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산 전투

 

'''케산 전투'''
Battle of Khe Sanh / Chiến dịch Đường 9 - Khe Sa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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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구정 공세의 일부
'''날짜'''
1968년 1월 21일 ~ 1968년 7월 9일[1]
'''장소'''
꽝찌성 케산 기지
'''교전국'''
[image] 미국
[image] 베트남 공화국
[image] 라오스 왕국
[image] 베트남 민주 공화국
[image]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image] 파테트 라오
'''지휘관'''
[image]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전구사령관)
[image] 레스본 톰킨즈(해병3사단)
[image] 데이비드 라운즈(현지 지휘관)
[image] 보응우옌잡(전구사령관)
[image] 쩐퀴하이(현지 지휘관)
[image] 레꽝다오(정치장교)
'''결과'''
양측 모두 승리 주장[2]
북베트남의 케산 공격 실패
미군의 케산 기지 파괴 및 철수 - 케산 지역은 베트콩이 활동하게 됨.
'''영향'''
맥나마라 라인의 종결[3]
'''병력'''
총 병력 약 45,000명
케산 요새 미 해병대+남베트남군 5,600명
페가수스 작전 동원군 20,000명
기타 기지 인근 고지 전개병력 및 CIDG 민병대.
총 병력 약 35,000명
케산 요새 투입병력 17,200명
'''피해규모[4]'''
미 해병대, 남베트남군, CIDG 민병대 합계
전사 약 3,000명[5]
부상 9,000명
미군 추측
전사 10,000~15,000명
실제 시신확인
1,602구
MACV 기밀 보고서
전사 5,500명
북베트남측 자료
케산 요새 공격병력 2,469명 전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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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초전
3. 전개
3.1. 미군의 물량전
3.2. 악전고투
4. 종결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68년 들어서서 존슨 대통령은 말하곤했죠, "무슨 일이 있어도 디엔비엔푸 꼴은 나지 않겠어." 그래서 전력을 집중한 덕분에 케산 자체는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켜낸 그 요새를 우리 손으로 밀어 해체하고 그 지역에서 철수했죠. 마치 베트남전 전체를 상징하는 소우주 (microcosm)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미군 전역자 & 전직 정치인 Max Cleland, 켄번즈 10부작 다큐멘터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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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산 기지의 전경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에 벌어진 포위전으로, 시작 자체는 구정 공세보다 일렀다. 디엔비엔푸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프랑스군의 요새였던 케산(Khe Sahn)은 인구밀도가 낮은 해발고도 450m 가량의 고지대로 남베트남 지역의 최상단에 위치한 곳이다. 북베트남과의 접경 DMZ 및 라오스 국경과 매우 근접한 최전방 지역이었다. 케산의 험한 지대 덕에 라오스 국경-케산-꽝찌를 통하는 9번 국도가 사실상 유일한 연결 도로였으며, 캠프 캐롤이 설치된 동하 지역으로부터 63km가 떨어져 있었다. 지역 자체가 매우 험하고 인적이 드물며, 툭하면 안개가 끼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기에 대규모 군대가 매복하기에 매우 이상적인 지역이었다.
미 해병대와 남베트남군은 이 케산에 1962년부터 기지를 구축하고 주둔하고 있었다. 이 케산을 '''미군이 아니라 북베트남군이''' 포위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즉 케산에 주둔한 미국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을[7] 월맹 정규군 2개 사단이 포위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애초에 동원된 월맹군 부대부터가 14년 전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했던 사단이었다. 그리고 디엔비엔푸 당시 베트민을 지휘했던 보응우옌잡 북베트남 국방 장관이 이 케산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설레발이 서방 기자단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디엔비엔푸와 상황이 유사했다. 지압은 이에 대해 "우리는 야전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참가설을 일축했다.

