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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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도자기 장인들.
영어
china[1], porcelain[2]
한자
陶瓷器[3]
일본어
陶磁器, 瀬戸物[4]
1. 개요
2. 역사
3. 한국의 도자기
4. 와 도자기
5. 도자기의 유해성
6. 시대지역별 도자기의 종류
7. 참고 외부 링크
8. 관련 문서


1. 개요


진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의 총칭. 요즘은 세라믹이라는 신소재로 다시 각광받고 있다. 재료는 다르지만 제작 방식은 도자기와 닮았다. 정확히는 도기와 자기의 합성어인데, 도자기라 하면 보통 고운 태토(흙)를 써서 만들고 유약을 발라 구워 매끈하게 만든 자기를 떠올리게 된다. 도기에는 넓게는 유약을 칠하지 않거나 재, 자연 유약을 써서 만든 토기까지 들어가므로 꽤 넓은 의미 범위를 아우르는 단어가 된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은 도공 혹은 도예가라고 한다. 도자기를 이용한 예술은 도예라고 한다. 도자 공예의 줄임말.
예로부터 쓰인 재질로 여전히 , 접시, 화분 등을 만들 때 많이 쓴다. 인체에 무해하고[5] 방수성을 가지면서 높은 경도를 지니고 있고 만들 때 모양 내기가 쉬워서 그렇다. 다만 취성 재료인 데다 충격에 약해 잘 깨진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제품마다 달라 어느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금도 안 가는 제품도 있다.
한때 중국이 서양 등을 상대로 거래한 주요 물품. 실크로드나 배를 통해 자주 운송되었다. 그래서 영어로 도자기를 china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이게 귀해, 연금술사가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에 왕이 그 자리에서 스카웃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 중국의 백자를 수입하지 않고 자체 생산하려는 노력 끝에 유럽에서는 동물의 뼛가루를 이용해 하얀 색을 극대화한 본 차이나(Bone china)가 나왔다. 중국이나 한국의 백자가 일반적으로 백자 하면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창백한 백색을 띤 데 반해 본차이나는 특유의 우윳빛 같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기원이 기원이니만큼, 골동품은 메이드 인 차이나를 최고로 치지만 현대에 생산된 것들은 유럽제[7]를 더 높이 친다.[8] 도자기의 본고장인 중국에선 송나라 때 고려청자를 최고로 치며 비싼 값에 사와 모셔두었다는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800~1,000℃에서 구운 것을 '도기', 1,100~1,400℃에서 구운 것을 '자기'라고 하고, 합쳐서 도자기라고 한다. 그리고 1,000℃ 내외에서 자기가 되는 온도에 도달하지 못한 발전 중간형 그릇을 석기(stoneware, 炻器)라고 한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 800도 이하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 특히 굽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토기라고 한다.
실수로 깨뜨렸을 경우 파편이 상당히 날카로운지라, 과거에는 연싸움을 할 때 연줄에 사금파리(도자기의 깨진 조각)를 갈아 만든 가루를 풀 먹여 입히기도 했다. 과거 조선시대에 행한 압슬이라는 고문은 바닥에 사금파리를 깔고,[9] 무릎을 끓린 후에 무거운 돌을 얹거나 사람이 올라가 압박을 가해 고통을 주는 고문이었다. 일상속에서 도자기는 유리에 비하면 파편이 적게 나오고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깨진 유리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물질의 특성상 별다른 조치 없이도 매우 오래 보존될 수 있다. 인류가 멸종된 뒤에도 가장 오랫동안 남을 문명의 산물로 평가된다.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의 토기가 발굴되는 것이 그 예.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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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 토기
도자기는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굽던 토기가 그 기원이다.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음식을 저장할 그릇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토기는 원시적인 노천소성 기법으로 구웠는데, 굽는 온도가 600~800℃밖에 안 되어, 토기에 물을 담으면 쉽게 풀어져버리므로 사용에 제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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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암포라
고대시대에 도기가 등장한 것은 원시적인 가마가 등장한 뒤부터였다. 열의 방출을 막는 방법이 나오면서 1000℃에 달하는 열로 흙을 구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구워서 나온 도기는 물을 담아도 흙이 풀어지거나 물이 새지 않았다. 문명과 기술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도기도 단순한 음식보관용이 아닌 왕의 권위용이나 제사용으로 사용되었고, 제작기술도 발전했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당시 고대 문명의 도기 발전의 궁극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초기의 도기는 여전히 물을 흡수하는 성질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와인이나 고급 음식물을 보관하기 어려웠다. [10] 이런 와중에 중동에서 유약[11]이 나오고, 중국에서 (점성이 일반 흙보다 높은) 고령토를 찾아 사용하면서, 기존보다 훨씬 섬세한 도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중국에서 1300℃ 이상 온도로 굽는 가마기술까지 개발되어,[12]우리가 흔히 아는 자기의 초기 형태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자기는 음주예절이나 다도와 같은 고급 식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 등장한 자기는 원시적인 청자였다. 당시 청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옥빛이 아니라 그저 '도기에 유약을 바르는 것이 목적임을 확인할 수 있는' 빛깔이었다. 이후에 기술이 발전하여 우리가 아는 청자가 나왔다 [13]. 중국의 도자기는 북방식 백자와 남방식 청자로 나뉘었는데, 물론 당시의 백자는 현재처럼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북송대의 양각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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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대에 만들어진 영청과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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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이후로 송나라 때까지 당시 귀족들은 백자와 청자를 두루 사용하였다. 