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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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출신의 미국 국적 예술가.
그 특유의 파격적인 예술세계로 유명하며, 지금은 볼프 보스텔과 더불어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개척'''한 누구도 부정 못할 세계적인 예술가이지만, 비디오 아트 이전 시절에는 전위예술 퍼포먼스 아티스트였다.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플렉서스 멤버로 퍼포먼스 예술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다.[5]
2. 일생
2.1. 유소년기
백남준은 조선 직물업계의 큰 손이었던 친일파이자 굴지의 기업인인 백낙승 의 아들로 태어났고, 덕분에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집에는 피아노나 전축은 물론 당시에 서울에 딱 2대 밖에 없었던 캐딜락도 있었고, 해방 전에 유치원(애국유치원)에 다녔으며 6.25 전쟁의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을 정도의 부잣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돈은 물 쓰듯 쓰는 거다'라고 했다고 한다(...).[6] 그의 조부 백윤수 또한 청나라 비단을 독점 판매했던 거부로, 종로5가와 동대문시장 일대의 포목상 절반이 그의 것이었고, 국상 때 만조백관의 상복과 제복을 일체 도맡았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막강한 실력자였다. 후에 그는 직물, 대부업, 제약회사 등을 세웠고, 재산은 한성은행 자본금의 3배에 달했다.
백남준은 당시 상류층만 다니던 수송국민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7] 를 다녔는데, 해방 전 그 시절에 학교에는 풀장과 영사기가 있어서, 당시 학부모였던 대한극장 사장이 학교에서 직접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경기중학교 음악교사로, 후에 이대 음대학장을 지냈던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으로 무기구입을 위해 홍콩으로 갔다는 설이 있는 부친 백낙승[8] 의 통역으로 따라가 홍콩의 로이덴 스쿨로 전학한다. 백남준은 이때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게 된다.
2.2. 행위예술가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여권[9] 과 일본 비자가 있었던 백남준은 도쿄로 넘어가서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0][11][12] 그리고 대학원을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 독일 뮌헨 대학교로 진학하여 철학 석사와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13][14]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쯤 존 케이지나 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접한 뒤, 행위예술가로 변신하게 된다.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선을 그리는 것도 사실 백남준이 했던 퍼포먼스다. 이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고,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사실 백남준이 1964년 미국 뉴욕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었다. 무대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기도 했다. 1967년에 백남준이 누드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공연하다가 샬롯이 경찰에 체포당해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하다.[15] 그 결과 백남준은 미국 예술계에서 제대로 된 예술도 못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람, B급 예술가 정도로 치부되었다.
B급 예술가라는 것은, 당시의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언급일 수도 있다. 당시 60년대에서 70년대에는 서서히 퍼포먼스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고, 물론, 현대에는 현대미술하면 알 수 없는 무용과 행위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이전 예술은 단순히 회화아니면 조각 정도로, 이루어지는 오브제 중심적인 예술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오브제 없이 예술가의 행위 자체와 관람객이 느껴야하는 '경험' 위주의 예술은 매우 비주류라고 할 수 있으나, 개척기이자 태동기였다.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쉽다.[16]
후에 퍼포먼스예술은 80년대 이후 대중예술에서도 독특한 무대연출(패션쇼, 콘서트, 오케스트라 등)로 발전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제대로 된 무대연출을 할 줄 아는 아티스트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퍼포먼스예술이 현대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것은 종합예술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2.3. 결혼
오노 요코 때문에 잠깐 존 레논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그 당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요코는 존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고, 백남준은 꽤 충격 받았던 듯. 존 케이지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며 비디오 아트 예술가 이전에는 피아노 행위예술가로도 알려진 바 있다. 무엇보다 연주하다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숴버리던 짓도 곧잘 했었다.