2. 전초전


충돌 자체는 1967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동년 2월부터 기지 주변에서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늘어난다는 보고가 접수되었고 이 때부터 북베트남군이 기지 인근 일부 고지를 점령한 채 간헐적으로 비행장에 대한 박격포 공격이나 저격을 가해오곤 하여 미군의 신경이 매우 곤두서 있었다. 미군은 이 북베트남군을 처리하기 위해 4월부터 5월 초까지 케산 인근의 북베트남군이 장악하고 있던 861, 861-알파 고지와 881S/N고지에 대한 공격작전을 실시하여 점령하였고 북베트남군 610명 가량을 사살하였으나 미군 역시 157명의 전사자를 기록하였다. 5월 중순부터는 미 해병대는 방어태세를 확실히 더 굳히기 위해 크로켓 작전을 실시하여 점령한 고지의 방어태세를 더 강화하고 기지 인근 4.2km까지 수색 및 제압영역을 확대시켰다. 교전이 이어지면서 미 해병대는 52명이 전사하였고, 북베트남군은 200명 가량이 전사하였다. 1967년 7월에 크로켓 작전이 종료할 때쯤에는 북베트남군과의 접촉이 소강상태가 되며 어느 정도 기지 주변 평정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미군 내부에서 나왔다.

1968년에 접어들며 다시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월부터 다시 산발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1월 20일, 한 북베트남군 중위가 미 해병대 전초기지에 항복해 오면서 오늘 밤에 대규모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털어놓았고 실제로 20일 밤에 대대 규모의 북베트남군이 공격해왔으나, 미 해병대가 격퇴하였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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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위 전개도
1월 21일 새벽, 북베트남군의 케산 기지에 대한 전면 포격이 시작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기지 동쪽의 탄약고가 피격되어 박살나버렸다. 케산 기지 인근의 케산 마을 역시 북베트남군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얼마 못 가 점령되었다. 1월 30일에 마침내 구정 공세가 시작되어 남베트남 전역이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여전히 케산 근처에 전개된 북베트남군은 지속적으로 근처의 거점들을 점령하고 케산 기지에 포격은 하되 기지에 대한 전면공세에는 돌입하지 않은 상태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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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 베이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여기를 참조
북베트남군은 1968년 2월 7일 새벽, 11대의 PT-76을 앞세워 케산으로부터 9km가량 떨어진 특수부대 기지 '랑베이(Lang Vei)'를 공격하는 것으로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린베레, 라오스군, 몽족 CIDG 민병대, 남베트남군으로 구성된 랑베이 기지의 병력들은 맹렬히 응전하였고 대전차조를 조직하여 M72 LAWM40 무반동포PT-76 3대[9]를 격파하였지만, 결국 북베트남군의 물량공세에 밀려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고 소수의 인원만 케산으로 탈출하였다.[10] 이렇게 초반 전개는 북베트남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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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베이 기지를 제압하여 측방위협을 제거한 후 2월 8일 새벽 4시, 북베트남군은 1개 대대병력으로 미 해병대 중대기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공세를 펼쳤다. 급습에 당황한 미 해병대는 전초기지를 빼앗기고 소대장이 전사하는 불운이 겹쳤지만 이윽고 전열을 가다듬어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아가며 반격에 나섰다. 최루가스 살포, 육박전까지 불사해가며 싸운 결과 미 해병대는 아침이 될 때까지 북베트남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11]
이후 북베트남은 전략을 수정하여 무작정 돌격보다는 참호전을 통한 장기 공략을 시도하였다. 이는 디엔비엔푸 전투 때와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적의 최정예부대를 결정적 전투를 통해 꺾음으로써 미국의 전쟁수행의지를 잃게 만들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상대는 남들이 쓰다 버린 공여물자로 전쟁을 하던 어설픈 프랑스군이 아니라 쇼미더머니의 미군이었다.'''

