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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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샤를 드골,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필리프 르클레르, 조르주 카트루 등 프랑스 군부 지도자들이 영국에 망명해서 세운 프랑스 망명 정부. 전후 프랑스에서는 이들이 결국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해 제4, 제5공화정을 이루었고 지금의 프랑스 정부는 여기서 이어진다.
국기는 청, 백, 적의 정식 프랑스 국기에, 잔 다르크가 사용했다는 로렌의 십자가를 결합한 것이다. 로렌 십자가는 잔 다르크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나치 독일이 쓰는 卐자에 대항한다는 의미도 있고, 잃어버린 자신들의 조국 프랑스를 다시 수립하겠단 열의를 나타내는 의미 또한 존재한다. 동시에 쿠프라 서약[1] 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대독일 전쟁에서 알자스-로렌이 가진 상징성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가 패배해 독일의 수중에 넘어가고 제3공화국 정부가 붕괴하자, 당시 국방차관이었던 드골은 프랑스를 탈출하여 소수 망명자들과 힘을 합쳐 자유 프랑스 운동을 시작, 독일에 항복한 친독일 정권 비시 프랑스에 맞서 반독일 운동을 개시하였다.
2.1. 비시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
하지만 전쟁 수행에 있어서 가장 큰 힘인 프랑스 본국은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유 프랑스는 식민지들을 장악하여 그 곳의 자원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자유 프랑스는 가담한 소수 병력으로 영국과 협력해 식민지들을 설득하거나 비시 프랑스에 충성하는 식민지군을 패퇴시켜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 해외 프랑스 식민지 대다수는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가령 1940년 6월 자유 프랑스 수립 당시 수십 개에 달하는 아프리카 내 프랑스 식민지 중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던 식민지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그 중에서도 펠릭스 에부에가 총독으로 있던 차드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에부에의 설득으로 1940년 8월까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구성 식민지인 우방기샤리, 카메룬, 프랑스령 콩고도 자유 프랑스 편에 가담했으며 1940년 11월 영국의 도움으로 가봉[2] 장악에 성공하면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전체가 자유 프랑스의 통제하에 들었다. 하지만 프랑스령 아프리카 전체를 장악하려는 시도는 1940년 9월의 다카르 해전으로 한동안 차질을 빚었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경우 가장 큰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일본군의 통제 하에 있었으나 퐁디셰리 등의 프랑스령 인도가 가장 먼저 자유 프랑스 편을 들었으며 1940년 8월까지 누벨칼레도니,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영국과의 공동 식민지인 바누아투가 자유 프랑스 편을 들었다. 중국 대륙 내 프랑스의 조차지인 잔장도 자유 프랑스 편을 들어 1941년 12월 일본군이 점령할 때까지 중국과 자유 프랑스 간의 외교 통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식민지 대부분이 비시 프랑스에 충성했지만 영국의 도움으로 1940년 6-12월까지 프랑스령 아프리카 중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전부를 장악했다. 미국은 비시 프랑스 정권 수립 당시 이 정권을 프랑스 정부로써 승인했지만 진주만 공습 직후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자유 프랑스 승인으로 입장을 급선회했다.
1941년 2월 자유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일부인 키레나이카로 진격하였다. 동년 6월 자유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3] 장악을 위한 동아프리카 전역에 참여하였으며 7월에 프랑스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이던 시리아와 레바논을, 12월에는 생피에르 미클롱을 점령하였다.
1942년 6월에는 연합군이 마다가스카르에 상륙한 11월 마다가스카르를 완전 점령하면서 마다가스카르가 자유 프랑스의 통제하에 들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방면에서 추축군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2년 11월 8일, 횃불 작전으로 영-미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추축군의 패색이 짙어졌기 때문에 영-미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의 비시 프랑스군이 순순히 항복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 외로 비시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상륙에 격렬히 저항했고 연합군은 예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내게 된다. 어찌 됐든 간에 상륙 당일 알제에 있던 비시 프랑스군 지휘부는 레지스탕스의 쿠데타로 인해 힘 한 번 못 써보고 포로로 잡혔으며 ,사령관이던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은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과 협상에 나서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사령관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당연히 드골 장군은 격렬히 반대했으나 연합군의 압력으로 이를 인정해야 했다. 그리하여 11월 10일 다를랑 제독은 휴전을 지시하고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비시 프랑스군은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전체와 프랑스의 보호령이던 모로코[4] , 그리고 프랑스 본국의 일부로 취급되던 알제리까지 자유 프랑스의 통제 하에 들었으며 그동안 임시 수도로 사용하던 브라자빌[5] 에서 알제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한동안 알제를 임시 수도로 사용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부터 파리 해방 시까지 런던을 망명 정부 소재지로 사용하였다.
