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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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9일의 구글 두들. 마지막에 날아가는 벌레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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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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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Murray Hopper'''. 일명 '''어메이징 그레이스.'''
1. 개요
2. 생애
3. 어록
4. 여담


1. 개요


1906년 12월 9일 ~ 1992년 1월 1일.
미합중국 해군제독, 컴퓨터과학자, 수학자로, '''최고의 여성 프로그래머'''로 인정받는, '''코볼의 어머니.'''

2. 생애


1906년 12월 9일 뉴욕 주의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아버지 월터 플레처 머레이와 네덜란드계 미국인 어머니 메리 캠벨 밴 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레이스는 호기심이 많았는데, 몰래몰래 7개의 알람시계를 분해하고 놀던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하나만 분해하라고 제한을 정해버렸을 정도로 공순이의 훌륭한 모범을 보였다. 아버지는 양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었으나 성차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에 그런 그레이스의 기행을 대견하게 여기며 학업을 지원했다. 사립학교(prep school)로 하트리지스쿨을 다녔고 바사 대학에 16세에 조기지원했으나 라틴어 성적이 나빠 떨어졌다. 이듬해에 다시 바사 대학에 진학해 1928년에 수학과 물리학으로 이학사 학위를 땄고 예일 대학교에서 1930년에 석사, 1934년에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지도교수는 컴퓨터 과학의 레전드인 노르웨이 출신 수학자 외위스테인 오레(Øystein Ore)[1]였다.
1930년에 뉴욕대학교의 교수인 빈센트 포스터 호퍼와 결혼했다.[2] 이미 1931년부터 바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고 1941년에는 부교수로 승진했으며 정교수 임용과 테뉴어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1943년에 그레이스 호퍼는 미 해군 예비역에 등록한다. 여군지원단(Women Accepted for Volunteer Emergency Service, 일명 WAVES.)에 등록했는데 본래는 몸무게 최저선인 54kg(120파운드)보다 6.8kg(15파운드)이 낮았던 탓에 탈락할 뻔 했다가 높으신 분들에게 아득바득 우겨서(...) 등록했다. 매사추세츠에 위치한 해군예비역장교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44년에 수료한 후 함정국에서 함포의 탄도 계산에 참여하다가 하버드 대학교와 진행하던 전산 프로젝트에 배치되었고, 이 시절 '''컴퓨터'''라는 것을 비로소 접하기 시작한다. 즉, '''20년간 순수수학 공부하다가 마흔살 먹고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한 것.''' 하워드 에이킨이 개발한 마크 1의 프로그래밍 스탭으로 일하면서 프로그래밍 언어와 코딩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쩔쩔맸지만 이내 적응하며 미 해군과 민간 연구기관이 함께 진행하던 여러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특히 호퍼는 프로그래밍 언어와 컴파일러 개발에 투신했는데, 1952년 A-0와 코볼이 호퍼의 대표작이다. '''컴파일러라는 개념 자체를 호퍼가 최초로 정의하였다.''' 코볼은 전문가부터 일반 슈퍼마켓 계산원까지 누구나 쓸 수 있도록 고안된 언어로, 이름부터가 '''CO'''mmon '''B'''usiness-'''O'''riented '''L'''anguage의 약자다. 이는 영어의 지시문과 상당히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미 정부기관의 도입과 민간에의 상용화가 대박을 터뜨리며 오랫동안 마르고 닳도록 쓰인 히트작이다.
또 대단한 호퍼의 업적 중 하나는 최초의 '영어로 명령을 입력하는 언어'의 창시자라는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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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사건으로, 1946년에 마크 Ⅱ가 갑자기 골골대자 뜯어봤더니 '''버그'''를 목격하고는 '''디버깅'''(...)을 실시하였다. 컴퓨터 분야에서의 버그, 디버그라는 말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버그라는 용어 자체는 에디슨에 의해 처음 쓰여서 1940년대 당시에도 어느정도 통용되었지만, 진짜 '버그'가 원인이 된 것은 호퍼의 사례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호퍼 본인이 "최초로 입증된 사례(First actual case)"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IEEE: The Institute, Did You Know? Edison Coined the Term “Bug”, 2013) 이 나방은 책에 테이프로 붙인 채 아직까지도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966년에 60세가 되면서 연령 제한에 걸려서 중령으로 전역하게 되었지만, 이듬해인 1967년에 예외적으로 다시 복귀했고 1971년까지 복무한 뒤에 다시 퇴역했다가 다시 이듬해인 1972년에 복귀했다. 당시 해군참모총장 엘모 줌왈트는 그녀를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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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장 진급 선서를 하는 노년의 호퍼. 좌측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고, 우측은 당시 해군장관 존 레만이다.[4]
1983년에는 하원의 추대로 해군준장으로 진급한다. 1986년에서야 완전히 퇴역했는데 79세 8개월 5일로 역대 미 해군의 현역 최고령 기록에서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5] 그래서 일부러 전역식을 당시로서 취역 188년 9개월 23일차였던 컨스티튜션 함에서 열었다. 사실 해군에서도 잘 근무하고 있었고 아직 팔팔했기 때문에 자의에 의하지 않고 억지로 전역했던 것이었다고. 그래도 해군에서는 호퍼가 초청되는 여러 강연에 해군 정복을 입고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6]
미 해군에서 연령 제한 이상으로 복무한 사람은 하이먼 리코버찰스 스튜어트, 윌리엄 리히, 체스터 니미츠인데 애초에 리히와 니미츠는 원수라서 종신계급이었다.
1992년에 별세했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여성으로는 이례적으로 주력 이지스 전투함인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DDG-70에 이름이 붙여졌고, 에너지부에서 운용하는 슈퍼컴퓨터 Cray XE6가 Hopper로 이름지어졌다. 학계에서도 호퍼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고 세미나를 여는등 사후에도 레전드로 대우받는다. 또한, 미 해군사관학교에서 사이버 및 컴퓨터 과목을 가르치기 위한 학과 건물을 신설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 건물의 이름을 호퍼 홀(Hopper Hall)로 명명하기로 했다.
2017년 2월에는 예일대에서 칼리지 하나를 그녀의 이름을 따서 바꾸었는데 전 이름인 존 C. 칼훈(John Caldwell Calhoun,1782~1850. 미국 제 7대 부통령.)이 노예 옹호론자라는 이유로 부적합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어록


