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비엔날레
1. 개요
광주광역시 일대에서 미술을 주제로 개최하는 '''국제미술전'''. 비엔날레는 2년마다 열리는 미술전을 말한다.[3] 1995년 1회를 개최한 것을 기점으로,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2년마다 2개월 내지 3개월에 걸쳐 개최되는 축제로 자리잡혔다. 2018년 9월 ~ 11월에 12회 광주 비엔날레를 개최했다.
2. 특징
주최측은 광주비엔날레 재단이다. 광주시에서 '예향 광주',[4] '문화수도 광주' 브랜드를 각인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개최하였다. 광주 비엔날레 개최로 인해 광주는 문화도시 이미지를 높이는데 도움을 받았다. 국내 미술 관련 비엔날레 중에는 부산 비엔날레나 미디어시티 서울과 함께 가장 인지도 높은 비엔날레이다. 세계구급으로 따지면 이 둘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다.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하지만 정작 국내 미술애호가들도 겉으로 보기엔 부산 비엔날레나 미디어시티 서울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아서 이를 실질적으로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생긴 년도도 1992년 생긴 타이페이 비엔날레[5] 에 이어 두번째로 생겼으니 동아시아에서는 상당히 오래된 비엔날레다. 1990년대만 해도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로 비엔날레, 휘트니 비엔날레 정도가 유명 비엔날레의 전부였다. 일본도 비엔날레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가 2001년 시작됐다.
본래 1995년에 개최되면서 홀수 해 가을에 개최하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2002년 월드컵 개최 시기에 맞춰 월드컵 관광 수요를 맞추기 위해 3회 비엔날레를 2000년 봄에 개최, 2002년 4회 비엔날레를 개최하여 현재의 짝수 해에 개최가 고정되기 시작했다. 5회 비엔날레부터는 다시 가을에 개최되는 것으로 변경, 지금과 같은 개최형식이 결정되었다. 개최장소는 용봉동 소재 비엔날레 전시관을 포함한 중외공원 일대가 주요 장소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광주 지역 여러곳에 전시공간을 두기도 한다.
이렇게 광주 비엔날레가 일찍이 세계 미술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백남준의 선견지명이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미술계 물에서 놀면서 일찍이 미디어아트의 선구자 자리를 굳혔던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나 휘트니 비엔날레 등 세계 유명 비엔날레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광주 비엔날레 운영에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6] 그리고 아직 비디오아트나 미디어아트 개념이 없던 시절에 광주비엔날레에 '인포아트'라는 제목으로 자기 제자나 외국 동료작가를 데려와 선보이기도 했다.
2.1. 비인기와 오해
초창기에는 전국적으로 대규모 인원이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을 방문하면서 인기를 얻는가 싶었지만, 너무나도 난해한 예술작품의 이해도 저하와 소극적인 홍보가 겹치면서 예전과 같지 않은 상태이다. 1995년 1회 행사 때에는 100만명 이상이 찾았지만, 2010년에는 32만8000명, 2012년 22만8000명, 2014년에는 20만여명의 관람객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계속 5분의 1로 방문자가 줄었다.# 그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다음의 여러가지 원인이 꼽힌다.
- 공무원, 학생 동원 감소
F1 코리아 그랑프리처럼 광주 비엔날레도 공무원이나 학생들이 방문하도록 공문을 보내 관람객을 늘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런 관행이 없어지면서 실질 관람객 수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 경제나 사회 분위기의 영향
문화 행사 특성상 1997년 외환 위기나 대침체 등의 경제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문화생활을 즐길 여력이 없는데 관람객이 늘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2014년의 경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전반적으로 문화계는 물론 사회 분위기가 침체되어 관람객이 더 줄어들었다.
