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식민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Empire colonial françai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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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위: 1789년 이전
중간: 1789년 이후
아래: 1958년 이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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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년 ~ 1980년[2]
위치
전 세계
수도
파리
국가원수
국왕[3]
공회장[4]
총재[5]
통령[6]
황제[7]
대통령[8]
언어
프랑스어
통화
프랑
면적
12,898,000km²(1936년)[9] 23,500,000Km²[10]
인구
110,600,000명(1936년)[11]
주요 사건
1534년: 자크 카르티에 휘하 프랑스 탐험대의 캐나다 가스페 반도 상륙(1차 식민제국의 시작)
1608년 퀘벡 건설
1659년 생도맹그 점령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1763년 파리 조약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1804년 아이티 독립
1830년 알제 정복(2차 식민제국의 시작)
1848년 노예제 폐지
1884년 베를린 회담
1898년 파쇼다 사건
1905년, 1911년 모로코 위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1931년 파리 국제 식민 박람회 개최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1946년 프랑스 연합 결성,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4년 제네바 회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독립, 알제리 전쟁
1958년 프랑스 연합이 프랑스 공동체로 재편성
1962년 알제리 독립
1980년 바누아투 독립('''식민제국 해체''')
1. 개요
2. 프랑스 제1식민제국 (17세기 초반 ~ 1804년)
3. 프랑스 제2식민제국 (1862년 ~ 1982년)
4. 평가
5. 제2식민제국 당시의 식민지
6. 프랑스의 외부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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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존속한 프랑스식민제국으로 제국주의 시절에는 대영제국과 함께 양대 제국열강이었다.[12]
왕정 시절에는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인도, 세네갈 등 여러 지역에 손을 뻗었지만, 7년 전쟁으로 영국에게 인도와 캐나다를 내주고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에게 양도하여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나폴레옹 시절에 루이지애나를 되찾긴 하였으나 관리상의 문제로 미국에게 매각했고 가장 알짜배기 식민지였던 아이티도 독립해 나가면서 왕정 복고 시에는 카리브 해의 몇몇 섬과 기아나, 세네갈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를 '1차 식민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는 식민제국 건설을 위한 식민지 확보에 다시 나섰다. 프랑스는 일부 해안 거점 외에는 유럽 국가들이 발을 들이지 못한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고 왕정 복고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 제2제국, 제3공화국 모두 적극적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섰다. 그 결과 1830년 알제리 정복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마그레브 지역)과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인도차이나 반도), 남태평양 일대를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를 '2차 식민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대부분은 20세기 중반이 돼서야 프랑스에서 독립하였으며, 이때 점령한 지역 중 아직까지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는 곳도 있다. 프랑스령 기아나누벨칼레도니, 생피에르 미클롱 등이 대표적.
현재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등에서 프랑스어는 극소수만 쓰이지만, 벨기에 식민제국과 더불어 프랑스 식민제국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및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아직까지도 프랑스어가 폭넓게 쓰이고 있다.
프랑스는 캐나다 퀘벡주 가스페(Gaspé) 에 프랑스 깃발을 꽂은 1534년을 프랑스 식민제국의 시작으로 본다.

