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시

 


[image]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성급시 | 광둥성의 성도
广州市(Guǎngzhōu shì '''
광저우시 | Guangzhou City


'''면적'''
7,434km²
'''인구'''
14,900,000 명
'''인구밀도'''
2,005명/km²
'''GDP'''
'''전체'''
3,571억 $
'''1인당 GDP'''
23,963 $
[image]
[image]
사진 우측의 건물이 CTF 광저우다.
[image]
[image]
1. 개요
2. 역사
3. 경제
4. 문화
4.1. 스포츠
6. 매체에서의 등장
7. 여담


1. 개요


广州市 / Guangzhou City
  • 정체자: 廣州
  • 간체자: 广州
  • 한어병음: Guǎngzhōu
  • 광동어(Jyutping): Gwong2zau1
  • 영어: Guangzhou, Kwangchow, Canton[1]
  • 한국어: 광저우, 광주

서양인[2]이 바라본 광저우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의 성도(省都)이자 화난 지방 최대의 무역도시이다.
면적은 7,434㎢이고, 인구는 2014년 기준 약 1400만 명이다. 광역권은 정의가 모호하나 거의 연담화되어 있는 포산시, 둥관시, 선전시주강 삼각지 일대의 인구는 정치적으로 분리된 홍콩을 제외하고도 4500만명에 달하여 사실상 세계 최대의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 도시이다.
하위 행정구역으로 10개의 구, 2개의 현급 시가 있다. 중국에서 베이징, 상하이와 함께 중국 3대 도시로 꼽히며, 최근에는 선전시까지 포함해 4대 도시로 불린다. 다만, 직할시는 아니며[3], 대신 '일선도시(一线城市)'라고 불린다. 특히 시진핑 집권 후 추진하는 일대일로 정책의 핵심이 되는 도시로, 중국 주요 도시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연유로 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진출의 베이스캠프 노릇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치 수도 베이징과 경제 수도로 상하이증권거래소를 둔 상하이가 동등하게 제1도시 역할을 하고, 이 광저우와 선전이 한국의 부산광역시 같은 제2도시 역할을 한다. 충칭대구광역시하고 비슷한 포지션이다.[4]
참고로 이 도시의 이름에서 딴 듯한 이름의 프랑스의 조차지 광저우만와는 상관없는 동네이다.

