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위시대

 

空位時代 / Interregnum.


1. 소개


한 국가에서 정부의 '공백기'를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정식 국왕 내지는 황제의 부재 시기이며, 보통은 내란기 내지는 혼란기이다.
이러한 '공백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실 흔한 일인데,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뤄 새로이 의회를 구성할 경우, 그 사이 기간이 이런 '공백기' 가 된다. 이런 통치의 공백기가 제도화되어있고 행정 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다보니 고대 ~ 중세처럼 이런 공백기에 국정 혼란이 오는 경우도 별로 없다. 예를 들어 벨기에 같은 경우는 총선에서 어느 연정 세력도 과반수를 만들지 못해서 500일 넘게 공백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다소 불편은 있어도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 행정체계 덕분에 정부가 없다고 큰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역사를 보면 이런 시기는 의외로 많은 편이지만, 제일 잘 알려진 공위 시대는 일반적으로 1254년 ~ 1273년의 약 20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없던 시기다. 이 시기는 흔히 '''대공위시대'''라고 부르고 영문으로도 보통 Great Interregnum으로 표기한다.
본 문서에서 소개된 이외의 공위기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영문판 영문위키 참고. 여기에 따르면 교황이 사망하고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의 기간도 공위기에 해당된다.[1]

2. 주나라의 공화(共和)시기



'''호칭'''
공화(共和)
'''정무 관리자'''
주정공(周定公), 소목공(召穆公)
혹은 공백(共伯) 화(和)
'''재임 기간'''
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
기간은 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 사기(史記)에 의하면 중국 주나라 여왕(厲王)이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쫓겨나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천자(天子)를 대신해 함께 정무(政務)를 관리하였다고 하며 이때 공동으로 통치했다고 해서 공화시기라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이와 다른 기록이 있는데 공백(共伯) 화(和)[2]가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간왕(干王)을 칭하고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공백 화에게서 '공화(共和)'가 유래했다고 한다.
대체로 두 사료의 신뢰성에 대해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지만, 오경 계통의 기록을 많이 반영한 <사기>보다 <죽서기년>이 반유가적, 반도덕주의적, 현실주의적 성향이 강하며 '공화' 연간에 대한 태도 또한 '신하들의 공동 통치'에 대해 <죽서기년>의 부정적 시각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후 근대에 들어 공화국(Republic)의 번역어로 이 '공화'가 채택되었으며, 이때의 의미는 공동 통치를 가리킨다.
또한 이 때의 혼란으로 인해 기원전 841년 이전의 기록이 소실되었으며[3], 이로 인해 <사기>에서 연도를 상고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가 바로 기원전 841년이다. 춘추 계통의 문헌 또한 기원전 8세기경이 거슬러 올라가는 한계선이기 때문에, 이 시기 이전의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후대에 연대를 복원하려는 노력도 있었고, <사기> 이전에 개략적으로 (夏), (商), (周)의 연대를 언급한 문헌도 있지만 하나라의 실존 여부 자체가 의문이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연대에 대한 기록이 대개 말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기원전 841년이 현재로서는 확실히 증명된 중국사 거의 최초의 연대 기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3. 랑고바르드 왕국


동로마 제국의 서지중해 재정복 직후 이탈리아 반도로 밀고 들어왔던 랑고바르드 왕국은 건국 후 금방 왕이 없는 '공작들의 통치' 시기를 겪는다. 이들은 568년에 이탈리아에 들어와 왕국을 세웠지만 첫 번째 왕이었던 알보인이 572년에 게피데족 왕비인 로자문드[4]에게 암살당한 뒤 즉위한 두 번째 왕 클레프가 574년에 죽은 후 '''574년부터 584년까지 왕이 없었다.'''
이 시기에 이 '왕 없는 왕국'을 다스린 것은 8명의 공작들이였으며, 이들이 다시 왕을 뽑은 것도 프랑크 왕국이 이탈리아를 위협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당시 랑고바르드 왕국은 본질적으로 8명의 영주들의 연합체로써 매우 분권적인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즉 평시에는 지방 세력들의 연합체로 느슨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가 강력한 외침 등 비상 사태가 도래하자 위기 극복을 위해 통일된 리더십을 발휘할 지도자로서 왕을 선출한 것이다.

4.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후 뒤를 이어받았던 루도비쿠스 1세가 죽은 직후 일어났던 세 자식들의 막장 내전 시기. 840년 ~ 843년.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세 자식들이 프랑크 왕국을 3조각내서 첫째 로타르가 중프랑크 왕국, 셋째 루트비히가 동프랑크 왕국, 막내 샤를이 서프랑크 왕국을 나눠가졌다. 855년 프륌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이 로타링기아,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으로 분할되었고,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는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게 분할되었다.

5. 신성 로마 제국대공위시대




6. 오스만 베이국


바예지트 1세티무르에게 개박살이 난 이후 약 10년을 '오스만 공위시대' 라고 한다. 1402년 ~1413년.
결국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인 메흐메트 1세가 나머지 형제들을 다 죽여버리고 술탄직에 올랐다.[5] 자세한 내막은 오스만 제국/역사 문서 참조.
오스만 베이국의 팽창을 저지할 절호의 기회였다고 할 수 있으나 서유럽은 이 시기 동안 오스만을 공격한다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먼저 저 튀르크족이 한방에 주저앉았다는 데 충격을 받았기 때문. 즉 '튀르크도 저렇게 쎈데 몽골은 대체 얼마나 세다는 거야...?!' 라는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때문에 티무르가 앙카라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초토화하자 공포에 빠진 오스만군 패잔병들이 살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도망쳐왔는데 해협을 오가는 유럽인 상선들은 해협 건너편으로 도망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에 "같은 무서운 놈이라도 아는 놈이 모르는 놈보다 그나마 낫다"는 생각에 오스만군을 해협 건너편으로 태워다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튀르크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었어도 티무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기 때문. 즉 유럽의 입장에서 '얘나 쟤나 강력한 이교도라는 점에서는 똑같다면, 잘 모르는 이교도보다는 잘 아는 이교도가 그래도 낫다' 였던 것이다.

7. 루스 차르국



[1] 사실 충분히 말이 되는 것이, 오늘날에도 교황은 바티칸 시국이라는 국가의 원수일뿐더러 과거에는 교황령이라는 국가의 군주였기 때문이다.[2] 공(共)나라의 백작 화(和).[3]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대거 소실되었다.[4] 게피데족은 지금의 루마니아 근처에 정착한 동게르만계 부족이었으나 랑고바르드족과 아바르족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죽은 게피데족의 왕 쿠니문드의 해골은 알보인의 술잔이 되었고 알보인은 쿠니문드의 딸인 로자문드를 아내로 취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로자문드가 알보인을 암살한 것.[5] 이후 재위 기간은 1413 ~ 1421년이지만, 1402년부터 술탄으로 재위한 거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인데, 먼저 무슨 생각이었던지 티무르가 메흐메트를 술탄으로 봉했던 사실이 있다. 게다가 내전 동안 네 명의 형제들은 제각기 주화를 발행했는데, 거기에 '술탄' 이라는 칭호를 박아넣었던 사람은 메흐메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