1977년 자신과 같이 행위예술 작업을 했던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1937.8.2 ~ 2015.7.23)와 결혼했다. 구보타 시게코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자신의 남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결국 결혼.[17] 이혼녀[18] 인 구보타 시게코가 자궁암으로 불임 진단을 받고 엄청난 수술비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백남준이 본인 명의의 의료보험 혜택을 활용하자며 '''먼저 청혼'''을 하고[19] 결혼 후에도 구보타 시게코의 불임 진단과 의료보험과 관련해서는 주변 친구들에게 전혀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면, 백남준의 구보타 시게코에 대한 배려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으며, 구보타 시게코 역시 이런 백남준의 배려와 사랑에 사후에도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백남준과의 삶을 회고하는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을 출간하기도 했다.# 다만 양자격인 백남준의 조카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갈등을 빚어서 이미지 하락을 겪기도 했다. 이후 암 투병중이던 구보타 시게코는 2015년 7월 23일 만 77세로 작고했다.
2.4. 비디오 아트
B급 예술가로 치부당하는 와중에도 백남준의 인지도는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고, 기괴한 퍼포먼스를 하며 조금씩 시도했었던 비디오 아트는 점점 백남준의 예술 세계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백남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20] 1974년부터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선보였으며, 영상이 지상파 TV에 방영되는 등 점점 유명해지고 예전과 다르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결국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전시되었고, 뉴욕 뿐만이 아닌 미국 예술계에 큰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바쁘게 활동하였다.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조각과 교수로 있었는데, 뉴욕에서 작품활동 하느라 바빠서 학생들을 자주 보지 못해 미안해 했다고 한다.
위 작품은 1973년 백남준이 선보인 Global Groove라는 세계최초의 뮤직비디오[21] 다. 물론 당시에는 영상을 편집할수 있는 장비가 없었는데, 신시사이저라는 영상편집장비를 일본기술자와 힘께 직접 만들어서 그 장비를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1984년 새해 벽두에 전세계 동시송출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23][24] 의 풀 버전 영상.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프로그램'''인데다 더불어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의 '''다원생중계'''였다! 훗날 이 작업은 인공위성 예술의 대표적 사례로 불리게 된다. 현대음악가의 전설로 남은 존 케이지가 나오는가 하면,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배우 이브 몽땅이 신나게 탭댄스 추며 노래도 부르고, 현대무용의 거두이자 '뉴 댄스'의 창시자인 머스 커닝햄, 살바도르 달리까지 이곳에 등장한다. 후반부에 진지하게 첼로를 키는 장면은 압권. 전반적인 스토리는"'''오웰, 당신이 예측한 억압과 광기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현재를 잘 살고 있다.'''"로 전개된다.
실제로 소설 1984에는 발달한 과학이 텔레스크린같은 것처럼 오히려 인류를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데, 백남준은 발달한 과학을 이용해 예술의 새 지평을 연 셈. 예술의 신기원을 열면서 동시의 영미문화의 대작가를 비판(혹은 비평)하고, 아울러 현대 과학의 발전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갖춘 셈인데, 이렇게 보고 위 동영상을 보면 소름이 쫙 돋는다. 오직 1984년에만 할 수 있는 예술인 셈.
1986년에는 <바이 바이 키플링>이라는 작품으로, 러디어드 키플링(1936년 졸로 당시 사망 50주년)의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동양과 서양은 절대로 서로 어울릴수 없다'(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주제로 도쿄, 뉴욕, 서울의 '서구'와 '비(非)서구'의 모습을 순서 없이 뒤죽박죽 방영하면서 동양과 서양 모두 동일한 시간축에 살고 있음을 역설하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상대를 봤을때 신기하고 자기들 끼리는 비슷비슷해보이는 것 처럼, 제3의 생명체가 봤을떈 동양과 서양 둘은 쌍둥이처럼 같아보인다는 논리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철저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딕 카벳과 류이치 사카모토가 출연하기도 했다. KBS-1, TV아사히, WNET 의 세 방송사에서 방송되었다. PBS, NHK에서 방송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바이 바이 키플링>은 당시 한국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는데, '1등을 달리고 있는 일본인 마라토너의 모습'등 아시아의 문화적 선두주자는 일본이라는 암시가 포함된 장면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 영화등 주류 일본 문화가 금지되어 있던 한국의 입장에서 이런 메세지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언론에서는 백남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잠시 일었다. 그렇지만 올림픽을 앞두고서 결국 다시 백남준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 1주일전, <손에 손잡고>라는 작품으로 2년전의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더 많은 참가국가로 극대화 시키며,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과, 전세계의 조화와 공존을 담아내면서 백남준의 위성 연작 3부작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비로소 한국에 알려지게 된다. 사실상 한국은 백남준에 대해서 역수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백남준이 일본에서 뉴욕에 가기까지는 한국에서도 무명이었고, 그가 현지에서 악평을 들을 때도,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를 때 까지도 한국에서는 잘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사실 백남준보고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실감이 안나기 마련이다.[26]
그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한 기자가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백남준은 초기의 악동 행위예술가 같은 이미지는 거의 없고, 88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다다익선 같은 작품처럼 오로지 텔레비전 여러 대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아있다.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는 데 많은 TV가 필요했는데, 초기엔 소니 제품을 쓰다가 어느 시점 이후로는 삼성전자의 협력을 받아 삼성 TV를 사용하였다. 이 때를 즈음해서 삼성 텔레비전 광고도 찍었다. 백남준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오리지널 서울 사투리가 정겹다.