2. 역사


원래 이곳에는 진시황이 보낸 총독이었던 임효와 그의 부관 조타가 세운 광둥성~베트남에 걸친 남월(南越)이 있었다가 한무제 때 남벌로 남월이 멸망하면서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그래서 고대/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중국보단 베트남에 사실 더 가깝고 주민의 기원들도 한족화된 월족으로 베트남인과 원래 동족이었다.
광동성광시좡족자치구 두 성은 '''양광지역'''이라고 일컬어지며 난링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5] 중원 본토와는 어느 정도 독립적인 그야말로 별천지의 세계다. 쓰는 말도 광동어는 타 지역의 표준중국어와 완전 상이하며, 심지어 기후도 타 지역들과 다르다.
그러한 이유로 광둥성이 갖는 '''광동 독자의식'''은 은근히 큰 떡밥이다. 물론 한족화된 지 오래인데다 원나라, 청나라 등 기마민족의 중국 정복 시기에 몽골계 유목민족을 피해 강남지방에서 내려온 난민이 많아 한족들의 중화민족주의가 최고조이지만, 한편으론 '''남방의 북방에 대한 반골주의'''도 강하다. 그런지라 중국 공산당에 대한 반감이 제일 크고 중국 국민당중화민국에 대한 지지세가 크다. 지금이야 반국가분열법의 서슬퍼런 통제 때문에 숨죽이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장제스의 북벌이 시작된 황포군관학교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지만, 장제스가 이후 난징을 수도를 삼고 강소성-저장성-상하이를 중심으로 통치를 펴자 반란의 온상이 되었다. 이곳을 기반으로 한 군벌들은[6] 광저우 및 광동성의 경제력을 밑천삼아 주변의 광시성 군벌들과 연합하여 장제스에 자주 반란을 일으켰으며, 월계전쟁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반란으로 장제스를 골탕먹였다. 장제스는 이런 월계군벌을 달래기 위해 거액의 재정지원을 해야 했으며, 이는 난징 정부에게 큰 압박이 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어도 이곳의 분위기는 중앙에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이곳에서 발행하는 남방주말은 여러 정부 비판으로 검열이 강제되자 2013년 신중국 수립후 언론사 최초로 파업을 단행해서 중국본토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
진시황중국을 통일하고 이 지역에 남해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곧 진나라의 장군인 임효와 그의 부하 조타에 의해 남월이 들어서 진나라는 이 지역을 상실한다. 그러다가 한나라 무제는 이후 남월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영구히 중국의 지배 하에 두는 데 성공한다. 한나라 때도 남해군을 설치했다. 당시 남해군의 관할은 광시좡족자치구베트남 북부 하노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똑같이 중국에 복속된 중부 베트남의 다낭 일대는 일남군이 되었다.
한나라 때부터 외국무역을 시작했으며[7] 바닷길 실크로드가 활성화된 당나라, 송나라 때 급속히 발전했다.[8]
남송원나라와 대치 중 밀리고 밀려 여기까지 밀린 후 애산 전투를 치루었으나 패배했고, 결국 홍콩 구룡반도 까우룽베이(九龍灣,Kowloon Bay) 앞바다에서 송나라 마지막 황제인 어린 송소제를 비롯한 황족 전원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하는 비극을 불렀고 결국 손쉽게 이 땅을 점령한 원나라가 이 땅을 정복했다. 그러나 애초 내몽골과 북만주, 바이칼 호가 주축이던 유목민족 몽골족들은 낯설고 기후가 안 맞는 이 땅을 한족 신사층에게 위임한다. 단지 몽골만호부라는 몽골 기마군단을 지방군으로 주둔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타지와 달리 머리가 변발로 밀리는 참극을 피할 수 있었으며 훗날 이 광동을 기반으로 장사성의 난이 일어나고 마침내 주원장명나라를 건국해 몽골족을 내몽골로 전원 쫓아내 버리고 한족이 중원을 회복한다. 애초 장사성과 주원장 두 사람 모두 청나라 말기 한족들과 달리 한족 복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이후 한족 명나라만주족 청나라가 차례로 들어섰고 청대에는 만주족에 대항하는 한족영주들의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청을 건국한 만주족은 과거 몽골족과는 달리 향신층의 자치 이딴 거 없이 주방 팔기군을 박아놓고, 변발을 강제했으며 변발을 거부하는 성은 '''성 하나를 통째로 도륙하는''' 소위 '''도성(屠省)'''을 실시해 수 많은 광동인이 변발을 거부해 만주족들의 손에 학살당했다. 그리고 만주족들에 의해 팔기군으로 내려온 바요트나 칼간 등 내칼카 부족들 및 차하르, 오르도스, 투메드, 곤기라트 등 몽골부족으로 구성된 몽골팔기들 역시 도성을 행해 광저우 근처 성들은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며 특히 이 지역을 기반으로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진압된 후 양광지방에는 한동안 피비린내가 멈추지 않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 지역 한족들이 몽골족이나 만주족에 대해 갖게 된 적대감은 맥시멈에 이르게 되었다.
청나라 때 공행무역의 중심지로 서양세력과의 교류 창구로 번성했으나, 이를 불만으로 여기던 영국이 1841년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영국군에 잠시 점령당했다.
1911년 쑨원신해혁명을 일으킨 본거지였다. 신해혁명은 원래 현재 우한인 우창봉기에서 시작했으며 이후 전 중국으로 확대되어 만주인들의 청조는 멸망하고 다시 한족의 나라이자 '''아시아 최초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이 들어선다.
1921년에는 쑨원이 이 곳을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로 정했다. 특히 국민당군의 요람으로 장제스의 정치적 기반이기도 했던 황포군관학교가 1924년에 광저우에 설립되어 1927년까지 광저우에 있었다.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에 대한 연계 파업, 1922년 영풍함 사건,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 1925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1926년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1925년 광저우에서 국민정부가 수립되었으나 1927년 우한으로 수도가 이전했다. 4.15 광저우 쿠데타가 일어나 난징에 이어 공산당 숙청이 시작되었고 1927년 11월에 장파쿠이장황사변을, 12월 11일 중국 공산당광저우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진압당했다.
1931년 탕산 사건이 일어나자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어 1차 양광사변이 일어났으나 만주사변의 발발에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1932년 광저우 국민정부를 취소하고 난징 국민정부와 통합했다. 이후 광동 군벌 천지탕이 지배했으나 1936년 2차 양광사변의 실패로 그가 몰락하면서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위한머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1938년에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후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 두 방을 쳐맞은 일본이 중화민국을 포함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해 일본은 전쟁에서 졌으며 일본군 패배 이후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이후 국공내전 발발 후 국민정부가 다시 이쪽으로 오기도 했다가 결국 공산군 즉 중공군에게 점령되어 중국 공산당의 영토가 되었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야 항구로 무역이 재개했다.
1980년 중국이 개방될 당시 경제특구들과 가까운 광저우가 최대도시 상하이와 함께 주요 무역항으로 지정되었고 특히 홍콩과 가깝단 이점을 살리게 된다. 1997년 홍콩이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반환되어 흡수되자 홍콩과의 연계는 더욱 늘어나게 되며, 광저우둥역- 홍함역 간 직달열차, 광저우난역-홍콩사이까우룽역고속철도, 고속버스는 물론 선박까지 다양한 교통이 오가게 된다.

