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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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연예인.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제16대 국회의원[11] 을 역임했다. 호는 우석(隅石)[12] .
1937년 5월 8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대구부(現 대구광역시)에서 아버지 강병오와 어머니 김연주[13]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다만, 아버지 강병오에게는 본처가 아닌 두 번째 부인이었으며, 전처 사이에 자녀들이 여러 명 있다고 한다.[14][15]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며, 데뷔할 때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썼다.[16]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본명 자체를 '''강신성일'''로 고쳤다. 선거에서 본명을 써야 하는데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본명 강신영으로 나섰다가 유권자들이 신성일인줄 몰라서 표 손해를 많이 봤다는 게 개명의 동기.
2017년, 폐암 3기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생존률은 40%였다고. 2018년 3월에 '사람이 좋다'에 나온 바에 따르면 다행히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으며 또 10월 말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건장함을 보여주는 근황이 전해졌지만 결국 2018년 11월 4일 새벽 2시 30분에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참고로 말기암 환자 대부분은 거동도 못할 뿐더러 삐쩍 마른 채 사망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지만[17] , 그의 경우에는 사망 2주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도 비교적 건강해 보였고 삐쩍 마른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회복되는 기색이 보였다고... 아마 갑작스럽게 사망한 케이스였을 확률이 높다.
2. 활동
2.1. 배우 활동
1960 - 70년대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18] 젊은 시절이나 나이 든 후 모습이나, 2000년대 시각으로 보아도 걸출한 미남임에는 별 이견이 없다. 젊은 시절엔 한국의 알랭 들롱이라고 불리웠다. 아니, 당시 서양 미남의 대명사던 알랭 들롱과 비교되는 한국 미남의 대명사가 신성일이었을 정도.[19]
전성기에는 하루를 넷으로 나누어 영화를 동시에 네 편씩 겹치기로 찍기도 했다. 총 524편(추정)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 중 54편을 엄앵란과 함께 했다. 유명세나 인지도, 출연작으로 본다면 현재의 탑 인기 남자배우 3 ~ 5명은 합친 정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출연료도 단연 탑급으로 당시 배우 출연료 1위를 차지 했으며 2위와는 무려 7배나 차이가 날 정도였다. 1960년대 배우 출연료가 보통 1만8000원이었는데, 신성일 혼자 45만원을 받았다고 한다ㅎㄷㄷ. (이대근의 인터뷰 증언.) 당시에 그를 출연시키려는 제작사에는 출연료를 현금으로 자루에 담아와서 집 앞에서 줄을 섰을 정도라고 한다.[20]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엄청난 수입에 비해 재산은 얼마되지 않았는데 신성일은 선거를 비롯해 돈을 버는 족족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신성일 다음으로 출연료가 높았던 신영균은 착실하게 재테크를하여 지금도 연예계 최고의 부자로 불린다.
다만 연기력으로 본다면 평론가들도 썩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한다.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야관문: 욕망의 꽃>을 본 관객들이 '이런 전설급 원로배우의 연기가 이다지도 발연기였다니'라고 한결같이 혹평한 데서 알 수 있듯, 발성도, 억양도 좋은 편이 아니다. 후시녹음의 최대 수혜자.[21][22] 그래도 80년대 <길소뜸> 이후 꾸준히 동시 녹음을 해왔고 평가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발연기가 심해져서 그렇지....
대구 출신이다 보니 사투리가 무척 심해서, 대부분 성우 더빙으로 처리했다. 신성일의 목소리 전담은 1960년대에는 성우 이창환이 맡았다가, 1970~80년대에는 성우 이강식이 맡았다.[23] 참고로 이창환은 원래 라디오 드라마 등에서 인기를 끌던 성우로, 신성일 성우 전담이 되고부턴 신성일이 엄청난 다작을 하다보니 자연히 이 분도 엄청나게 바빴다고 한다. 전성기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처음으로 본인 목소리를 녹음한 영화는 '오늘은 왕'으로, 이후 드물게 신성일의 본 목소리로 나온건 '이상의 날개'의 이상, '코리언 커넥션'의 형사와 '증발'의 중정부장, '레테의 연가', '길소뜸', '달빛 사냥꾼', '야관문: 욕망의 꽃' 정도.