3.1. 미군의 물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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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케산 기지 내의 자체 포병전력과 근처 '캠프 캐롤'의 포병화력, 그리고 다낭, 냐짱, 떤선녓(현 떤선녓 국제공항), , 항공모함 등 각지에서 이륙한 항공기들의 공중지원 등을 위시한 나이아가라 작전을 통해, 말 그대로 '''폭탄을 나이아가라 폭포수 처럼 쏟아부어서 월맹군을 화력으로 압도해 버렸다.''' 이 기간 동안 쏟아부은 폭탄의 양이 12만톤이었다. 좁은 케산 인근에 이렇게 많은 양의 폭탄이 떨어진 결과, 기지 주변 2마일 반경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되어버렸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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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정을 하고 덤비는 북베트남군도 만만치 않았다. NVA 보병들은 저 엄청난 폭격을 뒤집어쓰고 많은 사상자를 내가면서도 '''미군 진지 코 앞까지 참호를 파고 들어오는''' 근성을 보였다.[13] 그리고 위의 미군의 화력에 비해 묻힌 감이 있지만, 당시 북베트남군도 상당한 포병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하루종일 케산 기지를 두들겨댔다. 공세 기간 중 월맹군이 발사한 포탄과 로켓탄은 10,900발에 이른다.[14] 이 포대들은 디엔비엔푸에서처럼 땅굴을 파서 분산 배치한 후, 몇 발 쏘고 숨는 전법을 발휘했기 때문에 육안으로 관측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미군은 이걸 잡으려고 진동을 감지하는 센서를 사방에 뿌려서 포대의 위치를 찾아내는 이글루 화이트 작전을 펼쳤다. 이 센서는 본래 석유 시추기술에서 비롯된 것으로, 포사격으로 인해 땅이 울릴 때 센서에 내장된 내진 감지기가 작동해서 무선으로 중앙에 신호를 보내고 이를 데이터화한 후, 센서들의 신호를 삼각측량하여 적 포병대의 좌표를 알아내는 원리였다. 1960년대 당시로선 그야말로 오버 테크놀로지라고 불러도 되는 수준이었다. 대신 센서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비쌌고[15], 군용치곤 내구성이 좋지 못해서 한번 살포시 20% 정도는 망가졌다. 내장배터리도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30일정도 밖에 못 갔다. 게다가 북베트남군도 바보가 아니어서 이걸 발견하면 부수거나 미군이 있는 곳으로 옮겨서 팀킬을 유도했다. 이렇게 여기저기 허점투성이인 장비였으나, 돈이 많았던 미군은 '''이걸 밭에 비료 주듯 마구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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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방어진지를 대충 구축했다가 큰 피해를 본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과 달리, 미군은 기지 전체를 활주로 건설용 플레이트와 모래포대로 만든 방공호로 도배를 해버렸다. 그래서 북베트남군은 어지간한 포격으로는 미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없었다.[16] 그리고 디엔비엔푸는 제일 가까운 보급기지가 무려 200km나 떨어져 있을 정도로 고립 상태였지만, 미군은 수십 km 이내에 다른 기지들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군이 주변 고지대의 중요성을 경시하였다가 빼앗긴 것에 반해 미 해병대는 상술했듯이 전초전 당시 케산 기지 주변의 881/861 고지를 이미 정리하였고, 포위기간 내내 이곳을 끝까지 틀어쥐고 있었다. 북베트남군도 고지의 중요성을 알아서 공세기간 내내 고지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였으나 모두 저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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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 기지는 하루에 최소 120톤 이상의 물자를 필요로 해서, 북베트남은 일단 포위만 하면 미군을 말려죽일 수 있을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미군은 '''하루 평균 300회'''의 공중보급으로 이를 유지시켰다. 북베트남군은 37mm 대공포를 사방에 설치해서 응전했으나, 미 항공 전력을 상대하기엔 빈약했다. 안개와 대공포화 때문에 낙하산 공수를 통한 보급이 어렵긴 했지만 케산 기지 내 지상관제 레이더의 도움을 받아 상당수를 회수할 수 있었다. 그나마 전개됐던 북베트남군의 대공포들도 거의 대부분 미군의 폭격에 박살나 버렸다.[17] 프랑스군이 167일의 포위 기간 동안 10400소티의 지원을 했던 대 비해 미군은 '''하루에만 2500소티'''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래서 북베트남군 대공포들은 상대적으로 느린 헬리콥터나 수송기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미군이 아예 수송대에 전폭기들을 호위로 붙여서, 북베트남군이 '있을 것 같은 곳'에는 무조건 '''네이팜과 항공폭탄, 최루가스를 도배해버리는 전술'''로 대응하여 북베트남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결과적으로 미군은 헬리콥터만 무려 9100소티 이상을 운영해내는 저력을 보였다.