1995년 8.15 광복 5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제작된 칠성사이다 CF에 출연하여 과거 칠성사이다의 CF 영상들과 시대별 영상자료들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웅장함으로 뇌리에 깊숙히 남는 1편의 BGM은 가수 김수철이 작곡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에도 동방으로부터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직전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27]# # 그의 유해는 한국, 미국, 독일에 분산되어 안치되었으며, 한국에 있는 유해는 봉은사에 안치되어 있다.# #
3. 평가
백남준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첨단기술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상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매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를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작업을 선보인데 반해,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전자회로 관련 기술도 직접 공부하고 아베 슈야 같은 기술자와 협력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작품 <etude 1>(1967-1968)을 만들기 위해 벨 연구소에서 포트란 언어로 코딩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저술이나 이론 작업도 꽤 많이 했다. '전자 고속도로'를 예견한다든지, '인포 아트'에 대해 논한다든지, 하이패스와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지금 읽어보면 당연하고 뻔하다 싶은 내용을 써놓은 경우가 많지만, 인터넷이 나오기도 전에 그런 예견을 했다.
예술가들은 항상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 마다,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데 당시 TV는 '바보상자'라고 부르면서, TV를 비롯한 미디어 컨텐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였고 좋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실상 비디오 아트 뿐 아니라 미디어아트를 논할 때도 백남준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힘들 정도다. 실제로, 미디어아트 관련 서적에 백남준은 적어도 한 구절씩은 꼭 들어가 있을 정도다.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품목에 넣은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해외 예술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거나, 휘트니 비엔날레의 경험을 살려서 광주비엔날레 조직에 큰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미술 역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 국내 소장 미술관
2008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백남준아트센터'''를 개관했다.[28] 주로 현대미술을 위시한, 퍼포먼스, 개념, 설치 미술이 중점적으로 전시되며, 정기적으로 행위예술 페스티벌이 열리곤 한다. 또한 용인 마북동에 있는 한국미술관은 그의 작품과 그의 아내의 작품이 자주 전시된다. 이래저래 백남준과 용인은 인연이 깊은 듯.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 외에는 다음의 기관에서 백남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엄청 큰 작품을 갖고 있다. 모니터가 자그마치 1003개... 작품명은 '다다익선'. 수리할 때가 되었는데 이미 단종된 CRT를 구해서 고칠지 이참에 LCD로 바꿀지 고민하더니 그냥 CRT로 고친듯. CRT의 수명 문제와 부품 노후화로 화재나 폭발 등의 가능성이 있어 2018년 4월 18일 부로 가동이 중단되었으며 2022년 복원을 목표로 수리방안을 찾고있다. 2006년 4월 25일 1998년 작품 고지도2 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작품을 전시하다 논란이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서양의 옛 지도를 오브제로 이용한 작품으로 동해를 표시돼야 할 자리에 일본해를 뜻하는 불어 '메르 뒤 자폰(Mer du Japon), 일본해'라 씌여 있다. 기사1 기사2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층 통로에 설치되어 있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전시물인지 모르고 지나친다. 작품명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1965-67>
- 대전시립미술관: 1993년 대전엑스포당시 재생관에 전시되었던 비정수의 거북선[29] 이 있다. 근래까지 재생관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현재 대전시립미술관으로 이동, 수리후 전시중이다.