한창 영화배우로 전성기를 날리던 시절에는 영화에만 집중하며 TV 드라마에 일절 출연 안 하기로 유명했지만[24] , 예외적으로 반공 드라마에 여러 번 출연한 적이 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주력하였던 반공 드라마, 반공 영화 출연을 안 하면 일감이 끊길수도 있던 시절이라서, 그냥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고. [25] 어쨌든 본격적인 TV드라마 출연은 여자의 남자가 최초.
2012년 3월 10일 세바퀴에 출연했으며, 종편인 TV조선의 토크쇼 노코멘트란 프로에서도 나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참으로 생소한 광경.
당대에 인기가 워낙 대단해서인지 그와 이름이나 이미지가 비슷한 남자 배우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은 신일룡(본명 조수현), 동향(영덕) 출신인 신영일(본명 정인식)은 그를 모방한 인물들. 특히 신영일은 신성일이 직접 발탁해서 신영일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국회의원 보좌관에 이르기까지 평생 그와 함께 했다. 김지미, 신성일에서 한 글자씩 따서 이름을 지은 배우 겸 제작자 한지일(한소룡)도 신성일의 영향을 받은 이 중 하나.
전성기에는 주로 극장쇼가 수입원이었는데 항상 현미, 최희준이 신성일, 엄앵란과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신성일, 엄앵란의 영화 OST를 무조건 여자는 현미, 남자는 최희준이 불렀기 때문이다. 후에 현미가 홀몸이 되었을 때도 현미의 자녀들을 신성일이 각별하게 아꼈다고 한다.
2.2. 정치 활동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정계 입분을 노렸고, 5공화국 시절인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민주정의당 봉두완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본인 말에 의하면 법에 따라 본명으로 선거에 나갔는데 유권자들이 배우 신성일인지 몰라서 표를 안 줬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에 이름을 '''강신성일'''로 개명하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 갑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김복동에 밀려 낙선하였고, 4년 후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대구광역시 동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6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서명한 사실도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 활동을 하던 중 뇌물수수를 하는 바람에 임기가 만료된 후 실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미래통합당 강석호 의원은 그의 조카다.
3. 구설수
미남으로 소문난 그는 맨발의 청춘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엄앵란과 결혼했다. 이 엄앵란과의 결혼식은 당대 최고 톱스타 둘의 결혼이라 어마어마한 화제가 되어 이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심지어 이를 노리고 지방에서 전문 소매치기단까지 같이 상경했다가 잡힌 게 뉴스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그 과거사를 자서전으로 써낸 적이 있었다. 2011년 발표된 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엄청난 과거사를 여과없이, 그것도 '''상대 여성의 신상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여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26]
사실 동시대 배우들의 회고록이 90년대 이후 발굴되면서 나름 화려했던 경력들이 공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의 예[27] 처럼 본부인에게 잘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로 덮거나, 최은희처럼 본인에게는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지만 밝히거나[28]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전에도 엄앵란은 시사 프로에 나올 때마다 "요즘 여자들은 너무 쉽게 이혼한다. 참고 살아야지. 나라면 5, 6번은 이혼을 해야 했다."는 발언을 수시로 하였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신성일의 자서전 공개로 엄앵란은 보살의 영역에 이르렀다.[29] 그나마 2018년 현재에서는 완전히 별거 상태이다. 참고로 MBC 프로그램인 사람이 좋다에 출연한, 신성일의 막내딸(이름은 강수화)은 엄앵란에게 '아버지에게 애인이 생겼으니까 완전히 이혼하자.'고 말했다. 증거 기사. 또한 '둘은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고 증언했다. 증거.
그리고 그는 부부는 별개의 인격체라며 자신들처럼 사는 것이 미래 지향적인 부부의 모습이고 불륜 공개에 대해 엄앵란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 #
이후 Y-STAR와의 인터뷰에서 그간의 불륜 폭로 발언이 '''자신의 자서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엄앵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
2016년 부인 엄앵란이 건강프로그램 촬영 도중 유방암이 발견되어 수술 및 치료의 일련 과정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아내의 입,퇴원과 뒷바라지 전부를 손수 맡으며 그 동안의 행보에 대한 논란이 어느정도 사그러진 것과 동시에 중, 노년 시청자들의 애증어린 공감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다.