횃불 작전과 다를랑의 배신에 격노한 아돌프 히틀러는 비시 프랑스의 완전 점령을 지시, 11월 11일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안톤 작전을 개시하여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이 맺었던 협정을 파기하고 비시 프랑스 전역을 완전 점령하였다. 독일의 협정 파기에 분노한 비시 프랑스 해군은 11월 27일 툴롱에 정박 중이던 자국군 함대를 자침시키는 거사까지 감행하여 독일의 점령에 저항하였다.[6] 한편 위의 소식을 접한 아프리카의 비시 프랑스군 또한 비시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을 상실하고 대거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면서 자유 프랑스군은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다.
1942년 12월 28일, 1년 9개월 간의 봉쇄 끝에 프랑스령 소말릴란드가 항복하고 1943년 초,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를 위시로 한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와 프랑스령 기아나가 자유 프랑스 편에 가담하였다. 마지막으로 1943년 5월, 추축군 세력이 최후까지 저항하던 튀니지까지 연합군이 점령하면서[7] 종전 시까지 일본군이 통제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제외한 프랑스 식민제국의 모든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의 통제하에 들게 되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고등판무관은 프랑스 해군대장 장 드쿠 제독이었는데 일본인이 아닌데다가 길을 빌려달라는 약속과는 다르게 일본은 실질적인 통치를 원했고, 드쿠 제독은 일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그를 감금하고 고등판무관직을 폐지해버렸다. 전후 장 드쿠는 반역혐의로 기소되나 무죄로 풀려난다. 이 때부터 전쟁 내내 계속 껄끄러운 사이였던 미국 또한 자유 프랑스를 프랑스의 정식 정부로 인정하고 대규모 물자 지원을 통해 밀어주기 시작했다.
2.2. 프랑스 해방
여러 차례의 전과로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프랑스군의 대부분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상황이 반전되었는데,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에 자극받은 독일군이 결국 비시 정부와의 협상으로 그간 마저 남겨두었던 남부 프랑스까지 점령하여 비시 정부를 사실상의 괴뢰정권으로 만들자, 애초 비시 정부의 출범 명분이였던 '프랑스의 자주 수호'가 사라진 만큼 비시 정부를 지지할 목적이 사라지게 되어 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점점 세를 키워나가고 자유 프랑스는 이들과 접촉해 국내에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전후를 준비하게 된다.
물론 상황이 자유 프랑스에게 팍 좋아진건 아니라서, 1944년 초 드골이 자기 측근을 프랑스 국내군 사령관으로 잠입시켜 레지스탕스 지휘체계 일원화를 시도했지만 그냥 무시당했다. 좌익은 커녕 대다수 우익 레지스탕스도 자유 프랑스의 지도를 거부하고, 연합군과의 연락창구 정도로 활용했다. 밑에도 나오지만 자유 프랑스가 레지스탕스를 지도했다는 건 후대에 윤색된 낭설이다.[8] 이후 알제리 등지에서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현지인 병력을 끌어모아 세력을 키우는 한편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작전 구상 당시 작전에 참여하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했다. 여기서 드디어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이후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하면서 드디어 수도 파리가 가까워졌을 때,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였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전후 처리에 정치적 관심이 없어 전술적으로 큰 이득이 없는 파리를 굳이 탈환하기보다는 당장 독일로 진격할 것을 원해 연합군의 진격로에서 파리를 빼버렸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파리가 곧 프랑스였기 때문에 파리를 얻는 세력이 프랑스를 주도할 수 있었고, 실제로 프랑스를 냅두기로 필리프 페탱과 협의한 독일이 기어이 파리(를 포함한 북부 전반 지역)만큼은 자기 차지로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였다.
따라서 프랑스의 정치적 세력들에게 있어 파리 탈환은 전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뭐가 어찌되든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최우선 과제였고, 실제로 당시 프랑스에 존재했던 내로라하는 세력들은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보병대장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에게 각자 밀사를 파견해서 서로 자기 쪽한테 항복하라고 압박한다. 더군다나 아돌프 히틀러는 알프레트 요들 장군을 통해 콜티츠에게 연합군이 파리로 진격해오면 도시를 '''초토화'''시키라고 명령한다. 이 와중에 항복을 권유하는 밀사들이 찾아오는 등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결국 고뇌하던 콜티츠 장군은 히틀러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자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허위보고를 한 후에 바로 가장 먼저 파리에 도달한 자유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그에게는 전쟁이 끝나자 재판에서도 가벼운 형을 받아 석방되고 파리 명예시민 자격이 주어졌으며, 훗날 파리의 구원자로 칭송받는다. 대한민국 도덕 교과서에도 이 일화가 실렸다.