2. 프랑스 제1식민제국 (17세기 초반 ~ 18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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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확보했던 북미 식민지. 면적- 대략 8,100,000Km²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한 것은 1603년의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였다. 누벨 프랑스는 동쪽으로는 뉴펀들랜드, 서쪽으로는 로키 산맥, 남쪽으로는 멕시코 만, 북쪽으로는 허드슨 만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자랑했으며 이밖에도 프랑스령 기아나(1624),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1635), 아이티(1665), 인도 해안 일부(17세기 후반), 세네갈(18세기 후반) 등을 정복하며 프랑스는 거의 영국과 맞먹는 판도를 지녔다. 식민지인들의 자치가 허용되었던 영국 식민지와는 달리 프랑스 식민지는 프랑스 국왕의 관할에 있었고 설탕 플랜테이션 및 모피 무역을 토대로 세워졌다. 또한 프랑스 본국에서 선택한 정착민들만 이주가 가능했기에 인구 수는 영국 식민지보다 비교적 적었다.[13][14] 물론 프랑스의 본토 인구는 1500년에 이미 15,000,000명이었고 1685년에 21,500,000명이나 되어서 본토 인구와 별개로 식민지 개척도 순위권에 들어가는 국가였지만 어디까지나 프랑스 정도 되는 규모에 비해서 그렇기는 하다.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1600년에 이미 220,000명이었고 1685년에 510,000명이어서 국력을 집중해서 해외에 투입하기도 충분했다. 하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허드슨 만과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를 넘겨주면서 세력이 위축되더니 7년 전쟁에서 패배, 영국에게 퀘벡, 아카디아, 미시시피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스페인에게는 루이지애나를 넘겨주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날려 먹었다.
프랑스 혁명은 두 가지 의미에서 결정타였다. 하나는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 및 국내의 혼란으로 프랑스가 정신이 없는 사이 영국이 7년 전쟁 시즌 2를 찍으면서 그나마 남은 프랑스의 모든 식민지들을 마음놓고 털어버릴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대단히 아이러니한데, '''프랑스의 식민지에도 전파된 자유와 평등 사상이 식민제국을 더 빨리 허물어트렸다.''' 가장 알짜배기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흑백평등을 내세운 흑인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1804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독립국가를 세운 것이다!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으로부터 돌려받기는 했으나 제대로 경영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중근동 일대의 정복을 노리던 이집트 원정도 실패로 돌아가자, 나폴레옹은 그 즉시 식민지들을 대부분 정리하고 유럽 대륙국가로서의 프랑스에 더 신경을 썼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으로부터 루이지애나의 광대한 땅을 돌려받은지 3년 만에 토마스 제퍼슨에게 팔아넘긴 것(루이지애나 판매)도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미국에게 안 팔고 그대로 가졌어도 나폴레옹 본인의 몰락으로 그 땅은 영국이나 스페인에게 넘어갔을 것이 확실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에게 남은 식민지는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를 위시로 한 카리브 해의 섬 몇개, 기아나와 세네갈밖에 없었다.

3. 프랑스 제2식민제국 (1862년 ~ 1982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는 다시 한 번 식민지 확장에 나섰다. 1830년 샤를 10세알제리 침략을 시작으로 나폴레옹 3세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누벨칼레도니와 폴리네시아를 확보하고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를 확보하였다. 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운동에 개입한 것도, 병인양요도 이때의 일이다. 본격적인 시작이 나폴레옹 3세 때였다면 가장 왕성한 확장은 제3공화국 때였다. 당시 프랑스의 본토 인구는 1870년에 38,400,000명이었고 1910년에 41,500,000명이었기 때문에 개척에 나서기에도 충분했고 원래부터 해외로 투입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유럽 열강들이 지들 딴에는 신세계인 아프리카로 달려들 때 프랑스도 역시 달려들었으며 베를린 회담을 기점으로 아프리카 내륙을 향해 쭉쭉 뻗어나갔고 코친차이나를 넘어서 메콩 강 동쪽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전체를 확보하였다. 그렇게 프랑스는 다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복귀했다.
다만 이때의 식민제국은 영국과 경쟁하지 않고 협력하며 빈자리를 나눠먹는 게 특징. 서아프리카지부티에서 점차 파고들어간 횡단정책이 시행되었다. 이것이 영국의 종단정책과 부딪혀 1894년 오늘날의 남수단에서 벌어진 파쇼다 사건도 정치적 및 군사적 상황에서 불리했던 프랑스가 양보해 쉽게 해결되면서 영국의 종단정책을 인정하는 대신 서아프리카의 점유를 인정받았으며, 태국은 영국령 미얀마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의 완충국이 되었으며,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크림전쟁의화단 운동, 수에즈 운하의 건설의 경우 함께 개입하였다.
중동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붕괴 뒤 영국과 함께 "사이크프-피코 조약"으로 대(大)시리아[15]를 나눠먹어 레바논시리아를 차지했다.
결국 이런 프랑스의 제국주의제2차 세계 대전비시 프랑스의 성립과 함께 망해가기 시작했다. 식민지는 자유 프랑스비시 프랑스로 갈라졌고, 인도차이나일제의 침략이 이뤄졌다. 전쟁을 끝낸 시점에서 인도차이나는 호치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세력이 장악하여 사실상 독립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려 발악을 했지만 2차대전으로 개박살난 프랑스에게 식민지를 유지할 국력은 남아있지 못했다. 결국 베트남에서는 월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강대국이라는 프랑스군이 월맹군에게 패전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며 세계적인 굴욕을 겪게 되었고, 알제리와의 전쟁에서도 부질없이 질질 끌면서 피해가 커지며 굴욕을 연속으로 겪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수에즈 운하의 권리를 둘러싸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헤게머니를 쥔 것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것만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었다.[16] 이후 1960년대 샤를 드 골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면서 프랑스 식민제국은 1980년 바누아투의 독립을 마지막으로 끝을 맞이했다. 이후 독립하지 않고 프랑스에 잔류한 식민지들은 프랑스의 해외 영토가 되었다.