2017년엔 폐암 3기인 것이 밝혀졌을 당시에는 위로의 댓글보다는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 및 비난 댓글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나, 2018년 11월 4일, 사망 소식이 기사화가 된 이후에는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고, 아내인 엄앵란과 가족에게 위로를 표하는 댓글이 훨씬 더 많았으며, 고인의 행적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자중시키는 댓글들도 주류를 이루었다.
#,# 물론 이는 살인자나 매국노급이 아니라면 웬만큼 잘못을 해도 고인을 욕하지 않는 문화 때문이지, 그의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쪽으로 여론이 전환된건 아니다.
고인의 죽음 후에, 고인이 투병 중, 엄앵란과 신성일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엄앵란 "우리는 동지, 멋있게 죽어야 돼", 신성일 "마지막까지 엄앵란과 함께 하고 싶어"
4. 사망
2018년 11월 3일 19:30분 경 언론을 통해 그의 사망 속보가 떴다. 순식간에 여러 언론들이 그 사실을 연이어 보도했고, 실시간 검색순위 1위에 오르면서 사망이 기정사실화됐다.
하지만 이후 응급실에 입원한 상태지만 사망은 아니라는 정정 기사가 떴다. 가족과 영화배우협회 측은 신성일이 응급실에 입원해 위독한 상황에서 가족들이 장례식장을 미리 예약했던 것인데, 한 기자가 사망으로 보도하면서 (+ 확인도 안하고 기사를 베껴쓰는 행태 때문에) 불필요한 오보 해프닝이 벌어진 것. 신성일의 조카인 강석호 의원도 "가족들이 응급실에서 만일을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있다"고 밝혔다. #
언론 보도 후 7시간 뒤인 2018년 11월 4일 오전 2시 30분 경 화순전남대학교병원에서 아들 강석현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2살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장지는 그가 말년을 보낸 영천시에 위치한 선영.
사망 원인은 이전부터 치료를 하고 있던 폐암. 생전에 본인은 담배를 피우기는 했지만 1980년대에 이미 끊었고, 집에서 부모님의 영전을 모시면서 항상 향을 피웠는데 그게 폐암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주장했다. 또 '부계의 유전인 것 같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폐결핵 3기였다'라며 가족력도 있는 것 같다고 밝힌 적이 있다.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여담
- 2009년부터 계명대학교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로 재직했다.
- 막내딸 강수화도 한 때 광고모델로 활약한 한 적이 있다.[32] 여담으로 아버지 닮아서 그런지 이목구비가 준수하게 예쁘다.
- 둘째 형이 1969년 대한민국 공군이 세계 4번째로 F-4D를 인수할 때 직접 조종간을 잡고 대구기지로 착륙시킨 강신구 예비역 공군 소장(1934 ~ 2002)이다.
- 젊었을 때 스포츠카를 좋아해서 포드 머스탱을 직수입해 탔다고 하며,[33] 처음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에서 부산 방면 도로가 개통되었을 때 서울에서 부산을 향해서 주행하고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추풍령 쯤에서 반대편에 빠른 속도로 지나간 차를 발견한 박 대통령이 "저거 누구야?"했더니 박종규[34] 당시 경호실장이 "영화배우 신성일입니다."라고 했더니, 박 대통령이 "그 친구 오래 살라고 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제임스 딘처럼 사고내지 말고 조심히 운전하라는 말이었던 것. #
- 2000년대 신동아에서 영화평론가 심영섭과 한 인터뷰를 보면, 그는 역대 여배우와의 베드신을 언급하며 몸매 품평도 해댔다. 심영섭은 그게 거슬렸던지 다른 원로 배우 인터뷰에서도 이를 언급하면서 신성일을 은근히 깠다.[35]
- 배우 김수미를 도운 적이 있었다. 신인 시절 영화 촬영중 감독이 예정에 없던 노출을 요구했는데, 감독의 노출 강요에 곤란해하던 김수미를 신성일이 도왔다. 그는 감독에게 "신혼여행 다녀온 새색시에게 갑자기 벗으라고 하면 벗겠냐. 촬영 접자"고 말하면서 감독과 김수미의 갈등을 무마시켰다.