- 정치적 이슈의 영향
현대 시사를 소재로 하는 현대미술은 정치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2014년에는 민중미술계열 예술가인 홍성담 작가의 작품 '세월오월' 작품 철거 이슈가 문제가 됐다.# 2014 광주비엔날레는 공식 개막에 앞서 광주비엔날레 20주년을 맞아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대변되는 광주정신을 세계에 전파하겠다며 포럼과 세미나, 특별전 등을 기획하며 야심차게 출발했다. 그런데 이 특별전에 홍성담 작가가 5.18 민주화운동때 희생된 희생자들이 세월호를 들어올려 학생들과 일반인 승객들을 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세월오월'을 내놓으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이 작품 한가운데에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표현하고 풍자했다는 이유로 전시 유보 결정이 내려졌고, 미술계 인사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여기에 전시 유보 결정 배경에 예산을 지원하는 광주시의 압박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일부 작가들이 작품을 철거하는 소동까지 빚어졌다. 결국 '세월오월' 사태는 재단 대표이사의 사퇴로 이어졌으며 홍성담 작가가 작품을 자진 철거하면서 일단락 지어졌지만 많은 과제를 남겼다. 이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관련글을 검색해보고 알아서 할 것.
- 주최측의 안일함
국고 100억원이 넘게 들어가는데 비해 광주비엔날레 주최측이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우선 전시 구성이 짜임새가 없고 산만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여기에 전시된 작품 중에 영상 작품이 많은데, 일부 작품은 러닝타임이 한시간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 작품이 자막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세계 유명 작가들의 전시를 반복해서 비엔날레에 내놓다 보니, 웬만큼 미술계 전시를 둘러보는 미술애호가들은 봤던 작품을 또 보게 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여기에 비애호가들을 위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많이 듣는다. 한마디로 말해 비엔날레 처음 온 일반인들 입장에선 '이게 뭥미?' 전시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글과 전시주제가 다소 추상적이고 어려웠다는 평가가 대표적이다. 흥보나 미술 교육에 더 신경써야 한다는 지적을 많이 당하고 있다.
2016년 현재 광주비엔날레 제 4관에 전시된 모든 영상 작품은 한국어 자막이 제공되며, 일부 작품의 경우 감상자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오디오 단자 역시 제공 중이다.
- 한국 사람들의 문화 취향, 성향상의 문제
한국 사람들의 문화 성향도 원인 중 하나로 지적받는다. 전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영화나 방송 드라마 등의 내러티브가 있는 예술매체를 더 선호한다. 아니면 등산을 가거나 노래방에 가거나 회식을 즐기던지. 영화에서 천만관객이 넘는 작품들이 종종 나오는 것을 생각해보자.[7]
반면 미술 분야는 조용히 혼자 감상하는 개인주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조용히 관조하고 곰곰히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한데, 이는 성미가 급하고 직설적인 한국 사람들의 성향과 정반대되는 면이 없지 않다. 게다가 현대 대중매체와 상업예술 중심의 문화에서는 화려하고 현란한 것(영상 이미지, 강렬한 비트의 음악 등)을 빠르게 소모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얌전히 작품을 보고 마음 속으로 감상하는 태도는 한국 사회에서는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군대문화가 강한 것도 이에 일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대적으로 미술 감상은 사나이답지 못한 것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대중성을 따르자니 광고나 영화 등과 같은 상업미술과 차별성이 없어지고, 예술성을 추구하자니 일반인들이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고집을 꺾고 그냥 과거의 예술로 돌아가거나 상업예술처럼 갈 것이냐, 아니면 뚝심을 지키면서도 적절한 절충점을 찾아낼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 부분은 현대미술 자체의 고민거리와도 상당 부분 연결되는데, 이는 해당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2.2. 역대 비엔날레
3.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가 짝수 해에 개최되면서 행사를 개최하지 않는 홀수 해에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5회까지는 광주비엔날레 재단에서 시행했으나 6회부터는 광주디자인센터에서 별도로 진행하게 되면서 별도의 문서로 분리했다. 항목 참조.
4. 여담
- 1회 비엔날레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나름대로 로고송이 있었다. 개똥벌레를 부른 가수 신형원의 '마음의 문을 열고'가 비엔날레의 주제가였다.