그런데 송휘종이 '황제의 그릇은 청자로 하라.'고 명령하자 청자가 대유행하였고, 송의 귀족들도 청자를 애호하게 되었다.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강남으로 쫓겨난 것도 남방식 청자가 우세해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물론 고려도 이런 영향을 받았으므로 역시 청자 애호로 기울어졌다. 서해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운반선에 실린 도자기 대부분은 송나라 청자이다. 고려의 특산품이라 불렸던 상감청자는 도자기에 그림을 넣으려는 방법을 고안하다가 나온 자기이다. 당시에는 코발트를 사용한 청화나 철을 사용한 검은 채색기법이 나오기 이전이었다. 도자기 위에 일반 안료로 그림을 그려 구우면 색이 변하거나 날아가기 때문에 "물감을 쓸 수 없다면 색이 다른 흙으로 그림을 그리면 되잖아?" 하는 발상에서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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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한국 도자기 기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민족주의의 폐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송, 원, 명대 초반까지 중국 수준의 도자기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아니, 구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중국인들에게 특유의 색과 양식을 인정받고 중국시장에 팔리는 수준까지 되었다. 따라서 중세의 도자기 역사를 말할 때 중국과 함께 한국이 거론됨은 사실이다. 후술하겠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세계 도자기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은 빠질 수 없다. 경매에서 수십억에 낙찰되는 도자기가 조선백자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니 한국 도자기 역사에 대하여 무슨 우리나라만 도자기를 만든 양 중국은 쌈싸먹었다느니, 일본은 막사발밖에 없었다느니 하는 민족주의적 우월의식도 곤란하지만, 자학적 평가절하도 올바르지 않다. 늦어도 16세기 종반이면 포르투갈, 네덜란드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세계 시장에 뛰어든 일본, 중국과 달리, 끝까지 세계 체제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던 우리 조상님들이 만드신 물건 중 (인삼, 종이와 함께) 몇 안 되는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특산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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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예술품 최고가인 396억 원에 낙찰된 원나라 시기 청화백자 '귀곡하산(鬼谷下山)'
그런데 원나라가 세계를 제패하면서 유행에 변화가 온다. 원은 세계제국으로 원 황제의 통행증만 보유하면 콘스탄티노플에서 베이징까지 안전하게 교역할 수 있는 시대였다.[14] 참고로 중국과 마주보는 황해 연안의 상업도시에는 상인 출신 이슬람인들이 오늘날의 시장으로 임명된 사례가 비일비재할 정도었다. 전통적으로 우유와 양모를 귀하게 여기는 몽고족은 백색을 좋아했다. 게다가 원의 수도가 북방에 있는 관계로 북방식 백자가 우세해졌고, 이 즈음에 중국에서는 하얗게 구워지는 백토와 기포를 줄여 소성 시 투명하게 되는 유약이 나옴으로써 오늘날까지 사용하는 백자기술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원황제가 황제의 그릇은 청자가 아닌 백자로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유행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은 중세 유럽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은그릇을 선호했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무슬림 사이에서 누구는 나무그릇으로 밥을 먹고 누구는 금그릇, 은그릇으로 밥을 먹는다. 이건 계급불화를 조장한다'''며 금그릇, 은그릇의 사용을 금지시켜버린다. 우마이야 왕조아바스 왕조 초기에는 로마의 영향을 받아 은그릇의 대체재로 유리그릇을 사용하거나, 러스터웨어(Lustreware)라고 도기 위에 금, 은가루를 입히는 기법으로 만든 도기를 사용했지만 러스터웨어는 내구성이 영 병맛이었기 때문에 성이 차질 않았다.[15] 이때 중국으로 간 이슬람 상인들이 찾아낸 대체재가 바로 도자기였으며, 당송시대부터 이미 이슬람인들은 중국에서부터 도자기를 수입했다. 하지만 도자기를 철에 비해 밝고 흰 빛이 나는 은그릇의 대체물로 수입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슬람인들은 대체로 송나라의 주력 수출품인 청자보다도 아직 기법이 미완성되어 푸르스름한 빛이 남아있는 백자를 더 선호했다. 이 백자가 원대에 들어 흙 속의 철분을 완전히 제거하는 기법이 개발되어 새하얀 백자를 생산할 수 있게 되자 대박이 터졌다. 서구의 국가들도 기독교적 교리 때문에 백색을 숭상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국제무역에서도 백자의 단연 우세였다. 물론 현대의 도자기 유행도 백색이 우세하다. 레스토랑에서 파란색 식기가 나오는 일이 없음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일반적으로 백색은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킨다. 한편 이슬람권에서는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하려는 시도도 자주 해왔으나, 13세기 이후 지금의 터키에서 치니(Çini)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을뿐이며 그나마도 중국 도자기의 내구성과 심미적 아름다움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여러 대체품이 나오기도 했는데 원래 이슬람권에서 잘 하던 금속세공기술로 구리그릇을 만들고 그 위에 에나멜로 색을 칠한 다음 유약을 입히고 가마에서 구워내서 도자기 느낌을 낸 제품들이 있었다. 페르시아어로 미너커리(Minâ kâri)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이스파한의 특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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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시절. 고려에 북방식 가마기법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기술이 크게 진보했지만, 14세기에 나라가 혼란해지면서 분청사기 형태를 한 청자만 제작되었다. 고려 말기는 한반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막장 시절이라 (주요 도자기 산지였던) 남해안이 왜구들에게 초토화되었고, 질 좋은 고령토도 얻을 수가 없었다. 결국 기술적으로 완성된 백자는 15세기 조선시대가 되어서야 나왔다. 도자기를 만들고 연구하는 사옹원의 총책임자는 왕자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백자 개발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청화백자의 재료인 토청을 구하려고 왕실도 많이 노력했다.[16] 그 후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급발전하여 18세기까지 절정을 이루나, 18세기부터 양반 사대부의 취향이 놋그릇 쪽으로 바뀌고 19세기 세도정치 시기가 닥쳐오자 정체되었다.