8. 둘러보기
[1] 대구 동구 갑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2] 임기 중 별세. 잔여임기 1년 미만으로 인해 보궐선거 미실시.[3] 대구 동구 을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4] 대구 동구 갑 선거구의 제17대 국회의원[5] 대구 동구 을 선거구의 제17대 국회의원[6] 의원직 상실[7]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개명.[8] 당시 기준으로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0cm 중반대였으니, 상당히 큰 키라고 할 수가 있다. 지금으로 치면 최소 180cm 이상으로 쳐줄 정도는 된다. 당시에는 배구인 및 농구인들 키도 180cm가 안 되던 때이다. 현재에도 성인 남성 평균키가 170cm 초중반대인 걸 감안할 때, 현재 기준으로도 젊은이들보다 평균 이상은 된다.[9] 40회 졸업생이다. 탤런트 신충식과 고교 동기다.[10] 참조.[11] 소속정당은 한나라당, 지역구는 대구광역시 동구[12] 전 국회의원이자 현 국가정보원장인 박지원의 호 역시 우석이지만, 그의 호는 한자가 다르다. 그의 호는(雩石).[13] 당시 경상북도청의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한때 계모임을 직접 운영하였다가 빚을 크게 져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었다고 한다.[14] 아버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으로, 영덕과 대구를 오가며 사업을 했다고 한다.[15] 당시에는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은(그 때도 불법이었지만) 후처를 두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특히 본처에게서 아들이 없다면 거의 100% 후처를 두었거나 묵인하에 외도를 하였다. 남존여비 가부장 사고가 지배하고 여성 권리 따위는 개나 주던 시절이다. 유교 문화가 지배하던 지방일수록 더 심했다. 아예 민법에 혼외 자식을 아버지 단독 의사 표시만으로 친자로 인정하는 "인지"라는 조항이 있던 시기이다.[16] 예명의 유래는 '''뉴스타 넘버원''' 이라는 뜻이다. 즉, 새로운 최고의 스타. 또한 영화계에서 '''신성'''한 '''일'''인자가 되어라 라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있다.[17]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마지막 공식석상 사진 혹은 前 닌텐도 CEO로 담관암으로 타계한 이와타 사토루의 타계 한 달 전에 찍은 사진만 봐도 그렇다. 그리고 평소 근육질이었던 '블랙 팬서' 채드윅 보스먼 또한 사망 몇 달 전부터 급격히 수척해졌다.[18] 당시 미남배우 대표 주자 3인방 중 하나인데, 김진규, 신영균, 최무룡, 남궁원 등의 중년 신사같은 분위기였던 당시의 남자배우들과는 다르게 시원시원한 외모와 긴 기럭지, 강렬한 눈빛으로 대표되는 반항아 이미지에서 나오는 젊은 청년 이미지로 독보적인 스타가 되었다. 맨발의 청춘때 했던 스포츠 머리와 자켓, 청바지 차림은 당시 신성일 때문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었다고 한다. 스포츠 머리와 청바지 차림을 하고 신성일의 반항적인 눈빛과 힘이 들어간 멋들어진 대사를 흉내내는 청년들이 넘쳐났었다고.[19] 막장 여성 편력도 들롱과 꼭 닮았고 뻔뻔스러운 건 우연이다. 나이도 두 살 차이밖에 안 난다.[20] 어마아마한 금액이다. 65년 기준 당시 50만원을 2020년물가로 환산하면 2000만원 정도인데, 나라가 가난하던 때라 실제 가치는 더 컸다. 당시 서울에서 마당 있는 단독주택 한 채 값이 300만 원이 안 되었다. 스키 한 세트가 150만 원으로 서울 4대문 밖 집 한 채 값이던 시절이니, 그의 연간 수입은 대략 지금 돈으로 100억원 이상 가치였다. 금융실명제도 없고 현금 거래하던 때라 세금도 거의 안 냈다.[21] 사실 이 후시녹음 시대에 그보다 더한 수혜자는 바로 그의 부인 엄앵란이다. 엄앵란 성대모사를 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목소리가 과하게 올라가는 톤. 노년에도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 단역으로 나왔으나, 이내 활동을 길게 하지 않고 접었다.