3. 경제


[image]
▲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조사한 광저우의 경제 규모. GDP(국내총생산)가 3,204억 달러로 총 25위를 차지했다. 사실 홍콩이 과거 중국에 반환되기 전에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서 중국 정부의 입김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이 광저우가 광둥 지역이자 중국 남부 지방의 실질적인 제1 경제 도시권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직물 관련 산업이 발달했고, 오늘날에도 이쪽 계통에 있어서 주요도시로 꼽힌다. 이 외에도 첨단 IT 산업체들이 대규모로 입주해 있으며, 일대일로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 정부에 의해서 전략적으로 육성되고 있는 중이다. #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 푸조가 이곳에서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자동차를 생산했다. 중국 내에서도 각종 짝퉁이 생기며(...) 2016년 겨울 한국에서도 진출해 점포를 늘려가는 중국 저가 라이프스타일샵인 미니소가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완구 도매시장이 이곳에 위치해 있다. 완구 도매시장 이외에도 다른 도매시장들의 규모가 넓은 편이다. 홍콩, 대만에 있는 장난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넘어온다.
KINTEX의 3배나 되는 실내전시면적을 자랑하는[9] 수출입상품교역회전시관이 위치해 있다.

4. 문화


광동어의 중심지다. 물론 광동어를 일상에서 쓰는 곳은 홍콩과 마카오 둘 뿐이고 여기선 중국 정부의 강력한 표준중국어화 정책으로 광동어는 가정에서만 쓰이는 형편이다. 게다가 요즘 세대 광저우인들은 대개 부모 중 한쪽이 외지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광동어를 못 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광저우 광동어는 홍콩 광동어의 모체이지만 홍콩 쪽은 영어 차용어가 절반 이상이라 단어는 꽤 다르다. 마카오의 광동어는 애초 서부 광동지역이 주축에 포르투갈어의 영향도 강해서 아예 이질적이다.
요리 문화도 발달해 있는데, 광저우 요리는 4대 광동 요리 중 하나로 손꼽힌다.
광동식 경극과 광동 음악의 중심지이며, 현대 광동 음악은 홍콩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광동식 경극은 월극이라 하는데 홍콩에서 주로 상영되며 중국본토인 이 쪽은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조금 쇠퇴한 감이 있다.

4.1. 스포츠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의 개최지이다.
프로 스포츠 구단들도 성업 중인데, 특히 축구의 인기가 높다. 부동산 부호가 인수해서 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의 연고지이다.
또한 헝다 덕분에 존재감이 떨어지는 광저우 푸리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푸리 역시 헝다만큼은 아니지만 중국 슈퍼 리그에서도 돈을 많이 쓰는 편에 속한다.
중국 슈퍼 리그 뿐만 아니라 홍콩 프리미어 리그에 참가중인 R&F 사커 리미티드도 광저우를 연고지로 두고 있다.
농구도 인기가 있는 편이며 중국 농구 협회 소속의 롱 라이온즈가 이곳을 연고지로 두고 있다.
광저우에 연고를 두고 있는 e스포츠 구단으로는 오버워치 리그광저우 차지가 있다.