일본의 경우, 헤이안 시대 이후부터 스에키라는 도기를 바탕으로 중국의 유약 기술을 받아들여 독자적으로 도기를 전국 각지에서 만들었지만, 자기 제작의 역사는 임진왜란 이후에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납치해간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이 일본에서 자기를 만들면서 기술이 전파된 것이다. 지금도 오래된 가마터에는 조선인들이 남긴 흔적이 있거나,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후 조선통신사 등이 포로 송환협정을 타진할 때에도 도자기 장인만은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의 다이묘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조선 도공들을 가두고 숨기며 매수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해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당시로서는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고급기술을 가진 엔지니어와 같던 도공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화.
대접을 워낙 잘해줘서 조선인 도공들 스스로도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617년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종사관 이경직이 8월 27일자로 남긴 기록을 보면, 이경직이 어찌어찌 조선 도공들을 겨우 만나 돌아가자고 제안했으나 도공들이 당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일부 도공들은 성씨까지 하사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인 도공들을 무조건 우대해준 것만은 아니다. 도자기에 장인의 이름을 쓰게 했음을 근거로 도공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미 조선시대에도 도자기에 이름을 쓰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장인의 브랜드 가치 때문이 아니라, 불량품이 나오면 책임을 질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런 책임전가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도공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에도 막부는 조선 도공들이 만든 자기를 내국 생산제품과 구분해서 이도다완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했는지라 귀화를 불허했고, 자기생산 이외에 다른 일을 하거나 거주지를 바꿀 수 없게 제한했다. 에도 막부는 일본 내 각 계층을 엄격하게 통제하였으므로 조선 도공들만 이런 불이익을 받은 것도 아니다.
도자기 제작 기술이 뒤졌던 일본 전국시대(일본)에는 차를 따르는 데 쓰던 다기가, 특히 중국 다기가 매우 비쌌는데, 그중에는 성 하나 값에 맞먹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자국에서도 생산을 했지만, 현재의 외제차와 국산차와 마찬가지로 상등품의 외제 도자기는 높으신 분들이 썼고, 대중적으로 보급화된 국산은 백성들이 썼다. 일본 지배층에 다도가 유행하자 차 마시기가 최고급 문화로 자리매김했고, 당연히 여기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들 역시 고급화되어 값이 뛰었다. 초기에는 중국의 다완이 많이 유행하여 값이 엄청 올라갔지만, 16세기에 센 리큐가 이런 풍조헤 반발하며 '와비 사비'라는 미적 개념을 수립, 이도다완 같은 막사발을 검소함의 극치로 재평가하였다.
지금도 도요지 터에서 막사발을 쌓아 굽다가 무너진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그릇 여러 개를 쌓아 구움은 중국과 한국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완(그릇)은 하나만 올려 놓고 만들면 너무 낭비인지라 쌓아서 굽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면 보물로 전시한 고려-조선시대 다완에도 쌓아 굽다 보니 그릇에 남은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쌓는 방식이 시기마다 달라서 그 흔적으로 고고학적 세부편년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청자완은 내화토라는 것을 굽 아래에 발라서 계속 쌓는데, 내화토가 아래의 그릇 안에 묻어서 남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박물관에서 청자완을 관찰하면 이상하게 뭔가 흰 것이 묻은 흔적이 보일 텐데, 그것이 내화토 비짐이다. 조선의 자기는 그릇 아래 모래 알갱이 같은 게 보일 텐데, 모래비짐이라고 모래를 발라서 쌓았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이 없는 완들은 주로 갑발이라는 흙으로 만든 상자를 이용했는데, 중국에서는 일반적인 상자 모양 갑발보다 더 많이 쌓을 수 있는 M자형 갑발을 이용해 대량생산을 했다. 지금도 장인들은 막사발 형태로 다완을 만든다.
일본에서 조선 스타일 도자기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17] 부산 왜관에는 일본 수출용 그릇 공장도 운영되었는데 훗날 부산요(釜山窯)라고 이름지었다. 일종의 OEM 방식. 조선 측이 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조선 기술자를 차출해주면 왜관에서 기술자에게 연봉을 지급하고 일본에서 좋아할 만한 디자인으로 그릇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부산박물관에 당시 대마도에서 부산요로 보냈던 주문서가 전시돼있는데 디자인, 치수, 문양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백여 년 운영되다 조선이 재료 무상 공급을 거부하고 일본 현지의 자기 기술력이 차차 조선을 능가하면서 1717년에 폐쇄됐다.