[22]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동시 녹음이 어렵기도 했고, 후시 녹음을 하면 대사 연기에 그만큼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23] 그 후엔 이정구가 맡기도 했다.[24] 당시는 영화배우, TV배우가 꽤 심하게 나뉘어 있을 때였다. 일단 TV배우(탤런트)는 각 방송사 직원인 전속이어서 영화에 나갈 때는 회사 허락을 받아야 했었다. 거기다 신성일급 배우는 이미 1년에 수십편을 출연할 정도로 스케쥴이 꽉 차 있기도 했다. TV는 스튜디오는 동시 녹음, 현장촬영은 후시녹음 (더빙) 방송이 아니었던 점도 있었다. 심지어 초창기에는 생방송도 많았다. 거기에 생각보다 돈을 못 모았다고 해도 굳이 TV방송에 출연할정도로 경제 사정이 나빴던것도 아니었다.[25] 그런 영화 중에 백일섭 등과 함께 나온 액션 영화 <49재>가 있다.[26] 이미 그 여성과의 연애사는 유명한 일이었고, 자서전 이전에 지승호와의 인터뷰집에서도 밝힌 바가 있다. 문제는 자서전 출간 이후 그 부분을 세일즈 포인트로 정하면서 이미 사람들에게 잊혀진 일을 다시 들춰내 화제거리로 만든 것이다.[27] 신감독은 본부인인 최은희를 놔두고 다른 배우 오수미와 바람을 피워 아이를 둘 낳았다. 본부인인 최은희와는 '''북한에 가서 재결합'''. 오수미는 신감독이 미국에 있던 기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신상옥의 회고록에는 바람 피운 이야기는 없는 대신 구구절절히 본부인에 대한 사과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 경우는 본부인인 최은희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한 경우였기 때문에, 어른들 세대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라는 생각도 있는데 그게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뿐이고 당시에도 큰 스캔들이고 신상옥은 욕을 정말 많이 먹었다. 최은희가 불임이고 아이들이 입양되었단 사실은 납북 이후에야 세간에 공개된 일로 당시에는 친자식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 이후 한국 정부가 축첩문화를 일소하기 위해 애를 써서 도덕적 거부감이 대단히 높아져 있던 때이기도 했다. (물론 사람들의 도덕적 거부감과 현실은 달랐다.)[28] 최은희는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윤간당했다는 추문에 한참 휩싸였다. 공개된 자서전에 의하면 북한군은 아니고 한국군의 높으신 분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한다.[29] 하지만 자기 남편에게는 보살일지 몰라도 저런 식의 '내가 이렇게 당했으니까 요즘 여자들도 그래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억지 논리일 뿐이다. 배우였던 엄앵란마저 여자는 참고 살아야 한다는 당시 여성들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것.[30]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31] 용산구, 마포구.[32] 어머니 엄앵란과 동성제약에서 론칭한 화장품 광고에 동반 출연한 적이 있다.[33] 당시는 모든 수출입을 국가에서 통제했기에 현재처럼 관세만 내면 수입 금지 품목을 제외하면 누구든 수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돈이 있어도 관에 연줄이 없으면 못 샀다. 당연 국내 대리점 같은 것도 없었으며 차량 한 대 가격도 집 몇 채를 살 큰 돈이었다. 휘발유도 물가 대비 지금보다 몇 배 비쌌다.[34] 이후 육영수 피살 사건에서 대통령 내외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런데 후임자가 이 사건에서 죽은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목숨줄이 연장된 셈이 되었다.[35] 신동아에서 시리즈로 기획한 원로 배우 인터뷰였는데, 여배우에게 저런 무례한 발언이 나온건 신성일밖에 없긴 했다.[36] 실제로 그가 졸업한 (평준화 전의) 경북고등학교는 당대에 대경권은 물론 전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고의 명문 학교였으며, 역대 졸업생들 중에서도 서울대학교 진학자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