- 삼성미술관 리움: 2동 1층에
전시중. 도슨트가 투어 중에 설명해주는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 부산시립미술관: 1층 로비의 <덕수궁> 외에 4점 보유.
-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 1997>가 전시되어 있다.
- 서울시립미술관: 1층 로비에 <서울 랩소디> 전시 중.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서울 판타지아', '네 마음 속의 서울' 등 영상이 담겨있다.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 <호랑이는 살아 있다> 영구설치.
- 수원역 AK프라자: 6층 문화센터 입구에 전시중. 2003년 수원역 민자역사 (개관당시 애경백화점) 준공 당시부터 2층 로비에 있었던 작품이지만 AK프라자 측이 매각을 시도한적이 있어서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 우리들병원: 병원로비에 <안심낙관> 작품이 전시중이다.
- 한국산업은행: 여의도 영업부 로비에 1점. 산은본점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니 눈으로만 보자.
- 하나금융투자 여의도 본점: 1층 후문[30] 쪽에 <하나 로보트, 2001>, <초고속 경제, 2001>, <시집온 부처, 2001>, 총 세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촬영과 출입이 자유롭다.
-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중앙도서관): 로비에
라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출입통제 및 사진촬영 금지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로비 앞 출입게이트에 있는 경비가 해당 작품을 감시하고 있다. - 효성그룹 본사(공덕동): 1층 로비에 <백제무령왕>,
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 SK증권 여의도점: 1층 로비에 <개선장군>이 전시되어 있다.
5. 해외 소장 미술관
- 미국 워싱턴 DC의 허쉬혼 미술관과 아메리칸 아트 미술관
- 예일 대학교 미술관
-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 일본 후쿠오카의 후쿠오카 미술관과 캐널 시티 하카타
-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주립미술관
- 독일 쾰른의 루드비히박물관
- 호주 캔버라의 국립미술관
- 호주 호바트의 MONA(Museum of Old and New Art)
-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 테이트 모던에서는 아예 백남준의 작품만을 전시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현대 자동차 후원관. http://www.tate.org.uk/visit/tate-modern/display/media-networks/nam-june-paik
6. 어록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1984년에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 질문에서.#[31]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
"그건 그렇고, '''30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선생님, 혹시 (곧 다가올) 21세기 말씀이십니까?"
"아니, '''1000년 후 30세기.'''"
백남준은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 속의 부처'''였다.
'''오노 요코''', 백남준의 장례식 추모연설 中
나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닙니다. '''세기(世紀)적인 예술가'''입니다.
2002년 무렵 경기문화재단에 보낸 친필 편지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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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큰 실수(?)를 범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 방미에 맞춰 백악관에 초대받은 백남준은 빌 클린턴 대통령 면전에서 그와 악수하다가 바지가 흘러내렸다. 아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단순한 실수였다고는 하는데 당시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연이은 섹스 스캔들에 시달렸던 클린턴을 '빗대어' 이 같은 '퍼포먼스'를 했다거나 '전자 정보 고속도로'라는 단어를 클린턴이 마음대로 가져다 사용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등 각종 설들이 나왔다.[33] 이 당시 백남준의 표정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러한 설들이 더 부추겨진 면도 있는 듯. 그러나 이미 1998년은 한 번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이기에 표정 변화가 없는 점은 감안할 수 있다. 영상에서도 실제로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 보인다.
-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과 앞글자 두자가 동일하고 연령대도 비슷한데다[34] 두 사람 모두 국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관계로, 80~90년대에는 대중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은근히 헷갈려 하거나 백남봉이 백남준의 짝퉁 취급[35] 을 받는 안습한 경우도 많았다. 물론 최근인 2006년 백남준의 작고와 더불어 2010년 백남봉까지 작고하면서 이런 혼란은 완전히 사그라든 듯 하다.