서양에 수출되던 일본자기의 대표적인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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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시대 중국 도자기, 17세기 무렵 중국과 일본은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경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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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기 제조기술은 상술한 대로 임진왜란에서 데려온 조선의 도공[18]들 덕분에 발전하였다. 여기에 명나라가 멸망하자 도자기의 종주국인 중국의 도공들도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여 많은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무렵에는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일본 자기를 서양에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청나라가 무역봉쇄를 하자 새로운 자기생산지를 찾았다. 일본이 조선에서 데려온 도공들의 힘으로 자기 생산을 시작했을 때, 중국 대륙은 이자성의 난+명나라청나라 교체+삼번의 난이라는 3단 콤보를 맞고 경덕진을 비롯한 도요지가 초토화되는 바람에 수출할 만큼의 잉여물량을 생산하지 못했다.[19]
네덜란드는 일본에 디자인을 수주하고 샘플을 보내는 등 공을 들여 일본 생산품 자체의 질을 끌어올리고 값싸게 사가는 방식으로 무역을 했다. 손잡이가 달린 찻잔도 일본에서 최초로 제작했다. 물론 손잡이가 달린 질그릇은 훨씬 예전부터 있었지만[20] 17세기 이후 일본이 서양에 수출한 도자기는 뜨거운 차와 찻잔에 익숙치 않았던 서양인들의 기호에 맞춰 제작한 것이라 한다. [21] 여담이지만 메이지 유신 전후로 막부를 몰락시킨 유신지사들의 자금줄에는 도자기도 있었다고 한다. 즉, 임진왜란을 일으키다 망한 자들의 후예가 임진왜란 때 잡아온 자들을 통해 얻은 돈으로 임진왜란 덕에 어부지리를 얻은 자들의 후손들을 몰락시키고,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는 씁쓸한 이야기.
임진왜란 이후 17~18세기 일본과 중국이 경쟁하던 시절 도자기가 궁금하다면 여길 참조.
터키에서는 13세기 무렵부터 도자기를 제작했는데, 특히 이즈닉(İznik)의 도자기가 유명하다. 만드는 법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터키에서도 도자기[22]가 아니라, 치니(Çini)라고 별도의 용어로 부른다. 이즈닉 도자기는 중국산 도자기에 열광하던 당대의 요구에 맞춰 중국산 도자기를 모방하면서 시작했다. 코발트 염료를 사용하는 중국식 청화백자의 영향을 짙게 받았지만, 코발트 염료와 더불어 다양한 색깔의 광물성 물감을 직접 도자기 위에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가느다란 붓으로 검게 윤곽선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굽는 점이 다르다.[23] 색깔이 매우 선명하며 겉에 유리질의 유약을 발라서 굽기 때문에 광택은 진짜 자기와 비슷하지만, 고령토와 산화 실리콘과 유리질을 혼합한 점토를 사용하여 자기 느낌의 도기를 만든 것이라[24] 동시대 중국산 도자기에 비해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주로 모스크벽을 장식하는 타일로 만들었고 그 외에 중산계급과 귀족들을 위한 각종 그릇과 생활용품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왕족들은 여전히 진품 중국산 도자기를 애용했다고. 16세기가 되어 이즈닉에서 질 좋은 흙이 고갈되자 중심지는 내륙의 퀴타햐(Kütahya)로 옮겨졌고 심지어 한때 이즈닉 도자기는 맥이 끊기기도 했으나, 1985년 에쉬레프 에르오울루(Eşref EROĞLU)와 세이한 에르오울루(Seyhan EROĞLU) 부부가 복원한 덕에 오늘날에는 관광지에서 값비싼 기념품으로 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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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 시기 경덕진에서 생산된 당초문 청화백자 (1470년 무렵)와 1550~1570년 무렵 이즈닉에서 만든 도자기의 비교. 위쪽이 경덕진 도자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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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경 네덜란드 델프트 자기. 딱 보더라도 중국 청화백자의 열화카피임을 알 수 있다.
유럽의 도자기 역사는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열화 카피에 불과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들어서 유럽 나름대로 백자 관련 제작기술을 완성하였다. 더군다나 장인정신을 강조하면서 사승관계와 무형의 노하우 전승을 강조하던 동양의 문화와는 달리, 온갖 실험을 꼼꼼히 기록하는 서구문화는 이런 제작기술이 빠르게 퍼지는 데 공헌했다. 18세기 들어서 동양에는 없던 색채기법 및 금채를 칠하는 방식이 등장하고, 기존에 유럽이 르네상스부터 발전시킨 사실주의 양식이 가미되면서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도자기 품질이 역전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본차이나도 이 무렵에 등장했다.
18세기 무렵 유럽에서 나온 대표적인 형태의 세브르 양식의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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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 웨지우드의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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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랫포드셔 초콜릿컵 본차이나, 1815-2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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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에 제조된 오스만 제국 이을드즈 도자기[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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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중국산 도자기 문양은 근대 서양양식에 비하여 섬세함이 부족했고, 화려하긴 했지만 서양 귀족들의 취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 무렵 중국제 도자기는 유럽의 서민계층용으로 전락했고, 고위 계층이나 왕실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여 자체생산한 유럽식 도자기는 상류층용이 되었다. 예외적으로 섬세함을 추구하면서도 동양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깔끔함을 보여준 일본제 도자기 일부가 인정받았다.