자유 프랑스 또한 마찬가지로 파리를 탈환하려 했고, 이에 자유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레지스탕스들에게 일제봉기를 사주해[9] 연합군의 진격로를 돌려놓은 뒤 드골의 명에 따라 연합군 사령부를 무시하고 육군 소장 르클레르(Philippe Leclerc de Hauteclocque)[10]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육군 제2기갑사단이 선두로 1944년 8월 25일 파리로 진격, 결국 치열한 정치암투과 비밀공작 끝에 콜티츠 장군은 파리주둔군 장병들의 신변 보장을 조건으로 자유 프랑스에 항복한다.
런던에 머물러 있던 드골은 바로 비행기 타고 와서 자유 프랑스군과 함께 파리시에서 개선행진을 한다. 수십 만의 파리시민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환영했고, 듣보잡이던 드골 장군은 '구국의 영웅', '해방자' 드골로 프랑스인들에게 각인된다. 결국 전후 좌-우 모든 정치세력이 결집한 임시정부는 드골 장군이 주도하게 된다. 피점령기간 동안 처절하게 싸우면서 전후 '파리 코뮌의 부활'을 꿈꾸던 좌익계 레지스탕스는 한마디로 죽쒀서 개 준 꼴.[11][12]
이후에는 프랑스 남부에 미 육군과 함께 상륙한 프랑스 육군 제1군이 북상하면서 프랑스 대부분을 되찾고 레지스탕스 세력 및 감옥에서 풀려난 제3공화정 시기의 정치인들과 협력하여 드 골을 수반으로 하는 프랑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간신히 인정받게 된다.
드골이 본격 미국 까 정책을 취하게 된 원인이 이 때의 미국의 냉랭한 태도와 2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이 보인 태도, 그리고 이후 핵개발 과정에서 영국 및 캐나다와 손잡고 對프랑스 우라늄 수출을 막는 등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나토 지휘부를 탈퇴하는 강수까지 부리면서 미국에게 대항했고 핵무기 개발은 이스라엘과 협력하여 끝내 성공하게 된다.
자유 프랑스군의 군사력은 프랑스의 항복 직후인 1940년 7월에는 1만 명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으나, 이후 장악한 식민지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여기에 항복해 온 비시 프랑스군을 통합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는 45만여 명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 때문에 자유 프랑스 육군 병력의 30% 가량은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본토 탈환 후 종전까지는 90만여 명의 대군이 되어 승전국의 말석 자리에 끼는데 성공하였다.
3. 기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게임 사보추어의 레지스탕스들이 사용하는 문양이 자유 프랑스의 국기 중앙에 새겨진 문양과 같다. 작중 자유 프랑스 정부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묘사는 딱히 없는 듯.
1943년부터 서서히 전쟁의 승기를 잡아가자 프랑스 국토 회복을 준비하며 부역자들에 대한 청산을 위한 '공민권박탈형'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1945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이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4. 주요 인물
[1] 자유 프랑스군의 장군이었던 르클레르가 휘하 부대원들에게 알자스의 주도인 스트라스부르가 탈환될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은 사건.[2] 원래 가봉 총독은 자유 프랑스에 가담하려고 했으나 현지 가톨릭교회 선교사들의 압력으로 비시 프랑스에 충성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당시 프랑스와 그 식민지에 있던 가톨릭교회 성직자 다수는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다. [3]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그리고 1936년 합병한 에티오피아.[4] 모로코 통감은 샤를 누게 대장으로, 레지스탕스 지도자인 조르주 멘델을 독일로 넘기는 등 적극적으로 제3제국에 부역해,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10년 가까이 도피하였고 정작 1954년 프랑스에 귀국했을 때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5] 명목상 브라자빌이 임시 수도였을 뿐, 실제 망명 정부의 소재지는 영국 런던이었다.[6] 필리프 페탱 국가수반과 가브리엘 오팡 해군 참모총장이 장 라 보르드 대장에게 함대를 연합군에게 양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라 보르드 대장은 그냥 자침시켜 버렸다.[7] 튀니지 통감은 장 마리 에스테바 해군대장으로 이미 국가해방위원회 위원장인 앙리 지로 육군대장이 반역혐의로 사형을 때린 인물이다. 프랑스 해방 후 에스테바 대장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가석방된다.[8]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70%는 좌익계였고 그중에서도 공산당 계열이 태반이었다.[9] 사실 공산당 계열 레지스탕스 조직들이 먼저 봉기를 일으킬까봐 선수친 것도 있다.[10]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주력 전차(MBT) AMX-56 르클레르가 이 사람 이름을 딴 것이다.[11] 이들에게는 독소 밀월 기간중 독일 점령군에 협조했던 원죄가 있기는 하다.[12] 이 과정을 묘사한 영화가 바로 1966년작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 중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단, 흑백이며 상영시간 175분 내내 화끈한 전투장면 따위는 없으며 그 대신 콜티츠 장군의 갈등과 레지스탕스 내부의 좌우대립을 그린 장면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