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

 

1. 일반적인 의미
2. 정욱의 아들
2.1. 미디어 믹스
3. 정태의 아들
4. 백제의 인물 正武


1. 일반적인 의미



2. 정욱의 아들


程武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신하. 정욱의 아들이자 정극의 아버지.
정사에서는 딱 1회 언급된다. 220년에 아버지 정욱이 죽자 그의 아들 정무가 작위를 계승했으며, 그 이후로 정무가 죽으면서 정무의 아들 정극이 이었다가 정극이 죽자 다시 정극의 아들 정량이 작위를 계승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무'''의 참군이 되어 제갈량을 막기 위해 종군하며, 한덕 다섯 부자들을 잃으면서 하후무가 장수들과 상의해 조운의 용맹이 대단해 그와 맞설 사람이 없는 것에 고민하자 정무는 조운은 용맹하지만 꾀가 없다면서 계책을 제시한다.
정무는 하후무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미리 두 대의 군사를 좌우에 매복시키라고 한다. 싸움이 벌어지면 하후무가 조운을 유인했다가 군사가 매복한 곳에 오면 하후무가 산에 올라서 사면의 군사를 지휘해 겹겹으로 조운을 에워싸서 조운을 사로잡으면 된다고 말했다. 결국 촉의 선봉 조운을 유인해서 궁지에 몰아넣는 기염을 토하는가 싶었지만 모든 것을 예측한 제갈량장포#s-2, 관흥를 원군으로 보내는 바람에 실패한다.

2.1. 미디어 믹스


[image]
삼국지 12, 13
조운을 위기에 빠뜨린 계책을 내었다는 점을 반영하였는지 지력, 정치력은 어느 정도 되는 문관형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연의에서 정무에게 머리가 나쁘다고 까인 조운의 지력이 정무와 비슷한 수준의 70대 중반이라는 점이 함정이다.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2/무력 37/지력 75/정치력 71의 능력치. 지식계 병법으로는 파괴, 모략계 병법으로는 혼란과 덫을 가지고 있다. 병법의 경우 아버지와 비교하면 매도가 없고 교사가 파괴로 한 단계 낮아졌다. 과연 지력 78에 교사까지 보유하고 있는 조운을 무슨 수로 물먹였는지 궁금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2/무력 33/지력 76/정치력 71/매력 51에 특기는 농업 1개 뿐이다. 그래도 백하팔인인 하후무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능력치이다.
삼국지 11에서는 지력 75/정치력 71로 총합 282의 능력치로 등장한다. 이 시리즈부터 아버지인 정욱보다 모든 능력치를 넘지 못하게 되었다.
삼국지 12에서는 빈약한 사료와 연의에서도 보잘 것 없는 활약에 힘입어 짤렸다. 그러나 PS3판과 PK에서 추가되었다. 능력치는 통솔력 56/무력 35/지력 75/정치력 71로 뭔가 아쉽지만 다른 거 다 떠나서 복병 궁병 하나만으로도 등용할 가치는 충분하다. 여담으로 못 생겼던 이전작 일러스트에 비해서 상당히 멀끔한 모습으로 나왔는데 자세히 보면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2, 설파 3, 언변 3. 전수특기는 설파이며 전법은 수비명령.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4, 무력 35, 지력 75, 정치 71, 매력 49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언독, 주의는 패도, 정책은 지세연구 Lv 3, 진형은 학익, 전법은 도발, 매성, 친애무장은 하후무, 혐오무장은 없다.

