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인렬황후 양씨

 


'''남송의 황후
恭聖仁烈皇后 | 공성인렬황후
'''
'''시호'''
공성인렬황후(恭聖仁烈皇后)
''''''
양(楊)
''''''
계지(桂枝)
'''출생'''
1162년
'''사망'''
1232년
'''재위'''
남송의 황후
1202년 ~ 1224년
남송의 황태후
1224년 ~ 1232년
'''배우자'''
영종(寧宗)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영종의 황후
2.3. 이종의 황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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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송시대의 황후로, 13대 황제였던 영종(寧宗)의 황후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이름은 계지(桂枝)로 1162년에 태어났다. 양계지는 출신지나 가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어린 시절에 어디에서 살았는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회계 출신으로 칭하였고, 양차산(楊次山)의 여동생이라고 말하였다.

2.2. 영종의 황후


양계지는 1195년에 영종의 후궁이 되어 평락군부인으로 책봉되고, 1197년에 첩여로 진봉되었다. 1199년에는 완의가 되고, 이후 귀비가 되었다. 1200년에 영종의 황후였던 공숙황후 한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공숙황후가 세상을 떠날 당시 영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은 미인 조씨(曹氏)와 귀비 양계지였다. 영종의 권신이었던 외척 한탁주는 유순한 성품의 조씨를 황후로 추천했지만, 영종은 미모와 지혜가 뛰어나고 사서에 통달했던 양계지를 1202년에 황후로 책봉하였다. 양계지는 이로 인해 한탁주를 미워하게 되었다.
당시 한탁주는 경원의 당금을 일으켜 권신의 지위를 굳혀나갔지만, 헌성자열황후 오씨와 공숙황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송 조정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초조해진 한탁주는 결국 개희 연간에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감행하였지만, 북벌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북벌 실패를 계기로 한탁주와 사이가 안 좋았던 양계지는 자신의 오빠인 양차산, 예부시랑 사미원과 힘을 합쳐 1207년에 한탁주를 제거한다. 한탁주의 죽음으로 남송과 금나라는 평화협상을 체결하였고, 사미원이 남송 권력의 중심으로 군림한다.
양계지는 영종과의 사이에서 영충영왕(郢沖英王) 조증(趙增)과 화충목왕(華沖穆王) 조경(趙坰)을 낳았으나, 모두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요절하였다.

2.3. 이종의 황태후


1224년에 영종이 병으로 눕게되자, 남송은 영종의 후계 문제를 겪고 있었다. 본래 영종은 황후와 후궁들 사이에서 9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영종의 아들들이 모두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탓에 후사가 없었다. 영종은 태조의 후손 중에서 자식들을 선발하여, 진강혜왕 조덕방의 9대손인 조횡(趙竑)을 후사로 선발하였는데, 조횡은 송나라의 재상이었던 사미원과 사이가 안 좋았다. 사미원은 따로 태조의 장남인 연의왕 조덕소의 후손인 조윤(趙昀)을 황자로 책봉하였다. 영종이 병으로 누운 상황에서 사미원과 양계지는 조횡 대신 조윤을 영종의 후사로 세우고, 영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조윤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니, 조윤이 바로 남송의 제6대 황제이자, 조송의 15대 황제가 되는 이종(理宗)이었다.
이종이 즉위하면서 양계지는 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하였다. 양계지는 1226년에 수명황태후(壽明皇太后)의 존호를 받았고, 1228년에는 수명자예황태후(壽明慈睿皇太后), 1231년에는 수명인복자예황태후(壽明仁福慈睿皇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다. 양계지는 자신의 책봉에 공을 세웠던 사심보(謝深甫)에게 진 은혜를 갚고자, 이종의 황후로 사심보의 손녀인 사도청을 추천하였고, 사도청은 1227년에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양계지는 1232년에 자명전에서 세상을 떠나, 공성인렬황후(恭聖仁烈皇后)로 추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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