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물)
강아지풀속(''Setaria'')이며, 엄밀히 따지면 강아지풀(''Setaria viridis'')을 길들인 재배종이 바로 조이므로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강아지풀 맞다.''' 조(식물)의 열매를 빻아 껍질을 제거하고 남은 낟알을 좁쌀이라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장과 뭉뚱그려 '''서숙'''(서속黍粟의 사투리 발음)이라고도 한다. 영미권에서는 조를 foxtail millet이라고 하는데, 이삭의 모습이 여우꼬리 같아서 이렇게 번역한 듯 싶다.
우리 민족은 고대부터 조를 오곡(五穀: 쌀/보리/조/콩/기장)[1] 에 포함되는 작물로 분류하는 등 중요한 식량원이자 먹어도 질리지 않는 주요 곡식으로 삼았다.[2] 특히, 황해도 이북 현재 북한 지방에서는 잡곡밥을 지을 때 좁쌀을 즐겨 넣는다.
외떡잎식물 벼목 화본과의 한해살이풀로 원산지는 동부 아시아. 낟알은 좁쌀이라고 부른다. 보통 조밥[3] 이라고 하면 쌀밥에 좁쌀을 소량 넣은 것으로 그냥 쌀밥에 비해 아주 약간 고소해진다. 좁쌀로만 지은 밥은 '강조밥'[4] 이라고 한다. 곡식으로 쓰는 종류는 크게 메조와 차조가 있고, 차조에도 노란색 품종인 황차조와 초록색 품종인 청차조가 있다. 황차조의 겉모습만 보면 기장과 구별하기 아주 어렵다.[5] 낱알이 정말 작아서 거의 볼펜에 들어가는 구슬과 크기가 비슷하다.
부산광역시 동삼동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에서 조의 흔적이 나왔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곡물자료 중 하나다. 기장과 함께 가장 오래 전부터 농사지어 먹어온 곡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사실 농사기술이 발달하여 논벼의 생산력이 월등히 높아지기 전까지는 좁쌀은 주식으로 먹는 중요한 곡물이었다.
조 혹은 비슷하게 생긴 기장을 이용해서 잡곡밥을 짓는 경우도 있다. 하도 씨알이 작아서 맛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한데다가, 오밀조밀 노랗고 작은 점(...)이 흰 쌀밥에 끼어있는 모습으로 보이기에 콩이 들어간 것보단 호불호를 덜 타는 편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평민들의 주식으로 사용되었던 곡식.* 당시는 관개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강에 접한 평야에서나 나는 쌀은 귀족들의 차지였고, 평민들은 건조한 밭에서 나는 조로 밥을 지어먹었다.[6] 고대 중국에서도 좁쌀은 평민과 사대부 할 것 없이 가장 흔하게 먹는 곡식 중 하나였고, 상주 교체기때 상나라의 충신이었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관부에서 주는 좁쌀을 거부해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 때에는 아예 군주가 신하들에게 봉록으로 내리는 하사품 중 하나였고, 그 밖의 공로가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경우에도 대량의 좁쌀을 주었다. 공자도 노나라에서 대사구벼슬을 하던 시절에도 주로 좁쌀을 먹었으며[7] , 전국칠웅 중 최대의 국력을 자랑한 진나라도 영정 시절에 관중 지역에 대규모 조밭을 개간하여 6국통일의 기반을 닦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원전 시대를 다룬 중국 사극에서 군대가 쌀밥이나 찐빵을 먹는 것은 고증오류다. 당시의 군대는 강조밥을 먹었기 때문.