3. 정태의 아들



鄭袤
189년 ~ 273년
삼국시대서진의 인물. 자는 임숙(林叔). 정태의 작은 아들.
형양군 개봉 사람으로 정태가 41세의 나이로 죽자 정무는 작은 아버지 정혼을 따라 강동으로 피난을 갔으며, 정태와 사이가 좋던 화흠, 순유는 정무를 보고 "정공업은 죽지 않았구나!"라고 탄식했을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정무는 화흠에게 의지했고 화흠이 정태와 사이가 좋았는데, 화흠이 정무를 자식처럼 귀여워해줬고 정무는 17세 때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성격은 청정했다.
처음에는 서간#s-3과 함께 조식의 문학이 되었다가 사례공조종사로 옮겼으며, 정무는 왕랑에게 허윤#s-1, 노지, 왕기 등을 천거했고 이 때 천거한 사람들은 모두 그 이름이 무거워졌다. 정무는 임람이 위풍과 친한 것을 알고 임람에게 위풍은 간사한 영웅이라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충고했고 그 말대로 위풍은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죽었다.
상서랑, 여양령 등을 역임했고 여양령일 때 뛰어난 정치를 했으며, 이후 상서우승, 제음태수, 대장군 종사중랑, 산기상시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광평태수의 자리가 비자 광평태수가 되어 뛰어난 정치를 해서 그가 떠날 때 백성들이 울 정도였고 광평태수에서 시중, 소부 등을 역임했다. 조모가 즉위하자 왕숙과 함께 예를 갖추어 맞이했는데, 이로 인해 광창정후에 봉해졌으며, 광록훈, 영 종정에 임명되었다.
255년에 관구검이 봉기하자 사마사가 스스로 출진했으며, 백관들이 그를 전송했지만 정무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전송하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사마사가 원망하자 왕숙이 정무에게 이를 알려줬다. 정무는 스스로 가마를 내서 사마사를 쫓아가 겨우 따라오자 사마사는 웃으면서 처음부터 올 줄 알았다고 말했으며, 수레에 같은 자리에 태웠다.
사마사가 관구검을 물리칠 계책을 묻자 정무는

예전에 관구검과 함께 상서랑을 지내 그에 대해서 특히 잘 아는데 관구검은 모책을 좋아하나 사정에 통달하지 못하고 전에 유주에서 훈공을 세운 이래 그가 바라는 바가 무한하며 문흠은 용맹하나 꾀가 없습니다. 이제 대군이 출기불의해 강회의 병졸들이 날카로우나 굳지는 못하니 해자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여 그들의 기세를 꺾는 것이 아부가 쓴 것과 같은 장책입니다.

사마사가 그 계책을 택하니 과연 관구검의 군사를 물리치게 된다.
이후 정무는 태상이 되었고 조모가 학문을 좋아해 동당에서 강론할 때 유의, 유식, 정함, 유준 등을 천거했으며, 260년에 조환이 즉위했다. 조환을 즉위시킨 공이 있다고 해서 안성정후에 봉해졌고 식읍 1000호를 받았으며. 그 해에 질병으로 실명했고 자주 은퇴를 청했지만 허용되지 않다가 5등작이 신설되었을 때 밀릉백에 봉해졌다.
사마염이 진왕이 되자 작위가 후로 높아졌으며, 10여 년간 병으로 나서고 있지 않을 때도 현명한 사람이나 보좌할 만한 사람을 추천했는데, 태시 연간에 사공으로 임명되었지만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은퇴를 허락받았다. 정무는 의동삼사에 임명받고 사인, 관기와 함께 침상의 휘장, 대자리, 50만 전 등을 하사받았으며, 273년에 사망해 비기, 조복 한 벌, 옷 한 벌, 금 30만, 견포 100개가 주어져 그의 장례에 사용되었고 시호는 원(元)이 주어졌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낙가 전투(1)에서 첫등장을 한다. 위의 사례가 이유인지 뛰어난 정치가라고 타이틀 컷에 소개된다.

4. 백제의 인물 正武


正武
생몰년도 미상
관등은 좌평.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기록에서만 등장한다. 660년 7월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면서 정무는 두시원악(豆尸原嶽)[1]에 진을 치고 당나라와 신라인들을 노략질했다고 한다.
다만 백제부흥운동 때 좌평을 칭한 귀실복신, 부여자신 같은 사례가 있어 백제 조정이 존속할 때 좌평이었는지, 아니면 거병해서 좌평을 칭했는지는 불명.

[1] 현 충청남도 청양군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전라북도 무주군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자세한 위치는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