유럽 도공들의 중요한 업적이 있다면 바로 '''대량생산'''의 개발이다. 물론 한국에서야 도공이 흙도 준비하고, 반죽도 하고 성형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굽기도 하고 모든 과정을 혼자 혹은 제자 한 둘만을 대동하고 해냈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일찍이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명나라경덕진의 수출용 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는 고령토 채취, 흙 혼합, 분쇄, 토련, 반죽, 성형, 초벌구이, 채색, 재벌구이 등 총 75가지 공법을 각각 한 사람이 전담해서 분업하였다.[26] 이는 업무효율을 높이면서 도자기 제법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도공 하나를 매수해봤자 그 도공은 자기가 하는 일만 알 테니까(...) 유럽에서는 여기에 도자기에 넣을 무늬를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에서 보편화된 예술인 판화를 응용했는데, 가장 오래된 대량생산 기법은 동판에 작가가 손으로 문양을 파고 액화시킨 코발트 안료를 홈 위에 붓고 롤러로 미는 것이었다. [27] 초창기에는 오직 파란색만 넣을 수 있었지만 이후 금속안료를 개발해서 빨간색, 녹색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갖가지 도자기를 대량생산으로 시중에 저가에 공급했다. 이는 서양문명이 만들어낸 도자기가 질뿐만이 아니라 양에서도 동양을 훌쩍 뛰어넘었음을 의미했다. 현대에 전 세계적으로 시중에 사용되는 자기들 대부분이 서양식이라는 점은, 시작은 동양에서 했지만 완성은 서양에서 이루어진 도자기 역사의 결과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28]

3. 한국의 도자기


한국의 전통 도자기에는 대표적으로 선사시대의 토기, 신라토기, 가야토기, 고려청자, 분청사기, 그리고 조선백자가 있다.[29]
통일신라 이전까지 한국의 도자기 기술은 조악한 수준으로 삼국은 토기를 생산했고[30] 귀족층은 중국의 도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했다. 통일신라 중기부터 중국이 755년 안사의 난을 시작으로 혼란기가 계속되면서 중국의 도공들이 한국으로 망명해 도자기 기술이 전래되었고, 한편 중국에서 도자기 수입이 계속되면서 자체생산 수요가 생겨나 청자의 초기 형태인 해무리굽청자 등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31] 백자와 흑유자도 소량이지만 이 시기에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제작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고려시대 중기에는 중국 청자와 비교해도 경쟁력이 있을만큼의 완성도에 다다르게 되었다. 10~11세기에서는 송으로부터 다양한 제조기법이 소개되었고, 고려 도공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독특한 고려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청자와 백자는 높은 온도를 만드는 기술이 아주 중요하다.
일단 기술적인 측면에서 청자는 필연적으로 백자로 발전한다. 기술적인 면에서 백자는 청자의 발전형이다. 가끔 이걸 모르고 조선은 백자밖에 못 만드는 데 고려는 청자 만드니까 조선 자기기술은 퇴보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조선백자의 예술은 고려청자에 뒤지지 않는다. 백자를 만드는 백토가 청자의 원료인 태토보다 입자가 훨씬 고운 데다가 불순물이 섞이면 작품이 안 나온다. 색이야 청자가 더 화려하지만, 자기는 색이 전부가 아니다. 다만 사회의 중심 이념이 청빈을 강조하면서 사치를 멀리하는 쪽으로 변화하다 보니 청자에 비해 화려함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백자는 재료부터 제약이 있다. 백자는 질 좋은 고령토로 만들어야 한다. '고령'이라는 명칭은 중국에 있는 도자기의 총본산 경덕진의 고령산(高嶺山)에서 유래했다. 청자는 불순물 약간을 포함하는데, 백자를 만들려면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온도 면에서도 청자는 제련온도인 1,100℃ 이상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이면 만들 수 있다. 2011년에 재현된 고려청자는 '''2,000℃나 되는 플라즈마 상태'''까지 갔지만(#) 고려시대에 이 정도 온도까지 올리고 유지하는 기술이 있었을 리가 없다. 과거와 다른방식으로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나온 특이한 사례일 것이다.
백자는 최고 1,400℃ 이상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청자도 온도에 따라 구현되는 색이 다르긴 하지만 백자만큼은 아니다. 도자기는 구현하기 어려운 색이 제법 된다. 경매로 올라서 최고가를 경신한 조선백자는 그 가치가 표면에 그려진 붉은 꽃에 있었다고 한다. 붉은 색은 진사라고 부르는 산화동으로 그려내는데 높은 온도에서 변색되지 않고 그런 붉은색을 나오도록 굽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한다. 자칫하면 담황색, 암록색, 암흑색으로 나온다. [32]
조선 말기의 도자기들은 침체되기 시작했는데, 임진왜란과 연이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국토가 피폐되어[33] 경제가 침체된데다, 호란 2번에 '''경신대기근'''까지 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조정에서 비싼 청화백자 대신 철화백자를 쓸 정도였다.[34]
조선의 도자기 문화를 일본인들은 신기하게 보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도자기가 일상생활 속에 깊이 관여해있기 때문이라고[35] 그래서 생활용품으로 자주 수출되었다.
도자기와 관련된 유명한 클리셰로 일반인의 눈엔 멀쩡해 보이는 도자기라도 장인이 마음에 안 들면 거침없이 깨트리는 것이 있다.[36] 그런데 현실에선 어지간히 네임밸류가 높은 장인이 아니면, 지인들이 아까우니까 달라고 하면 준다고도 하고, 전통식 가마에서 만드는 것이라도 작은 흠이 있는 것을 모아서 몇천원 정도에 싸게 팔기도 한다. 옛날에도 마찬가지라 발굴되어 나오는 옛날 도자기들도 기형이 뒤틀리고 터져나간 것이 나오는 것도 모자라서 사용한 흔적까지 남은 경우도 있다. 장인정신이니 뭐니 하면서 거침없이 깨버리기는 역사시대에는 거의 없었고 오늘날에야 가능해진 것이다. 청화백자에 사용하는 코발트 안료는 정말 질 좋은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중국을 통해 들여와서 더럽게 비쌌다. 게다가 관요에서 납품할 때도 뇌물로 그 갑절을 찔러줘야 했다는 기록도 있어 도공들이 가마에서 안 터지고 나온 자기들을 마구 깨버릴 여유가 없었다.
