독과 공동제작. 윤택 등 웃찾사 개그맨들도 이곳에 나왔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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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리바리 짱 - 2005년작.
심영 역할로 유명한 '''김영인'''이 출연했다. 출연 장면 모음 그리고 대통령 역으로 그 분이 출연한다(...) 유튜브 링크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1시간 23분 짜리를 7분으로 요약했는데도 '''더럽게 지루하다.''' 출연진들의 연기는 수준 이하고[16] 주글래 살래 수준으로 똥망작이다. 이 감독이 진짜 30년 동안 영화감독에 일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연출 실력이 완전 카메라를 처음 찍는 사람이 연출직을 맡는 수준이다.[17]
  • 동자 대소동 - 2010년작
남기남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다 정종철, 박준형주연의 영화로 DVD 출시되었는데, 놀랍게도 2만원이 넘는다. 원래 신품은 그 정도로 비싼 게 당연하지만... 메뉴가 어처구니 없게도 본편과 '선택 보기' 외에 없고 색 보정이나 조명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 게다가 18mm로 촬영한 느낌이라서 8, 90년대 영화, 그것도 뉴스의 한 장면 같은 기록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해 준다... 표지는 완전 HD로 촬영된 것 같지만 그뿐이다. 네오 리얼리즘영화일까... 다시 말하지만 2010년작이다. 참고로 박노식용팔이 시리즈처럼 결말에는 표창장을 수여받는다.
[1]중앙대학교 영화학과의 전신. 예상 외로 남기남은 정식으로 영화공부를 한 사람이다. 사실 이렇게 영화공부를 했으니까 많은 영화를 찍은것이기는 하다.[2] 남기남은 빨리 대충 싸게 많이 찍었다면, 고영남은 많이 찍기는 더 많이 찍는데 대신 최소한의 퀄리티는 유지하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상영된 영화수에서 한국 역사상 1, 2위를 다투는 고영남과 달리 남기남은 순위권에 들지 못한다. 당시에는 찍었다고 등록하는 것이 중요했지, '''영화를 실제로 극장에 거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남기남의 영화 상당수는 실제로 극장상영은커녕 비디오도 나오지 못하고 영화사 창고에서 썩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3] 다만 현재의 스크린쿼터제와 당시 영화법은 다르기는 하다. 당시 영화법은 외화수입을 수십편 수준으로 제한한 형태이고 1987년 이후의 스크린쿼터제는 외화 수입을 제한하지는 않고 한국 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날짜를 지정하는 식이다.[4] 서중석 저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에 따르면, 그가 이런 작품을 찍게 된 건 선친이 6.25 때 몰락한 좌익 집안이라 영화 만드는 데 제약이 따랐기에 "나도 반공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알아줬으면 한다"는 생각에서 제작해왔다고 한다.[5] 이건 씨네21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 개그가 원조다.[6] 당시 유신 정권으로 인해 영화사의 수가 제한됐고, 그 시대가 뒤집히는 동안 (본인 주장으론) 큰 작업을 준비하던 그는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7] 이 당시에는 서울 뚝배기에 출연했었는데 일일연속극이다보니까 일정이 빠듯할수밖에 없었다. [8] 방학 전에 찍어서 방학 때 개봉, 어린이날 특수용 등 빨리 찍을 필요가 있다.[9] 그 시절에 만든 영화들 중 극장 개봉한 것은 <천년환생>(1998) 한 편뿐이었고, 그나마 그것도 땜빵용 개봉이었다.[10] 홍콩 영화 용지인자(龍之忍者)의 장면을 무단으로 짜깁기해서 흑룡통첩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무협 영화 팬덤 내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11] 만화도 영화도 소설은 검열이 심했지만 한편으로 해적판을 출시하거나 하는 일은 자주 벌어졌으며, 외국소설을 연극화할 때 저작권 따위 무시하고 상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정도였다.[12] 코먼을 까는 할리우드의 영화 관계자들도 코먼의 영화가 예산 한도에서 그나마 괜찮게 뽑아냈다는 점은 인정한다.[13] 그 당시에는 일회용 라이터도 잘 없었고, 대부분 지포나 고급 가스라이터였기 때문에 고장이 나면 수리점에 맡겼다. 일회용 라이터가 늘어난 것은 80년대 초중반 이후다.[14] 1987년 금성사에 합병됨. 비디오 제작은 삼영프로덕션이 맡았다.[15] 부연하자면 "결혼을 승락받고 싶으면 내 따귀 일곱대를 때려봐라."라는 내기를 백일섭이 걸자 심형래가 갖은 잔머리로 퀘스트(?)를 수행하는 내용. 그래서 마지막 일곱대까지 성공하는데에서 엔딩이 뜬다.[16] 코미디언이라서 그렇다 보기 어려운 것이 김현숙은 정식 코미디언이 아니고 연극배우 출신이고, 류담도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해 현재는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병만도 정극 연기를 잘 소화해낸 적이 있다. 애초에 코미디언도 희극을 하는 배우고 연기력이 없으면 개그를 소화하기 힘들다. 김영인은 야인시대심영(야인시대)역의 내가 고자라니로 잘 알려졌듯이, 연기력이 훌륭한 편에 속한다. 결국, 이들의 발연기는 감독의 연출 부족과 대본의 문제다.[17] 말만 영화감독을 30년 동안 일한 사람이지 30년 전부터 지금까지 발전한 게 하나도 없다. 리허설도 안 하고 영화를 대충 찍어대니 실력이 늘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