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

 

1. 경주 첨성대
1.1. 개요
1.2. 내용
1.3. 용도
1.4. 보수
1.5. 여담
1.6. 교통
1.7. 바깥고리
1.8. 국보 제31호
2. 개성 첨성대


1. 경주 첨성대







1.1. 개요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
'''분류'''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천문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완공연도'''
633년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천문대. 신라 왕궁터인 반월성의 북서쪽 성곽에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국보 제31호이며, 그 원형을 유지하는 것 가운데[1]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2]이다. 한반도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후대의 복원이나 재건 없이 보존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1.2. 내용


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

'''별기에 따르면 이 왕(선덕여왕)의 치세에 석축을 쌓아 첨성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中

삼국유사에는 7세기 중엽 신라선덕여왕 시대에 건립했다고 기록했다. 세종실록에서는 633년(선덕여왕 2)에 세워졌다고 전하고 있다. 만든 시대 외에 정확한 건축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선덕여왕 때 석탈해왕의 16세손 석오원이 첨성대를 건축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출처가 <석씨계보(昔氏系譜)>라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시각이 있다.##
높이 9.17 m, 밑지름 4.93 m, 윗지름 2.85 m로 중간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의 문이 있으며 상방하원(上方下圓)의 형상을 갖춘 돌탑 형식으로 축조되었다. 위쪽 방형의 각 면은 동서남북을 가리키는데, 어떤 주술적 또는 학술적 메시지를 담았다는 주장이 있다. 당대의 우주관은 천원지방, 즉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나 있다고 믿는 것이었는데 첨성대는 반대 형상이기 때문이다.[3]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의 형상을 반영했다는 주장도 불교계 일각에서는 말한다. 불경에 따르면 수미산의 정상 도리천은 사각형이기 때문이다.
첨성대의 입구.
남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첨성대의 정자석(井字石). 2016년 경주 지진으로 약 4cm 이동했다.
상단의 네 개의 삐져나온 돌은 방틀심석[4]이다.
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이용해 27단의 석축을 쌓았다는 것 역시 '1년'의 시간과 28수[5] 별자리, 혹은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 춘분과 추분 때는 태양광이 창문을 통해 첨성대 밑바닥을 완전히 비추고, 하지와 동지 때는 완전히 사라지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첨성대의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으로 채웠고 맨 위에 우물 정(井)자 장대석이 있다. 과거에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다고 생각한다.
첨성대가 위치한 공원의 입장료는 무료이다. 과거에는 입장료 500원을 받았다. 비록 푼돈이지만 울타리가 매우 낮아 바깥에서도 아주 잘 보였기 때문에 왠지 아까운 느낌이 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2014년 1월 1일부터 시민과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첨성대 관람을 무료화하였다.

1.3. 용도



역사적으로 첨성대(瞻星臺)는 그 이름에서부터 '별[星]을 보는[瞻]'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왔으며 조선 후기까지는 별 다른 이견이 없었으나, 광복 이후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였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의 기록이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유사에는 명칭과 용도, 사람이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그렇다고 하기엔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하다. 게다가 천문 관측을 하는 시설인데 정작 다른 천문대처럼 산 위나 높은 곳이 아니라 왕궁 옆의 평지에 건설되었다는 점도 의문으로 제기되었다. 지상에서 고작 10미터 더 올라간다고 해 봐야 딱히 별을 관측하는 데 큰 도움은 안 된다.(...) 높이로 따지면 바로 옆에 있는 왕궁 경주 월성이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지형이라서 오히려 하늘에서 더 가깝고, 주변 남산, 토함산 등에 올라가면 훨씬 별을 관측하기 쉽다.
슬로바키아 스타라 비스트리차 보보벡 힐의 옛 관측탑 (예시).
일부 학자들은 현 첨성대가 천문대의 흔적이며, 당시에는 누각이 지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제기한다. #