가마에 그릇을 구우면 일정 분량 불량품이 나온다. 그런 건 싸게 팔거나 정상 제품 팔 때 덤으로 주면 되므로 깨 버릴 이유가 없다. 깨 버린 도자기는 바닥에 깔거나 하는 용도 외에는 다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만드는 것도 시간과 재료가 들어가지만 굽는 데 많은 시간과 인력이 들어가는, 따지고 보면 원가가 비싼 그릇이다. 현대의 도공, 도예가들도 그릇이 망가지면 때우고 고쳐 가면서 쓴다.
한중일 도자기 사이에는 웃지 못할 관계가 있는데, 일본이 임진왜란부터(심지어 도공들도 납치해갔다) 일제강점기까지 한국의 도자기를 쓸어간 후, 중국에서 도굴꾼과 밀수꾼들이 세탁을 위해 한국으로 자기네 도자기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도굴 등의 문화재 장물 매매는 심하면 '''사형'''까지 떨어질 수 있는 중범죄로 친다.
그 때문에 '''중국에서 전멸한''' 송나라 시대의 여요부터 장제스대만으로 탈출하면서 바리바리 싸들고 가던 도자기, 피난박스라 불리는 물건들까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 세탁 보낸 도자기가 도리어 한국에서 사회 혼란기를 거치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집 구석이나 골동품점에 유통되었다. 최근 중국은 중국의 신흥 부자들이 경매에서 이런 유출 도자기를 사들이기 시작하자 문화재 회수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경매에 붙여지면 어쩔 때는 수십억 원까지 불리기도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몇몇 장인들의 작은 공방들의 자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업에서 만든 공장제 도자기가 유통된다. 오늘날 한국 도자기 산업은 업계 1위 '한국도자기'를 중심으로, '한국도자기'의 형제기업인 'ZEN', 목포에 공장을 둔 '행남자기', 이천에 공장을 둔 '광주요', 여주에 공장을 둔 'yido' 등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이끌지만, 최근에는 외국 기업의 도자기들에게 경쟁력에서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공이나 잡티가 없는 꿀피부를 도자기 피부라고도 한다. 그런데 화장을 너무 심하게 해서 사람 피부 같지 않다는 의미로 '도자기 인형 같다.'는 말도 하니까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충치 치료 시 대신 충전재로도 사용된다. 금과 달리 색상이 기존 치아와 같아서 미관상 좋고 경도도 좋다. 다만 강도가 떨어져 깨질 수 있으므로 어금니에는 잘 쓰지 않는다.
만든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억소리 나는 값으로 불리는 도자기도 있다.(#) 이게 몇백 년이 지나도록 유지된다면 후덜덜한 가격이 될 듯하다.

4. 와 도자기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음차 풍습은 도자기 발전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당대에 주로 소비되었던 차의 종류와 차의 색에 따라 오직 차를 마시려고 만든 도자기가 개발되었다. 오늘날의 우려먹는 녹차는 제다기술이 발전한 명나라 시기에야 보편화되었고, 초창기에 차는 황갈색이었다. 그 때문에 보색인 청자가 유행했다. 당시에 고급이라고 여긴 황갈색 찻물의 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송대에 들어 말차가 유행하자, 다완의 색도 천목다완 같은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당시의 말차는 오늘날과 같은 초록색이 아닌 약간의 황색을 띈 녹색이었는데, 찻물을 섞으면 우유처럼 흰 거품이 났다. 그리고 흰 거품이 풍부하게 피어야 좋은 차로 여겼기 때문에, 당시에는 청자를 고급으로 여겼는데도 음다용으로는 검은 다완을 썼다. 그리고 거품이 좀더 풍부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역삼각꼴로 찻그릇을 만들었다. 참고로 여기다 차 이외의 다른 음식을 담으면 균형을 못 잡아 넘어진다. 순전히 차를 마시기 위해 이런 디자인을 고안한 것이다. 이후 명청시기에 들어 녹차, 황차, 청차, 홍차, 백차, 흑차의 오늘날과 같은 차의 구분이 완성되자 어떤 종류의 차를 마시든 차의 고유 빛깔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백자가 선호되어 오늘날에도 다기의 대부분은 백자이다.

5. 도자기의 유해성


도자기는 식기로써의 재질 중 손에 꼽을 만큼 안전한 재질로 손꼽힌다. 이는 유약[37]이 고온에서 녹아내리면서 유리화하면서 코팅을 하기 때문인데, 유리는 반응성과 물질투과성이 낮아 안전한 식기 재질로 손꼽히기 때문.
문제는 유약 가운데 이 함유된 유약이 있다는 것이다. 납 유약을 발라 구우면 연료를 적게 써도 되고 도자기 표면이 반들반들해지는 효과가 있다. 그 때문에 여러 업체에서 납 유약을 사용하는데, 당연히 인체에는 굉장히 유해하다. 이러한 유약을 광명단이라고 하는데, 보통 유약에 비해 단가가 싸서 유행했다.