3.2. 악전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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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돈 많은 미군이라곤 해도, 최전선의 보병들은 열악한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 케산 지역은 비가 자주 와서 방공호는 습기를 잔뜩 머금어 축축했고, 물은 심하면 하루에 반컵 정도만 배급되었기 때문에 목욕은 고사하고 면도조차 할 수 없었다. 빨래는 가끔씩 빗물을 받은 드럼통에 대충 헹구는 걸로 해결하는 등 위생은 개판 5분전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나온 건지 참호에는 쥐들이 들끓었으며, 시체를 갉아먹거나 자는 사람도 물어뜯어서 권총으로 쥐를 잡는 보직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더구나 케산은 고지대라서 은근히 추웠는데 미군 대부분은 야상 같은 건 보급 받지 못해서 판초우의만 입고 버텨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북베트남군의 포격 때문에 미 해병대는 방공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부상병들도 심각한 중상이 아니면 치료 후 다시 원대복귀를 시켰고, 중상자들도 후방으로 후송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참호전을 방불케 하는 이런 전장에서 미 해병대는 PTSD 환자가 급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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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항공 보급도 상당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초기엔 수송기가 비행장에 착륙한 후 화물을 하역시켰으나 북베트남군이 수송기의 이착륙 때를 노려 공격을 해댄 대다가, 포격 덕에 활주로에는 온갖 위험한 잔해들이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활주로를 달리는 상태에서 화물을 내던지고 다시 이륙하는 걸로 바뀌었다.[18] 그리고 이마저도 피해가 커지자 아예 공중 투하로 변경되거나 심지어 보급이 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물론 북베트남군의 대공화력이 미 항공세력을 저지하기에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툭하면 안개가 끼던 당시 케산의 상황상 수송기들도 전폭기들의 호위 없이 무리하게 접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실제로 C-130 수송기들의 손실이 누적되자 2월 12일자로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2주간 C-123으로 대체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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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꼴의 미군들은 화물이 내려지거나 북베트남군의 근접 포격으로 활주로가 손상될 때마다 벙커나 진지에서 튀어나와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날아오기 전에 부리나케 일을 끝마쳐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군의 포격에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미군 병사들도 상당했다. 게다가 유사시를 위해 배치된 헬리콥터 상당수도 파괴되었으며 공세 초기 미군의 탄약고가 포탄에 피격되어 1,500톤중 1,100톤의 탄약을 잃어버리기까지 하였다. 특히 유일한 지상 보급로인 9번 도로는 진작에 북베트남군에 의해 차단되었기 때문에 미군 입장에선 기지를 사수하기 위해선 항공보급은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치트키를 친 미군이라서 저정도였지, 가진 건 사람밖에 없었던 북베트남군의 상황은 말그대로 생지옥이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했던 북베트남군의 베테랑 장교와 병사들도 그때보다 더 지독하다고 할 정도로 이들의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된 방공호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던 미군들에 비해 북베트남군 병사들은 대충 판 참호 속에서 저 엄청난 폭격을 맞고 계속 죽어나갔다.[19] 그래서 북베트남군 역시 PTSD에 걸린 병사들이 많았으며 이 당시 참전했던 북베트남 노병들은 하나같이 미군의 폭격에 대해 치를 떨었다.
양측의 상황이 이렇게 개판이다보니, 나중에는 양측이 오히려 전투를 기피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북베트남 측은 포격뿐만 아니라 저격수들을 배치하여 눈에 띄는 미군들을 사살하는 전법을 썼고, 미군은 역저격을 하거나 아예 무반동포를 이용한 정밀 포격으로 대응했다. 물론 저격수를 사살해도 그 자리는 금방 다른 저격수가 배치되어서 다시 미군을 공격하는, 끝도 없이 반복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런 와중에 어느 미 해병대 병사가 일주일 동안 자신의 진지 쪽에 배치된 저격수의 행동을 살펴본 결과, 이 저격수가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에다 반복해서 사격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 병사는 저 저격수가 사람을 쏘는 순간 곧바로 역저격이나 포탄에 죽을 게 뻔하니 일부러 오조준을 하는거라 추론하고 이를 지휘관에게 알렸는데, 이 지휘관도 '저 착한 저격수를 죽여버리면 다른 놈이 배치돼서 우릴 쏠 테니 그냥 살려 두는 게 좋겠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일부러 오조준을 하는 저격수에겐 아예 대응사격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제대로 쐈다'는 의미로 깃발로 신호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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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어떻게든 케산이 '제2의 디엔비엔푸'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백악관 상황실에 케산 기지의 모형판을 가져다 두고 매일마다 전황을 체크했다. 하지만 구정 공세 내내 최후방이었던 미 대사관까지 공격당하는 등 남베트남 전역이 개판 상황이어서 구출 작전은 계속 지연되었다.