그래서 첨성대의 역할이 천문대가 아니라 일종의 기념비 혹은 제단, 창고였을 것이라는 설이 등장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상징물(이용범 교수)', '과학 수준을 과시하는 상징물(김용운 교수)',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정연식 교수)[6]'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며, 또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이 자리에 과거 천문대가 있기는 했지만 목조 건물이었으므로 지금은 사라졌고 폐사지의 석탑, 포석정지의 석구(石溝)처럼 천문대의 '부속 건물'만 남은 것이 지금의 첨성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 역시 추측에 불과할 뿐 문헌적・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불가능하며, 주류 학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통설과 신라 천문기록의 정황 연구 등을 토대로 '''첨성대가 천문대였음'''을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김봉규 박사는 신라 시대의 고천문학 자료들을 종합연구하여, 첨성대가 만들어진 뒤 신라 천문 관측 기록의 양이 대폭 증가하고, 기록 또한 자세해졌으며, 당시 관측된 유성의 낙하 지점들이 모두 첨성대 주변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7]. 이는 첨성대가 천문대로서의 실제적 기능을 수행했음을 알려주는 정황상의 증거이다.
첨성대의 위치나 높이에 관한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해명이 가능하다. 고대의 천문 관측은 현대의 천문학과는 성격이 매우 달라서,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대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8][9],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당연히 왕궁에 가까워야 했다. 즉, 부지선정에서의 고려대상은 천체 관측의 용이성이 아닌 교통 접근성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말인데, 삼국유사 1권 왕력(王曆)편 내물 마립간 조의 말미에는 내물왕의 왕릉 위치를 이야기하면서 '능이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陵在占星臺西南)'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로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 삼국유사에 언급된 '점성대'는 이 첨성대가 맞으며, '점'은 '점칠 점()'이므로 이것을 점성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산에 가야 밤하늘이 잘 보인다는 것 자체가 도시에 전등빛이 넘쳐나고 곳곳에 고층빌딩 투성이인 요즈음 사람들의 편견이고, 전근대 사회에서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중세 시절까지도 천문관측은 세계 어디 가든 대부분 도시 한 가운데에서 했다. 어차피 토함산쯤 올라간다고 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넓은 평지에 첨성대 정도 높이면 주변 건물에 가릴 것 없이 사방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4. 보수


첨성대의 지반은 지하 16 m까지 퇴적층, 그 아래는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북쪽 지반이 약해 급속한 침하가 이뤄질 수 있으며, 경주 일대는 활성단층인 불국사 단층선이 지나가는 지진 위험지대이기 때문에 유지 보수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근대 한국의 지진 목록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역사적으로 경주 지역은 강진이 빈번했고, 조상들 역시 첨성대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다. 하부에 진흙을 채워넣은 것도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으며, 꼭대기 장대석의 경우 모델 실험을 통해 진동이 발생할 때 일종의 지지대가 되어, 하단의 돌이 어긋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첨성대는 현대 들어서 금이 많이 가고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짐이 심해지고 있다. 차량이 오고가면서 진동이 전달되어 그렇다고 한다. 보통 알려진 정면 사진을 보면 이상없어 보이지만 뒷면이라든지 다른 쪽에서 보면 장난 아니게 훼손이 심하다. 을 보자 결국 2014년 8월 문화재청의 특별 점검에서 첨성대는 밑에서 두 번째인 '''D등급'''을 받았다. 이 때문에 경주시에서 예산 1억 7천만 원으로 첨성대를 보수하기로 했는데, 그 중 7천만 원을 안내판 정비에 썼고 나머지 1억으로 정밀안전진단 용역을 하기로 했지만(2014년 9월 기준) 아직 시작도 못했다고. 관련기사 천 년을 넘게 경주 땅을 지켰던 첨성대가 '''우리 세대에서 붕괴 위기에 처해 있는 것.'''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1일 첨성대는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기사
2016년 경주 지진이 일어나면서 첨성대가 원래는 중심축에서 북쪽으로 20.4cm 비스듬히 서 있었지만, 지진으로 2cm 더 기울어졌다. 포항 지진은 다행히 첨성대에 아무 문제를 주지 않았다.
2017년 9월 기준 문화재청에서 첨성대 해체 또는 보수를 투표한다고 한다.