"If it's a good idea, go ahead and do it. It's much easier to apologize than it is to get permission."
"좋은 발상이 생각났으면 일단 저질러야 한다. 허락 받는 것보다 저질러놓고 사과하는 게 더 쉽다."

이 발언은 후에 상반된 두 코딩 스타일 중 한 편의 이름이 된다. EAFP(It’s Easier to Ask Forgiveness than it is to get Permission.)과 LBYL(look before you leap) 중 전자가 그것.

"The most dangerous phrase in our language is, WE'VE ALWAYS DONE IT THIS WAY'."
"우리말 중 가장 위험한 표현은, '여태껏 이렇게 해왔어'다."


4. 여담


과학자의 이름을 GPU의 코드명으로 짓는 NVIDIA에서 호퍼의 이름을 상표명으로 등록했다. 루머 단계이나 지포스 30 시리즈로 예상되는 암페어 아키텍처 기반의 MCM 패키지 GPU로 예상하고 있다.관련 기사

[1] 그래프 이론의 대가. 수학 전공자들은 교과서에서 한번쯤 접했을 인물이다. 닐스 헨리크 아벨카르다노의 전기도 썼다.[2] 1945년에 이혼하지만 이혼 후에도 남편 성이었던 호퍼를 그대로 사용한다.[3] B-0 언어, 정식 명칭은 Flow-Matics[4]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람은 구닥다리 늙은이가 해군을 망친다는 개드립으로 하이먼 리코버를 옷 벗겼던 양반들이다.[5] 1위가 하이먼 리코버다.[6] 보통 퇴역 군인들은 웬만한 자리에는 군복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다.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을 초청하는 이런저런 기념식에서도 따로 단체복을 입힐지언정 군복을 허락해주는 적은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