- 1995년 1회 비엔날레의 전시작품 중 누에고치를 이용한 설치작품이 있었는데,[9] 설치 후 관리실패로 한때 용봉동 지역의 누에나방 개체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 민원이 잇따르기도 했다.
- 1회 비엔날레 참석자였던 대만 원로 수묵화가 관집중(管執中)이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 2007년 광주비엔날레때는 신정아 스캔들로 때문에 이사진이 전원 사퇴하기도 했다.# 결국 2007년 광주비엔날레는 오쿠이 엔위저 혼자 진두지휘 했다.# 2007년 행사의 성공은 이 오쿠이 엔위저의 공이 크다. 오쿠이 엔위저는 세계 미술계에서 꽤 유명한 전시기획자이다. 엔위저는 '연례보고:일년동안의 전시'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주제를 내세우기보다 지난 1년간 국내외의 주목할 만한 기획전의‘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광주의 전시공간-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주시립미술관, 의재미술관으로 옮겨오는 컨셉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이것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아 성공했다.
- 2000년 3회 비엔날레 작품중에 일본 작가인 미야지마 타츠오가 나가사키 원폭 현장에서 살아남은 감나무의 자손나무를 심었는데,[10]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누군가에 의해 잘려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 2016년 광주비엔날레 홍보대사는 현빈이다.
- 구 도청 자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 후, 비엔날레 전시의 일부분이 문화전당에 옮겨져 전시를 진행하기도 한다.
- 그러다가 2017년부터, 기존 북구 비엔날레관에서 개최하던 광주비엔날레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새로 이주하여 개최를 한다고하여, 접근성과 퀄리티가 더 높아질것으로 기대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2017년 8월 28일 광주광역시 발표에 따르면 2018년 비엔날레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개최하고, 그 후에는 구 비엔날레관 주차장 자리에 새 비엔날레관을 지어서 운영할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아시아문화전당 건설로 인해 훼손되었던 구 전남도청 건물군을 5.18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여 아시아문화전당의 5.18 기념관으로의 역할 변화 등이 예정된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2018년 광주비엔날레 홍보대사는 진영(B1A4)이다.
- 2018년 11월 처음으로 북한 미술작품 전시를 했는데, 작품 일부가 유엔과 한미의 제재 대상인 만수대창작사의 중국 미술관 대표 지모씨의 소유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재단은 대여료로 우리 돈 2천800여만원를 지씨의 개인 계좌로 입금했다. 지씨는 한족이며 지씨의 미술관은 민간 법인이라 제재 대상에 올라있지는 않다. 광주비엔날레 재단 관계자 또한 '지씨의 미술관이 만수대창작사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제재 대상에 오른 것은 아니어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 밝혔다.
5. 관련 문서
[1] 1회부터 11회까지의 메인 전시장[2] 12회의 메인 전시장. 실질적인 개장 첫 해였던 2016년에는 보조 전시장으로 활용되었다. 12회 이후에도 메인 전시장으로 기능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구 전남도청 복원 문제로 무산되고 원래 북구 메인 전시장을 리모델링하여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되었다.[3] 3년마다 열리면 트리엔날레, 4년마다 열리면 카토리엔날레라고 부른다. 5년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전으로는 카셀 도큐멘타가 있다.[4] 예전부터 광주를 예(禮)의 고장이라는 의미에서 예향이라고 많이 불렀다.[5] 타이페이시립미술관이 1984년부터 1991년까지 격년제로 열었던 '대만 현대미술 트렌드'전과 '대만 현대 중국 조각'전을 1992년 합친 '타이페이 현대미술 비엔날레'로부터 출발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6]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이나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 개최도 백남준의 영향력 덕분에 성사된 일이었다.[7] 넓게 보면 피시방 중심의 한국 게임 문화도 이런 맥락과 통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한 콘텐츠를 즐긴다는 면에서 말이다.[8] 고은 시인의 작품에서 이름을 따왔다.[9] 작품명은 전수천 작가의 '자연과 문명 사이'.[10] 작품명은 '시간의 소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