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성자열황후 오씨

 


'''남송의 황후
憲聖慈烈皇后 | 헌성자열황후
'''
'''시호'''
헌성자열황후(憲聖慈烈皇后)
''''''
오(吳)
'''출생'''
1114년
'''사망'''
1197년
'''재위'''
'''남송의 황후'''
1143년 ~ 1162년
'''남송의 태상황후'''
1162년 ~ 1187년
'''남송의 황태후'''
1187년 ~ 1194년
'''남송의 태황태후'''
1194년 ~ 1197년
'''배우자'''
고종(高宗)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고종의 황후
2.3. 효종 시기
2.4. 광종 시기
2.5. 영종 시기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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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송의 황후로, 남송의 초대 황제이자 조송의 제10대 황제인 송고종의 2번째 황후이다. 남송의 황후로서는 특이하게 고종, 효종, 광종, 영종 4대까지 생존하여 13대 황제인 영종의 법적인 증조할머니가 되었으며, 황후, 태상황후, 황태후, 태황태후를 모두 경험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114년 오근(吳近)의 딸로 개봉부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 북송 외부에서는 1125년 요나라가 북송과 금나라의 협공으로 무너졌고, 휘종흠종이 금나라와의 약조를 어기면서, 개봉이 함락당하고 두 황제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씨는 14살에 선발되어 입궁하고 당시 강왕이었던 조구의 시녀가 되었으며, 이후 재인을 거쳐 귀비로 책봉되었다.

2.2. 고종의 황후


1127년, 강왕 조구가 강남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송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나갔다. 바로 조송의 제10대 황제이자 남송의 초대 황제인 고종의 치세가 시작된 것이다. 오씨는 고종을 따라 금나라에 쫓기는 상황을 계속 겪었다. 그러다가 금나라와의 강화협정이 겨우 체결되었다. 1142년 고종의 모후였던 현인황후 위씨가 고종의 첫번째 황후였던 헌절황후 형씨[1]가 1139년에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남송으로 돌아오면서, 중궁이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조정에서는 고종에게 대신들이 황후 책봉을 청하였고, 고종의 모후인 현인황후 위씨 역시 오씨를 추천하였다. 결국 1143년, 고종은 귀비였던 오씨를 황후로 정식 책봉하면서 오씨는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고종은 아들을 낳을 수 없었고 더불어 1129년에 묘부와 유정언의 쿠데타로 강제 퇴위되었다가 복위하면서 유일한 아들인 원의태자 조부를 잃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태종의 후손들도 정강의 변으로 끌려가는 등 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고종은 종실 중에서 태조의 자손을 양자로 삼아 제위를 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태조의 차남인 조덕방의 6세손 조백종(趙伯琮)을 조신으로 개명시키고 양자로 삼았고, 조백구(趙伯玖)도 양자로 삼고 조거로 개명시켰다. 고종의 황후인 오씨는 고종의 양자들을 자신의 자식들처럼 길렀고, 이 중 조신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는데, 조신이 바로 남송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조송의 제11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2대 황제인 효종이 된다.

2.3. 효종 시기


1162년 고종이 조신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면서, 오씨 또한 태상황후가 되어 덕수궁으로 옮겨 살았다. 이때 효종에게서 수성태상황후(壽聖太上皇后)라는 존호를 받았다. 건도 7년(1171년)에는 수성명자태상황후(壽聖明慈太上皇后)라는 존호를 받았고, 순희 2년(1175년)에 수성제명광자태상황후(壽聖齊明廣慈太上皇后)라는 존호를 받았다. 1185년에는 수성제명광자비덕태상황후(聖壽齊明廣慈備德太上皇后)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순희 14년(1187년)에는 태상황이던 고종이 세상을 떠나 오씨는 저절로 황태후가 되었다. 이때 효종은 오씨에게 덕수궁을 떠나 대내로 돌아오도록 했지만 오씨는 덕수궁을 떠나지 못해, 자신의 침전을 자복전으로 부르고 그곳에 거처하였다.

2.4. 광종 시기


순희 16년(1189년), 효종은 황태자인 조돈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씨는 아직 태황태후를 칭하지 않았고, 광종으로부터 수성황태후라는 존호를 받았다. 오씨는 소희 4년(1193년)에 수성융자비복황태후(壽聖隆慈備福皇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다.
광종이 황제로 재위하는 동안, 황후인 자의황후는 광종과 효종 사이를 이간질했고, 광종과 효종은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 결국 효종은 1194년에 세상을 떠났고 오씨는 태황태후가 되어 이 시기에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다. 광종이 자의황후에게 휘둘리고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부친의 상을 주관하지 않자, 대신들은 태황태후인 오씨에게 광종의 폐위를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남송의 재상이었던 조여우한탁주가 후계자 후보로 광종의 조카인 조병을 내세웠는데, 황태후는 광종의 아들인 가왕 조확을 선택하였고, 결국 조확을 황제로 즉위시켰다.

2.5. 영종 시기


1194년 광종이 퇴위하고 가왕 조확이 즉위했다. 바로 조송의 제13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4대 황제인 영종(寧宗)의 치세가 시작된다. 오씨는 가왕의 부인이었던 한씨를 영종의 황후로 책봉시키고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오씨는 광우(光祐)라는 존호가 더해졌다.
1195년 조여우와 한탁주가 대립하면서, 한탁주는 조여우를 쫓아내고 경원의 당금을 일으켰다. 한탁주는 헌성자열황후의 외조카였는데, 광종의 퇴위와 영종의 즉위에 자신의 공적이 컸다고 판단하여 태후와 황후의 권세를 믿고 권력을 휘둘러 경원의 당금을 일으킨 것이었다. 오태후는 한탁주가 일으킨 경원의 당금을 목격하고 1197년에 세상을 떠나 헌성자열황후로 추시되었으며, 고종의 무덤인 영사릉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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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식상으로 그런 것이다. 당시 헌절황후 형씨는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에 인질로 붙잡혀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