4.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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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손실도 적지는 않았지만 북베트남이 이렇게 악을 써도 미군의 방어선은 뚫리지 않았다. 게다가 1월 30일~2월 말까지 안개가 지속적으로 끼어 미군 항공작전의 효율이 매우 떨어졌지만 3월부터 날씨가 풀리면서 항공작전의 효율이 크게 올라가고, 기지와 항공기에 설치된 레이더를 이용한 근접항공지원의 정밀유도가 가능해지면서 북베트남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어 손실은 막대해졌고 나중에는 공세여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4월 1일부터는 미군이 1기병사단을 앞세워 케산 구원 계획인 '''페가수스''' 작전을 실행하였다. 그래서 결국 북베트남군 지휘부는 피해가 너무 크며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는 4월 15일부로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그렇게 미군은 77일의 포위를 버티어냈고 구원받았다. 참고로 미군의 구원병력이 당도 했을때는 이미 북베트남군이 완전히 철수해버렸기 때문에 1기병사단은 별 다른 전투 한번 없이 케산기지까지 당도하였다. 물론 그 기간에도 케산 기지 및 기지 인근에서는 여전히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4월 1일부터 페가수스 작전이 종료되는 시점인 15일까지 연합군은 미군 93명, 남베트남 33명의 전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미군은 수많은 피를 흘려가며 지켜낸 케산 기지를 해체해버리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근처 수킬로미터 뒤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북베트남 포병의 사정권밖이었다. 이후 케산 지역은 베트콩과 북베트남 세력이 통제하는 지역이 됐다. 결국 미국이 구상한 '''맥나마라 라인'''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20]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케산 전투를 '미합중국의 승리'라며 선전 했지만, 미국인들은 정부가 외치는 승리라는 말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심은 오히려 "'''도대체 왜 미국의 아들들이 저 이역만리의 이름 없는 고지를 지키기 위해 죽어야 하느냐?'''"라며 반전여론이 더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21] 매스 미디어의 발달과 집집마다 보급된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전쟁의 더러운 모습들은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징집 연령층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 마약과 히피문화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파월미군들의 사기는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기도 싫은 곳에 강제로 끌려왔으니 군기는 개판이었고, 프래깅과 탈영이 성행했으며, 1년 가량의 의무복무 기간을 마치면 전역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돌아온 고향에서도 '살인마', '베이비킬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야만 했다. 거기다 PTSD를 극복하지 못한 수십만 명의 전역군인들은 노숙자나 폐인, 범죄자로 전락했고, 미국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북베트남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미국의 전쟁수행 의지를 꺾는 데 성공하였다.

5. 대중매체에서