거기에 완성된 도자기에 장식을 더하기 위해 유약을 다시 바르고 다시 구울 경우[38] 유약이 제대로 유리화되지 않고 표면에 남을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즉, 기존의 도자기 만드는 방식으로는 위험성은 전혀 없지만, 장식을 더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 소규모 회사나 중국산제품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사자들이 강하게 부정하며 재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또 위 불만제로에 대한 반박글도 있다. 언론에 대한 불신도 많이 쌓인지라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납 성분이 생각 외로 많다는 부분은 납유리의 특성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방송에선 ppm으로 쟀기 때문에 납이 원래 미량만 들어가는 것이고 오류로 인해 20% 가까이 찍혀나오는게 아닐까 싶지만, 원래 '''납유리는 중량 대비 18~40%의 산화납이 들어간다.''' 흑회색의 납이 유리에 섞이면 기이하게도 투명도가 매우 높아지는데 이러한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납이 그렇게까지 섞일 수 있느냐 의문을 가지는 것. 산화납의 인체유해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아무튼 엄청난 납 함유량이 있다고하는것은 현대 산업도자에 대한 무지라고 보면된다.
일반적으로 도자기 장식용 안료를 무연(납이 없는)제품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
크리스탈 그릇에는 납이 함유되긴 한다. 불만제로에 대한 반박글은 대부분 불만제로 측에서 한국의 도자기라는 도기는 크리스털 그릇을 검사한 결과라는 것. 크리스털 그릇의 경우 투명도를 위해 납이 함유되고 이는 유연과 무연으로 나뉘는데, 무연의 경우 자체에 함유된 납은 극소량이며 이또한 소성을거쳐 결정질화되어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이며, 유연의 경우 도 KS규격이 허용하는 수치에서 관리되는 것으로 보면된다

6. 시대지역별 도자기의 종류



  • 일본

7. 참고 외부 링크



8. 관련 문서




[1] 중국의 도자기가 유럽에 전해지다 보니 붙은 이름이다. 중국을 말할 때는 C가 문장 어디에 오든 항상 대문자이나, 도자기를 뜻할 때는 앞 글자를 소문자로 쓴다. 이는 칠기를 뜻하는 japan도 마찬가지.[2] 이쪽은 도자기를 아우르는 표현이라기보다 아래에서 설명할 '자기'에 부합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실제 사용상으론 큰 차이는 없고 대개 의미가 통한다.[3] 瓷(사기그릇 자) 대신에 磁(자석 자)를 쓰기도 한다. 중국의 자주요(磁州窯)에서 생산되는 자기를 磁器라고 하였는데 품질이 좋아 유명해져서 자기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4] 원래는 일본의 6대 도자기 양식 중 세토 지역의 '세토야키(瀬戸焼)'에서 나온 말로, 예전에는 주로 긴키지방 동쪽에서 통하는 말이었지만 현대에 들어선 도자기를 총칭하는 표현으로 주로 쓰인다.[5] 과거 사용했던 납 등 중금속 성분이 들어간 유약을 쓰면 안 그렇지만, 정상적인 제조 방법은 아니므로...[6] 18세기부터 현재까지 도자기 업계의 원톱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이센의 경우 작센공국의 군주였던 아우구스트 2세가 연금술사를 잡아다 가둬놓고 도자기를 만들어내라고 닥달했고 결국 성공하였다. 연금술사들 뿐만 아니라 도공들의 경우에도 감시를 받았는데, 독일에서 도자기를 생산한 게 성공한 지 8년 만에 도공 두 명이 탈출하여 결국 노하우가 전 유럽에 퍼졌고 도자기 업계 춘추전국시대가 열린다.[7] 대표적으로 독일의 마이센,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헝가리의 헤렌드, 영국의 웨지우드 등등[8] 거기다 중국제는 중국의 특성상 짝퉁이 매우 많아 실제 유물인지 아닌지 일반인이 구별하기 힘들다는 점도 있다.[9] 꼭 사금파리만 깐 것은 아니다. 사금파리 대신 자갈을 깔거나, 굵은 나뭇가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같은 방식의 고문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빨래판처럼 윗부분이 뾰족뾰족하게 생긴 나무판을 이용했다.[10] 하지만 이런 도기처럼 통기성과 흡습성이 약간 있다면 내용물이 상하지 않게 하고, 물이 증발하며 빼앗은 열로 담은 것을 시원하게 하는 효과가 있어 현재까지 일부러 그런 도기를 쓰기도 한다. 당장 우리나라의 옹기만 봐도 그렇다.[11] 노천 소성시 나뭇재에서 부착되는 자연유는 더 오래전부터 각 지역에 있었다.[12] 이것은 제철기술의 발전과도 관련있는데 고온의 화력을 제공할수 있는 풀무와 가마기술덕에 중국에선 기원전부터 주철을 대량생산할수있었다.[13] 참고로 당시 유약은 기포가 많이 발생하던 종류였고, 소성시 이 기포로 인해 뿌연 표면을 만들어내었다. 때문에 청자의 빛깔은 깊은 물이 푸른 빛을 내듯 유약을 여러번 겹쳐서 표면을 푸르스름하게 산란시키던 원리였다.[14] 어디까지나 '''형식상''' 그랬다는 말이다. 원나라의 지방 행정 제도는 그냥 봉건제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실제로 유럽과 교역을 원하는 상인들은 원나라의 중앙조정의 허가 밑 '''교역로에 있는 지방의 원나라 왕족 및 지방 관료'''들에게도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당연히 뇌물이 빠질 수 없었다. 