- 일본의 작곡의 신이자 YMO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YMO의 PV를 보면 백남준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볼 수 있다.[36]
- 현재까지 백남준의 영향력은 미술사, 예술가, 음악가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발휘되고 있으며, 최근 나온 Martin garrix - Yottabyte 뮤비에서 나온 비디오 아트, 이은결 마술사의 일부 마술 트릭도 다 백남준 미술가가 개척한 장르라는 걸 생각하면, 전공자가 아닌 사람한테 생소한 현대미술이라는 장르를 대중들한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사람 중 하나라는 걸 알 수 있다. 최근엔 비디오 아트가 여기저기서 재해석되면서 의외로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 브라운관의 수명이 다하면서 그의 대표 작품인 다다익선의 보존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 1998년 예술계에 기여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이다.[37]
- 최경한 서울여대 명예교수(서양화가)와 경기고등학교 47기 동기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서 같이 활동했다. 백남준 사후 백남준미술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고교 1년 후배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다.
- 백남준의 작품과 관련해서 미술평론가 손철주가 쓴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책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1992년 8월 한 화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다가 본 광경으로, 두 여고생이 전시된 작품들 중 속을 뜯어낸 진공관식 TV 속에 촛불 하나가 켜진 〈TV 촛불〉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한 명이 "야, 이것도 예술이냐?"라고 묻자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다른 여고생 曰, "아니, 예술이 아니고 기술이지. 일주일 전에 봤던 촛불이 아직 안 꺼졌잖아."(...)
[1] 오른쪽은 아내인 구보타 시게코[2] 당시 6년제 중.고등학교 통합 학제였기 때문에 중학 과정 수료 후 영국령 홍콩으로 유학을 떠났다.[3] 부전공 음악사학[4] 재혼했다.[5] 퍼포먼스 예술은 그 이전 예술에서는 볼 수 없는 현대예술의 대표적 예술활동인데, 플렉서스 멤버들과 했던 수많은 퍼포먼스가 이제는 주류 예술이 되었다.[6] 사실 부자들이 소비를 많이 하면 금전의 회전율이 높아져서 경제에 도움이 되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7] 당시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1938년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변경. 지금의 중학교가 아닌 중고등 과정이 통합된 구제 중학교 과정.[8] 1956년 사망 후 백남준의 큰형이 태창방직을 경영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 부정축재 대상자가 되어 태창방직이 국고로 몰수되었다. 이후 온가족이 일본으로 망명 후 귀화했다.[9] 여권 번호가 '7번'이었다.# 그 당시에 여권 번호는 발행 순서대로 부여되었다.[10] 수험 준비 기간이 3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전설이 있다. 백남준의 가족은 백남준이 법학부나 경제학부에 지망할 거라고 생각하고 입학 절차를 전적으로 백남준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입학 전 도쿄대학에서 학부모 모임을 초대하는 편지에서 백남준이 문학부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11] 도쿄대학의 체제상 지원당시는 문학부로의 지원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전공은 교양과정을 이수하고 정하는 것.[12] 사실 어릴때부터 백남준은 기업인이나 정치가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강했다. 어린 시절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과달카날 레퀴엠 같은 이후의 작업 경향을 봐도 권위주의나 군국주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약간 오늘날의 강남 좌파 같은 느낌이 있었던 듯. 이 때문에 독일 유학 때는 유학비를 제한받을 정도로 부친과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할때 사용할 비싼 텔레비전을 구하는데에는 백남준 집안의 도움이 컸다.[13] 동경대에서 전공한 미학이 음악미학이다. 학부때의 부전공도 음악사학. 이미 이전부터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다.[14] 뮌헨대학에서의 공부도 그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다 진취적인 분위기의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옯겨서 현대음악 공부를 더했다고... 