[1] 실질적인 북베트남군의 공세 종료는 4월 15일. 그 이후로는 추격전 및 소탕전의 양상.[2] 결과적으로는 미군의 전술적 승리, 북베트남의 전략적 승리이다. 북베트남은 직접적으로 케산 공략에 실패하였으므로 전술적 목표 달성을 실패한 것이지만, 이후 미군이 맥나마라 라인을 포기하고 케산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나게 만들었고, 더불어 미국 내의 반전 여론을 일으킨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전략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3] DMZ 아래로 남중국해에서 라오스 국경까지 선형으로 구축된 방어선. 단순히 진지와 요새 뿐만 아니라 열감지 센서 등 침투를 감시하기 위한 첨단 장비까지 배치되어 있었다.[4] 양측 모두 케산 전투 직전의 고지 전초전부터 페가수스 작전으로 인한 케산 전투의 완전한 종결까지 손실을 모두 합한 것이다.[5] 이 중 미군이 약 1,500명. 케산 요새 내에서의 전사자는 274명[6] 즉 기지 인근 고지전이나 페가수스 작전을 제외한 순수 케산 요새 공격 병력의 손실수치.[7] 약 6000명의 병력으로 미군 해병 연대에 남베트남군이 보강된 부대였다.[8] 다만 앞서 미군이 1967년에 점령했던 케산 기지 근처의 고지에는 이 1월부터 북베트남군이 지속적으로 공격해오고 있었다. 본 문서에서는 서술이 생략되었으나 사실 이들 고지에서 펼쳐진 전투들도 백병전이 펼쳐질 정도로 대단히 격렬했다. 미군이 모두 힘겹게나마 방어에 성공하여 북베트남군은 감제고지 장악에 실패하였다.[9] 절반 이상을 격파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 PT-76전차의 투입사실은 이미 며칠 전에도 도착해 온 라오스군에 의해 보고되었고 이날 특수부대 역시 상부에 "전차가 쳐들어왔다"고 있는 그대로 보고하였으나, 특수부대를 은근 깔보는 경향이 강했던 정규군은 "베트콩놈들한테 전차가 어딨냐, 너네가 헛것을 본거다"라며 무시해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미군 항공기들이 찍은 사진과 격파 보고가 올라오면서 전차가 투입되었다는게 사실로 밝혀졌다.[10] 그린베레는 24명 중 14명, 남베트남군 특수부대는 14명중 9명이 살아남아 탈출했다. 탈출한 잔존병의 숫자는 총 250명 가량.[11] 이때 전황이 워낙 급박해서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뒤섞인 참호에 포격이 떨어지는 데인저 클로즈 상황도 일어나 양측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같은 파편에 맞아도 방서모와 군복만 입은 북베트남군은 끔살을 당했던 것에 비해, 방탄모와 방탄복을 착용한 미군들은 부상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라서 생존률이 월등히 높았다. 참고로 북베트남군은 소련제 철모도 보급했지만 보병보다는 포병들이 이용하였다.[12] 상상이 안된다면 비교용으로,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 동안 루프트바페가 영국 전역에 퍼부은 폭탄이 12만톤이었다.[13] 특히 일부 북베트남군은 미군 방어선 가까이 다가와 박격포를 쏴댔는데, 이는 상대 측과 가까이 붙으면 상대는 포격과 폭격 요청을 쉽게 내릴 수 없는 데인저 클로즈를 염두에 두고 한 행위였다. 미군은 참호가 너무 가까워지자 특공대를 투입하여 각개 격파하려 했으나, 북베트남 포병대가 계속 방해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중지하였다.[14] 애초에 월맹 수뇌부가 재현하려고 했던 그 디엔비엔푸도 포병으로 이겼던 전투였다. 미군 측에서도 베트남전 당시 종종 빠르게 배치와 방열을 하고 포격을 가한 다음 다시 신속하게 사라지는 월맹 측 포병 전력을 위험하고 숙련된 전력으로 고평가했다.[15] 제일 싼 공중투하용은 600달러, 사람이 짊어지고 가서 설치하는건 2,000달러가 넘었다. 참고로 당시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 부사관의 월급이 500달러를 넘지 않던 시절이다.[16] 물론 북베트남군에게도 이런 벙커를 파괴할 수 있는 대구경 야포나 로켓이 있었으나, 그 수가 적었고 명중률도 낮았다.[17] 디엔비엔푸 전투에서는 비슷한 화력을 가지고도 프랑스군의 SBD 돈틀리스베어캣을 상대로 선전하였으나 미군은 프랑스군과 달리 항공기들이 숫자도 훨씬 많았고 제트 전투기의 호위까지 겹쳤기 때문에 미군 항공전력을 저지하기란 북베트남군으로선 사실상 불가능했다.[18] 현대의 미군이 사용하는 저공 낙하산 사출법이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태어났다고 한다.[19] 전투 직후 후방으로 돌려진 북베트남군 사단들 중에는 사상률이 '''80%'''나 되는 부대도 있었다. 저 정도면 재충원이고 뭐고 그냥 부대가 사라진 수준.(...)[20] 전사가들은 미군의 이러한 결정이 북베트남 정규군의 마찰을 피하려는 작전반경 축소와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한 예비 단계였다고 보고 있다.[21] 1968년까지만 해도 미국 여론은 베트남전에 대해 말이 많기는 했지만, 주전파도 어느 정도 입지가 있었다. 하지만 구정 공세를 계기로 반전파가 압도적인 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