게다가 몽골제국의 교역로 자체도 안전하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은 원나라와 각 칸국 간의 직접적인 전쟁이 없었을 뿐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15] 러스터웨어의 근본적인 문제는 도자기 태토와 유약의 성분이 근본적으로 다른 데다 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강도면에서도 단단하지 않고, 또 태토와 유약표면이 밀착되지 않아 손쉽게 박리가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요즘도 싸구려 그릇들은 서로 부딪치다가 이가 나가고 그러는데, 러스터웨어는 훨씬 더 쉽게 이가 나가고, 또 이가 나가면 흙으로 된 태토가 드러나서 보기도 흉하고, 그쪽으로 물이 들어가 근본적으로 도자기의 수명을 깎아버리는 문제가 있다. 현재도 옛 안달루스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스페인 그라나다 일대에서 러스터웨어를 제작하는 공방들이 남아있지만 실사용목적이라기보단 장식용에 가깝다.[16] 문제는 그렇게 구한 토청의 색이 회회청보다 다소 어둡게 나왔다는 점이다.[17]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도공을 많이 납치해가기도 했다.[18] 대표적으로 이삼평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19] 그나마 일시적인 것으로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중국산 도자기를 여러개 구매해 파리에 마련한 자신의 저택에 구비해놓은 장면이 있다.[20] 고대 신라-가야에서 만든 도질토기 중에서 파배라는 것은 현대의 컵과 똑같이 생겼다. 이러한 도질토기 제작기법은 일본에 전해져 스에키라는 토기 형식을 탄생시키는데, 사실 둘 다 형태는 거의 같다. 물론 파배와 같은 질그릇이 중세, 근세에도 이어졌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21] 그리고 이렇게 발전한 일본의 도자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유럽의 기술까지 도입하여, 매우 얇고 가벼운 도자기를 공장에서 찍어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백자를 대체하는 소위 왜자기로 한국 시장을 잠식해서 한국 도공들의 밥줄을 끊어버렸다.[22] Porselen. 영어로는 Porcelain이라고 한다.[23]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인 자기와 달리 굽는 온도가 상당히 낮다. 초벌구이는 900~1100도에서 하고, 색을 입히고 유약을 입힌 다음 850도에서 재벌구이를 하는데, 동아시아의 자기는 최소한 1300도 이상에서 구워져야 한다. 후술하지만 터키의 치니는 유리질의 유약으로 코팅한 도기라고 보면 된다.[24] 수정자가 터키인 치니 장인에게 물어본 바에 따르면, 치니에 사용되는 흙의 비율은 성형 시 흙을 무르게 하고 건조되면 백색으로 변하는 점토 20-30%, 완성품의 흰색을 내게 하는 고령토 25-30%, 3. 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하는 석영 등의 산화 실리콘질 돌가루 25-35%, 그리고 장석 15-20%라는 정보를 들었다.[25] 18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도 서구화의 영향으로 도자기 취향이 유럽풍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이을드즈 도자기는 압뒬하미트 2세 황제가 돌마바흐체 궁전을 비롯한 유럽풍 궁전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사용하기 위해 취미 삼아 시작했다가(...) 귀빈 선물 등 목적으로 도자기를 만들다보니 품질이 수준급으로 좋아졌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공방이 열려있다.[26] 유명한 자사호도 자사니를 취급하는 공장, 작가, 가마가 서로 분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27] 오늘날 상업도자기에서 많이 사용하는 전사지기법은 1950년대에나 대중화되었다.[28]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산품으로써 시판되는 도자기 제품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유물이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보자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 등의 고대의 동양식 도자기가 서양보다 인정을 받는다. 굳이 비슷한 경우를 찾자면 조잡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나 구텐베르크 성경 등이 현대의 완성된 프레스기로 찍혀나온 책들보다 훨씬 가치가 큼을 생각하면 될지도.[29] 그외에 마이너하게는 고려백자, 조선청자, 옹기등이 있다.[30] 다만 삼국시대의 토기는 학교 역사시간에 맨 처음 배우고 흔히 떠올리는 선사시대의 토기보다는 훨씬 진보한 형태다. 자세한 사항은 토기 문서 참조.[31] 한편 당삼채의 영향을 받아 신라삼채나 발해삼채도 일부 만들어졌는데 그 수는 적다.[32]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 한번 구워낸 자기에 낮은 온도에서 붉은색이 나오는 안료를 칠해 저온으로 한번 더 구워내는 두채기법을 개발함으로써 기술적인 난제를 극복했다.[33] 토지대장에 등록된 농지가 3할로 격감한 것이 유명하다. 이후로도 은결(등록누락된 농지들. 여기 소득은 다 탈세된다)은 조선말기 내내 정부의 골칫거리였다.[34] 청화백자의 염료인 코발트는 아프간(!)산으로 엄청나게 비싼 반면, 철화백자는 그나마 조선에서 자급 가능했기에 상대적으로 쌌다.[35] 일본도 도자기를 통한 생활용품을 만들긴 했으나 서민들은 주로 나무였고, 조선은 그릇, 술병, 요강, 항아리, 붓통 등 서민의 삶속에 깊이 녹아있었다.[36] 소설 및 이를 희곡화한 '독 짓는 늙은이'가 대표적. '''뚜왕 뚜왕'''하면서 9평 때 멘붕을 선사한 그거 맞는다.[37] 규석과 석회 등을 물에 풀어 만든다.[38] 굽기 전 장식을 해도 원하는 결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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