1.5. 여담


  • 낮에 보는 것보다 야경이 아름답다. 첨성대뿐 아니라 주변 산책로도 간접조명으로 예쁘게 조성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야경 명소인 동궁과 월지와 함께 저녁에 찾아가는 것도 괜찮다.
  • 1960년대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당시에는 첨성대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는 증언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심지어 첨성대에 올라가거나 내부에 들어가서 단체로 기념 사진을 찍은 경우도 여럿 있다. 사실 50~70년대에는 문화재 관리가 부실했던 편이라 거의 모든 우리나라 유적지들은 한때는 동네 꼬마들 놀이터 신세였다고 봐도 된다. 구글 이미지 검색결과
  • 2017년 술 취한 대학생 3명이 첨성대에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다가 경찰에 붙잡히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옛날엔 몰라도 지금은 당연히 잡혀간다.
  • 대한민국 원 옛날 10원 지폐에 첨성대가 있었다. 지금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는 아시아 지역 국가의 고대-고전-중세 시대 대학 건물 모델로 등장한다.
  • 대구경북지방의 국립대학인 경북대학교의 교표에 첨성대가 들어가 있다.
  • 2016년 경주 지진 당시 피해는 없었다. 현장에 있던 경주시청 문화재보수팀 주무관이 첨성대가 내진 설계가 되어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한다.기사 이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문화재대응팀이 실사하러 갔더니 북쪽 석축이 지진 발생 전에 비해 약 1.2 cm 정도 벌어졌지만 균열은 없었다고 한다.
  • 봉황대와 함께 2020 세계유산축전 행사 장소로 선정되었다.
  • 1998년작 국산 RPG 게임 머털도사 -백팔요괴편-에서 요괴들이 들끓는 던전으로 나온다.

1.6. 교통


교통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사실 일부러 첨성대'만' 목적지로 잡고 찾아가려고 하면 교통이 불편한 거지, 대릉원, 계림, 동궁과 월지, 국립경주박물관 같은 다른 관광지를 돌다보면 저절로 근처를 지나가게 되는 위치다.
첨성대를 통과하는 경주시 버스 노선은 총 2개 노선이다.
이전에는 70번이 첨성대를 경유해서 버스로도 접근이 쉽게 가능했으나 노선 개편으로 인해 배차간격이 매우 긴 60번, 61번이 경유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내방향만 경유하고 신경주방향은 미경유한다.

1.7. 바깥고리



1.8. 국보 제31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 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 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2. 개성 첨성대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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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과학관 출처, 개성 첨성대 복원도
경기도 개성시 만월대 서쪽에 있는 고려시대의 천문대. 경주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큰 돌로 만든 탁자같이 생겼다. 남아있는 축대의 크기는 가로, 세로 2.6m에 높이 3m.
조선시대의 천문대처럼 돌 위에 혼천의 같은 것을 설치하고 사람이 오르락 내리락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폐허 또는 부지로만 남은 천문대는 남아메리카, 이집트 및 중국 일대에 상당수 있다.[2] 영국스톤헨지도 천문대가 아니냐는 이론이 있지만 현재는 죽은 자를 위한 성역이라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3] 천체의 상징과 계절의 변화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구조라는 설도 있다.[4] 내부에 사다리를 지지하기 위한 들보를 넣은 곳.[5] 장대석을 포함하면 28단이다.[6] Chung Yeon-sik (December 2009). "A Criticism of the Several Theories on the Function and the Shape of Chomsongdae." The Korean Historical Review, Vol. 204, 357-403. (KCI Excellence Accredited Journal)[7] Kim Bong-Gyu (2011). Bulletin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ISSN 1226-2692, Volume 36, Issue 1, p. 24 (참조).[8] Kassell, Lauren (5 May 2010). "Stars, spirits, signs: towards a history of astrology 1100–1800".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Part C: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Biological and Biomedical Sciences. 41 (2): 67–69. doi:10.1016/j.shpsc.2010.04.001. PMID 20513617.[9] 점성술은 동서양 관계 없이 전근대 천문관에 지배적인 사상으로 작용하였으며, 근대 천문학과 완전히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아이작 뉴턴(1643-1727)의 고전 역학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지동설이 대두되고부터였다. (David E. Pingree; Robert Andrew Gilbert. "Astrology - Astrology in modern times"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