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만

 


'''광저우만'''
'''Kouang-tchéou-wan'''
프랑스 식민제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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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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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광저우만의 지도
1898 ~ 1946
위치
레이저우 반도 북동쪽
수도
포트 바야르
정치체제
프랑스조차지
지도자
프랑스 대통령
언어
프랑스어, 광둥어
성립 이전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민국
1. 개요
2. 역사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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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1899년부터 1946년까지 청나라로부터 레이저우 반도 이남을 임차받아 통치한 조차지를 말한다. 본래 1900년부터 발효되는 조약으로 청으로부터 99년 동안 임차하기로 계약하여 1997년에 반환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1946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중화민국에 반환하게 된다. 통치 기간동안 서쪽에 위치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관할 하에 놓였다.
광저우만이란 이름은 근처의 중국 제4의 도시 광저우시와 큰 관련은 없고, 단순히 이 지역 사람들이 이 지역을 광저우만이란 이름으로 부르던 것이었고, 라틴 철자는 프랑스인들이 프랑스어 발음에 맞추어 라틴어 철자 Kouang-tchéou-wan을 쓰게 된 것이다.
프랑스가 조차받은 지역은 막시강 하구의 연안 섬들과 위에 광저우만이라 불리던 만을 조차하였고, 1899년의 조약으로 광저우만의 경계를 정하였다.

2. 역사


사실 광저우만 조차지는 경제적으론 실익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포르투갈령 마카오영국령 홍콩과 같은 당대 다른 중국 조차지들과는 달리 실제로도 큰 이익을 얻어내지 못한 땅이었으며 심지어는 1898년 조약에서 프랑스측 외교관들이 이 지역을 상업적으로 필요없으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으로 평가하여 조차한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애초에 이 조차지의 목적은 경제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광저우만 근처에는 차나 비단같은 무역품 생산도, 수출을 위한 인구도 없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천주교 신부들이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할 수 있는 기지로서, 그리고 중국지역의 해군 보급기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지역의 경제도 프랑스 해군을 위한 식료품 및 석탄 공급에 주력하게 되어, 차나 비단 등 사치품을 무역하던 홍콩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래도 무역활동이 전무한것도 아니었고 프랑스 해군기지로서 당대 중국 내륙에 비해서는 고임금 일자리가 많았기에 중국인 이민으로 별 볼일 없던 마을에서 인구 20만의 규모있는 도시로 변모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모국이 6주만에 본토가 유린당하고 항복하는 치욕을 겪고 국가가 친독일 신정부반독일 망명정부로 나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중국을 유린하던 동방의 강대국이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면서 페탱과의 조약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함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허나 1943년, 일본은 광저우만 조차지의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며 주둔군 제한을 파기하고 주둔군을 추가로 보낸다고 통보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함께 사실상 일본령이 되었다. 1945년, 유럽에서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은 프랑스 주둔군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여 광저우만과 인도차이나 전역을 일본 통치 하에 넣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는 자신들이 실제로 통치하지도 않던, 경제적인 실익도 없고 통치할 여력도 부족한 이 땅을 되찾을 이유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1945년에 중국 정부와의 조약으로 광저우만의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할양했고, 1945년 8월 18일 광저우만에서 마지막 일본 주둔군이 철수하자 중화민국은 광저우만을 재점령, 1945년 11월 20일 마지막으로 프랑스 국기를 하강, 프랑스의 광저우만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현재 잔장시에 관해서는 잔장시 문서 참조.

3.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