뮌헨대학의 석사학위를 완전히 마쳤는지는 자료에 따라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15] 샬롯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당시 뉴욕 예술계는 유죄 판결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당시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록펠러 가문 출신, 후에 미국 부통령)는 예술적인 퍼포먼스라면 누드라도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을 개정하게 만든다. 이로써 뉴욕은 퍼포먼스에 관해서 보다 자유롭게 변했다.[16] 물론 행위 예술이 남발하고 있는 현대에도 그림이나 조각이라는 '물질'의 존재 없이 퍼포먼스를 예술로 삼는 예술가들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서도, 당시 예술계에 이단아들이자, 맨땅에 퍼포먼스 예술을 시도한 '플럭서스'의 일원이며 그중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백남준의 수준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17] 두 사람 다 재혼이었다. 백남준에겐 첫번째 부인이 있었다.[18] 게다가 전 남편은 다름아닌 백남준의 친구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맨이었다. 백남준을 기다리다 지친 상황에서 베어맨이 청혼을 해서 결혼하게 된 것. 하지만 일본인과 독일인을 싫어했던 시아버지 때문에 갈등을 빚고 결국 이혼한다.[19] 백남준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불임은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20] 볼프 포스텔(Wolf Vostell)이 먼저 TV를 사용하긴 했는데, 포스텔은 TV를 끈채로 부수기만 했다.[21] 당신엔 뮤직비디오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이다.[22] 초반부에 등장하는 노래는 로리 앤더슨의 Excellent Birds. 같이 부르는 남자는 피터 가브리엘로 2년 후 가브리엘의 앨범 So에 This Is the Picture (Excellent Birds)라는 이름으로 수록된다.[23] 이름이 왜 이런지는 영미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다.[24] 한국에서는 (편성표상은 1월1일)1월 2일 새벽1시에 KBS1에서 방송한적이 있다.[25] 풀버전의 30분짜리는 회원제 사이트에만 있다.[26] 박하 줄거리, 허영만 그림인 만화 비트#s-1.4를 보면 여주인공 로미의 부모가 부자인데 80년대 백남준 관련 작품을 티브이로 보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르면 수준이 낮다고 할테고 이런 생각으로 작품을 보면 당황해하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27] 유언은 "맛있어, 맛있어"로 아내가 해준 장어 덮밥을 맛있게 먹곤 얼마 안가 눈을 감았다고 한다.[28] 서울을 포함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현대미술관은 찾기어렵다. 난해하고,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백남준의 세계적 네임밸류로 인해, 해외의 현대미술작가들은 이 곳에서 전시를 많이 한다. 때로는, 해외에 엄청난 네임밸류를 가진 작가가 서울이 아닌,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열기도 한다.[29] 일반에는 텔레비전거북선으로 잘 알려져 있다.[30] 여의도역 쪽을 정문이라 가정. [31] 이 질문은 백남준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어느 기자가 했던 질문이다. 백남준의 이 명언이 201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한류의 영향력으로 전세계의 국가에서 한국 문화의 수출에 크게 기여하고 경제분야에서도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제대로 미래를 예견했고 소름돋는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32] 2인전이 끝나고 백남준과 강익중, 그리고 미국 월가(街)의 금융인들과 가진 식사자리에서 나온 대화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독서와 매일 두 시간씩 여덟 개의 주간지, 네 개의 월간지, 세 개의 일간지를 읽었던 백남준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월가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변화들을 꿰뚫어 본 그는 월가의 금융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직후에 나온 대화가 바로 문제의 30세기에 관한 질문. 후에 강익중은 30세기의 세상을 상상하던 백남준을 두고 낮에도 별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33] 클린턴의 스캔들을 비꼬아 사실 클린턴은 주위 사람의 바지를 벗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백남준이 당한 것이라는 드립도 나왔었다.[34] 백남준은 1932년생, 백남봉은 1939년생으로 두 사람은 7살 차이밖에 안 난다.[35] 참고로 백남봉의 경우 본명은 박두식으로 백남봉이라는 이름은 연예인 활동을 위한 예명인데, 백남준이 국내에 알려지기 십여년 전부터 이 예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백남준의 명성을 노린 것과는 전혀 관계 없다.[36] 실제로 사카모토 류이치는 백남준에 대한 존경을 담은 헌정곡 A tribute to NJP라는 곡을 작곡해 자신의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 등에 비교해보면 다소 전위적인(?) 곡.[37] 그 첫번째로는 작곡가 윤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