5. 교통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 홍콩 국제공항,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에 이어 네 번째로[10] 교통량이 많은 광저우 바이윈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다. 중국남방항공FedEx의 아시아 허브 공항이다.
철도도 잘 갖춰져 있는데 광저우베이역광저우난역에서 징광선강고속철도를 이용할 수 있으며 광저우역 등에서 도시간 광역철도를 이용할 수 있다. 광저우 동역에서는 구룡반도 홍함역으로 직행하는 직달열차를 이용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MTR사가 운영하는 한국의 구 새마을호급 특급열차인 KTT도 들어온다.
광저우 지하철과 시 외곽의 고속도로가 시내 교통을 담당한다. 광저우 지하철둥관 지하철선전 지하철과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져 있으며 홍콩 지하철과도 동철선 로우역록마차우역에서 환승 가능하게 되어 있다. 물론 홍콩은 홍콩 달러옥토퍼스 카드를 써서 쓰는 돈부터 다르고, 그 전에 특별행정구 경계를 넘어야 한다. 중국본토 후커우 소지자의 경우 중국 정부의 홍콩/마카오/대만지구 입경허가가 없을 경우 당연히 홍콩으로 못 간다. 반면 홍콩 입국시 90일 내 무비자인 대한민국 여권 보유자는 홍콩으로 가는 건 전혀 문제가 없다.[11]
선박교통의 경우 난샤구에 위치한 난샤 페리 터미널(南沙码头)과 판위구에 위치한 리엔화 페리 터미널(莲花码头)에서 홍콩으로 이어지는 쾌속선을 이용할 수 있다.

6. 매체에서의 등장


  • 요리왕 비룡(신 중화일미)에서 양천주가가 여기에 위치해 있다.

7. 여담


도시 이름을 정체로 쓰면 廣州, 넓은 고을이라는 뜻인데 경기도 광주시(廣州)와 한자가 같다. 자매 결연은 경기도 광주시가 아닌 광주광역시('''光'''州)와 맺었다.광주광역시 쪽은 '빛고을'이라는 뜻이다.
광저우의 공안 마스코트 '방니'[12]가 포돌이를 그대로 표절한 것. 2003년 스펀지에서 광저우 지역 경찰서에 연락하여 표절 이야기를 하자 일절 무반응과 같이 필사적으로 피해다녔다고 한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뭔가를 주문하면 열에 아홉은 이 동네에서 출발하거나 이 동네를 거쳐 한국으로 온다.
북회귀선보다 남쪽에 있다. 위도가 꽤 낮아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남십자성이나 아케르나르,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등을 관측할 수 있다. 다만 높이 떠오르지는 않는 편이다. 아케르나르는 이 도시에서도 지평선 위로 10도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한나라 때는 세차운동 때문에 거의 지평선에 붙어 보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중국 내에서는 한국의 대전광역시처럼 도시는 큰데 특색이 없는 지루한 곳으로 취급받는다. 인근의 홍콩, 선전, 마카오가 경제와 관광의 중심지로 중국 국내외적으로 유명한것에 비해서 광저우는 존재감이 약하다.

[1] 본래 광둥우정식 병음이지만 광저우시를 뜻하는 말로도 자주 쓰인다. 로망스어권(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에서는 아예 광저우시를 표기할 때 한어병음이 아닌 이 Cantón으로 적는다.[2] 해당 인물은 serpentza라는 유튜버로 중국에 10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3] 중국의 4개 직할시는 베이징, 톈진, 상하이, 충칭이다.[4] 심지어 분지 지형에 지랄맞게 더운(...) 날씨도 똑같다.[5] 여기서 난링 산맥의 남쪽이라는 뜻의 링난 즉 영남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의 영남과는 다르나 제2도시(부산/광저우)를 끼고 있는 점에선 똑같다.[6] 월계군벌이라고 한다.[7] 삼국지 시리즈에서 나오는 남해가 이 광저우다. 정확하게는 남해군 태수 치소가 설치된 남해군의 번이현이다.[8] 바닷길을 통해 광저우로 들어온 아랍인 상인들은 황소의 난 당시 광저우와 함께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9] 338,000㎡[10] 특별행정구 홍콩을 빼면 사실 세 번째다.[11] 오히려 한국 국적자들이 홍콩-> 중국으로 갈 경우 중국은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다 입국심사가 꽤 까다로워 오히려 고생한다. 동철선 로우역은 선전 도착비자를 공안이 발급해주지만 수수료가 꽤 센데다 도착비자는 입국이 더 까다롭다.[12] 帮你. '당신을 도와주겠다' 라는 뜻의 중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