4. 평가


여러분, 우리는 좀 더 큰 목소리로,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수한 인종들은 열등 인종들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우수한 인종들은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수한 인종들에게는 열등 인종들을 문명화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프랑스 총리 쥘 페리, 1884년 프랑스 하원에서 베트남과 튀니지의 식민화를 주장하며.

프랑스의 식민정책은 굉장히 노골적인 수탈로 유명하며 시스템은 갖추고 빨대 꽂은 영국과 달리 앞 뒤 안 가리고 골수까지 파먹는 막장으로 유명하다.
한편으로 프랑스 2차 식민제국 역시 당시 프랑스와 라이벌 호각을 다투던 영국의 대영제국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쪼개 먹고 자국의 편의에 맞게 민족과 종교 등을 고려하지 않은 국경선 등을 획정하고 식민지 시기 내내 통치에 용이하게 특정 현지 세력들을 지원하여 민족, 종교 간 분열들을 조장시켰다. 이렇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에 그들을 독립시킨 결과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국가들이 프랑스에서 독립 후 내전과 전쟁 등 분쟁이 터지고 말았다. 당장에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세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의 경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에게 패전 후 뒷처리도 제대로 안 한 채 급조적으로 철군했고 그 과정에서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에 대한 주도권을 미국에 넘기면서 이후 이들 국가들은 베트남 전쟁, 라오스 내전, 킬링필드 등이 벌어지면서 생지옥이 되어버렸고, 아프리카의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코트디부아르, 말리는 프랑스가 민족, 종교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국경선을 일방적으로 획정하여 식민 통치를 펼치다 프랑스에서 독립 이후 내전이 일어났으며, 중동의 경우 식민 통치의 편의를 위해 쿠르드족과 아랍족, 이슬람교 수니파와 알라위파 간의 이슬람 종파 대립을 키워 온 시리아는 시리아가 프랑스에서 독립한 지 60년 뒤에 이슬람 수니파와 알라위파가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폭발하였고 그 과정에서 최악의 악마들이 강림하면서 21세기 중동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프랑스의 하류층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식민지 출신 흑인들을 중용하면서 유화책을 쓰기도 했다.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인 토마알렉상드르 뒤마는 '''세계 최초의 서구권 비백인 사단장'''이었고, 펠릭스 에부에 같은 흑인 출신 총독도 존재했다. 노골적인 수탈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길게 유지할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5. 제2식민제국 당시의 식민지



6. 프랑스의 외부 영토



[1] 이 명칭은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쓰는 명칭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프랑스와 프랑스 지배하의 식민지들을 통칭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여진 명칭이다.[2] 바누아투 독립[3] 1534~1792, 1815~1848[4] 1792~1795[5] 1795~1799[6] 1799~1804[7] 1804~1815, 1852~1870[8] 1848~1852, 1870~1980[9] 프랑스 본토 면적 552,000km² 포함[10] 1534년 ~ 1962년 총 면적[11] 프랑스 본토 인구 41,500,000명 포함[12] 프랑스는 곧잘 영국의 라이벌처럼 여겨지지만 해외 식민지로서는 격차가 컸다. 반면에 영국의 유럽대륙 내에서의 영향력은 대륙국가인 프랑스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본토로 따지자면 프랑스>영국이지만 식민지까지 합치자면 프랑스<<<영국일 정도. 물론 영향력이 아닌 총생산력은 산업혁명이 더 빨리 일어난 영국이 전통적 농업국가인 프랑스보다 조금 더 앞섰다. 그러나 이후 독일이 통일되고 나선 독일 본토의 생산력의 70%가 영국, 50%가 프랑스였다고 한다. 아무튼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경쟁했으나, 큰 무력충돌은 없었고 오히려 이해관계에 따라 러시아의 패권을 저지하기 위해 연합하기도 했다. 그리고 19세기 이전에 영국과 대적하던 국가는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있다. 그레이트 게임 문서 참고.[13] 국교인 가톨릭이 아니라 칼뱅파 신자였던 위그노들은 프랑스 식민지 이주가 금지됐기에 대부분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향했다.[14]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프랑스인과 인디언과의 통혼이 많이 이뤄져 이들의 혼혈을 메티스(Métis)라고 부른다.[15] 오스만령 아랍;현재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을 합친 지역. "레반트"라고도 한다.[16]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나세르의 정치공세로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넣어 수에즈 운하는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17] 1946년부터는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해외영토로 전환. 1967년부터는 프랑스령 아파르이사로 명칭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