일제강점기에 한동안 조밥이 빈민층의 주식이 되었던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 쌀 부족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일본으로 쌀을 대량으로 수출하다 보니 정작 조선에서 그 양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실례로 삼성의 이병철이 일제 때 조선의 쌀을 도정한 후 일본으로 수출해서 번 자본으로 삼성의 기반을 닦았다. 19세기 아일랜드와 영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었다. 쌀과 조가 아닌, 밀과 감자였던 것만 빼고. 그래도 다행히 그 기간 동안 감자역병같은, 조를 박멸시킬 전염병이 돌지는 않았으므로 아일랜드와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여튼 조밥이 주식이 된 당시의 사회상은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한 소설에서도 종종 투영되는데, 대표적으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는 '''"조밥도 못 처먹는 년이 설렁탕은!"'''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주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구황작물이었는데, 차조는 찰기가 있기 때문에 다른 곡류 없이 이것만 가지고도 밥을 지을 수 있다(강조밥이라고 한다). 물론 메조도 밥으로 만들 수는 있는데, 찰기도 없고 미칠 듯이 까칠해 목으로 넘기기도 힘들어서 문제다. 이 때문에 화전으로 밭을 일구고 살아가던 화전민들은 메조만으로 밥을 지으면 반드시 잘 넘어가라고 미끌미끌한 도토리묵이나 청포묵 등을 곁들여서 먹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의 특산 음식으로 손꼽히는 묵조밥이 이 부류에 속하는데, 수확량과 식감 문제 때문에 옛날처럼 메조로만 밥을 지어서 내는 음식점은 드문 편이다. 쌀밥보다 원가는 훨씬 비싸면서 사람이 먹지 못할 맛과 식감을 내니까.
조로 지은 밥을 먹는 백종원. 추사 김정희의 유배 생활 때 먹었던 조밥을 생된장만 넣고 상추에 싸서 먹어보는데, 공포스러운 맛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벼농사 하는 농민들 입장에서는 '''잡초'''다. 보이면 뽑는다.
물물교환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좁쌀 한 톨이라는 동화도 있다. 중국 민화 중에는 외지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조 밭에 웬 박덩굴을 심어서 시어머니가 혼냈는데, 수확할 때 박을 켜자 박 안에서 잘 마른 좁쌀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도 있다.
세종대왕은 도량형을 정리할 때 황해도의 좁쌀을 기준으로 잡았다.
중국의 업체인 샤오미는 좁쌀에서 사명을 따왔다. 창업 초기에 좁쌀죽만 먹고 살만큼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국어사전에 실린 표준어 중에 '좁쌀과녁'이라는 낱말도 있다. 얼굴이 매우 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좁쌀처럼 작은 물건을 던져도 잘 맞을 정도라는 의미이다.
[1] 곡식 곡(穀)자에 벼 화(禾)와 함께 만물을 움직이는 동력인 기운 기(氣) 및 쌀 미(米)자가 받침으로 들어있다.[2] 오곡이 아닌 곡식은 오래 먹으면 질린다고 하여 늘 먹는 주식으로는 기피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밀/피/팥/수수/옥수수 등이 포함된다.[3] 표기는 '조밥'이지만 조 뒤에는 ㅎ이 덧나기 때문에 발음은 '조팝'이다. 나무 중 조팝나무가 여기서 발음을 따왔다. 반면 쌀밥은 이팝이라고도 하는데 이것 역시 쌀을 뜻하는 이- 뒤에 ㅎ이 덧나는 것이다. 이팝나무도 있다. 북한에서 말하는 이팝에 고깃국이 바로 쌀밥을 말하는 것이다.[4] 흔히 '깡조밥'이라고 쓰지만 표준어는 '강조밥'이다.[5] 낱알이 기장 쪽이 다소 크다.[6] 이건 옛 고구려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되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의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인민들의 주식이 좁쌀에서 옥수수로 바뀌었을 뿐. 게다가 고구려의 영역인 만주 일대는 예로부터 좁쌀 농사가 잘 됬다.[7] 공자의 인간적인 일화 중에 하나가 바로 제자들과 길을 떠나다가 굶주리고 날이 저물어 한 민가에 노파에게 하룻밤 의탁해 저녁으로 좁쌀죽을 얻어먹은 일이다. 제자들은 궁하디 궁한 좁쌀죽을 타박했지만, 공자는 "네 녀석들에겐 노파의 친절이 보이지 않는게로구나. 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라며 그들을 달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