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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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own feeling was that in being the first to use it, we had adopted an ethical standard common to the barbarians of the Dark Ages. I was not taught to make wars in that fashion, and that wars cannot be won by destroying women and children.
'''나는 우리가 그것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우리들의 윤리적 수준이 암흑시대의 야만인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전쟁을 하라고 배운 적이 없으며, 여자와 어린이들을 죽여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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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를 반대하며 했던 말
1. 개요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 미 해군 역사상 4명뿐인 해군 원수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지금의 미군 합동참모의장격인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4][5] 을 맏았으며 요컨대 이사람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제복군인들 중 가장 높은 직책'''이었다. 그 유명한 조지 C. 마셜과 어니스트 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더글러스 맥아더, 체스터 니미츠, 헨리 아놀드등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원수들과 장군들도 '''모두 이 사람의 아래'''였다는 말.[6]
2. 생애
1875년 5월 6일 아이오와의 햄턴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이클 리히는 남북전쟁 참전용사 출신 변호사였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였으나 대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897년에 47명 중 14등으로 졸업했다. 준사관[7] 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했고 태평양 쪽에서 근무했다. 1899년에 정식으로 소위 임관이 된 후 미국-필리핀 전쟁과 의화단 사건 등에 참전했고 1907년 해사로 돌아왔다. 이때가 첫 육상직이었다.
이 후 행정 보직으로 워싱턴에 근무하던 중 1913년에 해군차관보로 부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일하면서 둘은 점차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리히는 루스벨트의 최측근이 된다. 후에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루스벨트의 조언가로서 군사적, 전략적 안목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1차대전이 종전된 1918년 대령 계급으로 지낸다.
1927년에 제독[8] 이 되었고 1937년에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39년까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1939년에 전역한 뒤 푸에르토리코 총독으로 파견되었고 프랑스에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이 때 루즈벨트는 도움이 필요할 때 다시 복직시키겠다며 전폭적인 신뢰를 그에게 전하였다.
결국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뒤집어지자 1942년 리히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고, 해군참모총장인 어니스트 킹과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마셜, 육군항공대사령관인 헨리 아놀드를 통솔하고 대통령에게 군사적 자문을 할 자리로 신설된 '최고사령관 참모총장'이 되었다. 해군 대장인 리히가 제복군인으로 최고 지위에 오른 이유는 당시 각군의 참모총장들보다도 고참이었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도 있었겠지만,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이 큰 육군이 통합 직책을 이용하여 해군을 자기들 밑으로 두려는 것 아니냐는 해군의 우려 섞인 반발을 사전에 무마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다.[9] 1944년 12월 15일에는 해군 원수로 진급했는데 이는 미군 전체(특정 군종이 아닌 전체. Armed Forces)의 첫 원수였다.
사실상 승전이 확정된 1945년에 리히는 일본에 대해 '지금 하던 대로 해상봉쇄와 폭격으로 압박하면 언젠가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일본에 상륙해 본토를 점령하는 몰락 작전이나 원폭 투하에는 불필요한 인명피해를 초래한다 생각해 반대했으며, 특히 원자폭탄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일각에선 리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최측근을 넘어 가장 신뢰하던 친구였기에 그의 조언을 듣고 루즈벨트가 생전에 태평양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몰락 작전이나 원폭투하 모두 망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루즈벨트가 서거하고 해리 S. 트루먼이 새 대통령이 되어 리히의 영향력이 크게 줄고, 일본인과 일본 군부가 결사항전을 다짐해 미군의 엄청난 손실이 확실시되면서 리히의 굳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되었다.
전후 1949년 최고사령관 참모총장 자리를 오마 브래들리에게 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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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리히 제독이다. 앞줄은 왼쪽부터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10] ,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고 뒷줄은 리히 본인, 영국 외교장관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1881-1951)[11] ,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James F. Byrnes, 1882-1972), 소련 외교장관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1890-1986)이다.
자서전으로 『I Was There』를 남기고 1959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리히급 미사일 순양함 네임쉽에 그의 성이 붙었다.
아들인 윌리엄 해링턴 리히(William Harrington Leahy, 1904-1986)도 미국해군사관학교(1927년 졸업)를 나와서 해군 소장까지 지냈다.
3. 평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인 격동기에 미군의 제복군인들중 최고 자리에 있던 인물이지만, 그의 휘하에서 싸운 장성들이 워낙 역사에 길이 남을 거물들이라서 좀 묻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전쟁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다소 적은 이들에게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나 체스터 니미츠, 커티스 르메이, 더글러스 맥아더 등의 기라성같은 주요 야전 사령관들은 알아도, 리히는 '''이름은 들어봤는데 누구더라...?''' 하는 공기 수준의 존재감에 그치는 편.
그러나 자세히 파고들면, 이 시기 미군의 전략 정책에서 리히의 역량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자문역에 가까운 위치였지만,[12] 루스벨트를 움직이는 조언가이자 측근이었으며 동시에 마셜, 킹, 아놀드와 같은 개성이 강한 최고 지휘관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연합군의 작전 구상안을 제시했다. 당시 각군의 참모총장 셋이 사이가 별로 안 좋았는데[13] 마셜과 킹은 각각 작전 주안점이 유럽과 태평양이라 시시때때로 싸웠고, 아놀드와 킹은 폭격 전략을 논의하다가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14] 이런 상황을 조율하며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 양반도 뛰어난 리더이자 상당한 능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15]
리히급 방공순양함의 1번함 USS 리히는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된 함정이다.
[1] 원수는 정년 없이 종신 복무토록 규정되어 있어, 비록 은퇴하여 실제 근무는 안 하고 그냥 집에서 놀더라도 군에서 받은 의전 예우 그대로 받으면서 지내는게 가능하다. 원수 개인이 "전역"을 희망하면 예비역으로 신분전환되는데, 이를 이용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잠시 전역 신청 후 대통령 임기 만료 뒤 육군의 예비역 소집 명령을 받는 식으로 다시 육군 원수 자리를 유지했다.[2] (Chief of Staff to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Army and Navy)[3] 지금의 합동참모의장격 되는 직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제복군인들 중 가장 높은 직책이었다[4] (Chief of Staff to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Army and Navy)[5] 참고로, 이 명칭에 나오는 '최고사령관(The Commander in Chief)'은 당연히 군 통수권자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다. 그후 1949년 오마 브래들리가 리히의 자리를 이어받은 후 합동참모의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6] 물론 실제 권한은 각군 참모총장이나 각 관구 사령관 쪽이 훨씬 컸고 이들이 리히의 직속부하이거나 했던 건 아니다.[7] 당시에는 바로 해군소위로 임관하지 않고 1-2년 정도 견습사관(준사관)으로 근무한 뒤에 소위 임관시험을 쳐서 정식으로 임관했다. 이것은 범선시대에서부터 내려진 오랜 관례였다.[8] 당시 미 해군엔 준장 계급이 없었다. 대령에서 바로 2성제독(해군 소장)으로 진급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해군 대령이 제독으로 진급하는데 근속기간이 오래 걸렸다. 니미츠, 킹, 리히, 헐시 제독도 대령 생활을 거의 10년, 그 이상을 지내고 소장으로 진급했다. 현재의 준장급 제독들이 맡을만한 보직들은 근속년수가 높은 고참 대령들이 맡고 타군의 준장급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초임대령과 제독진급이 확정된 대령사이의 짬 차이기간은 매우 넓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해군 군사력과 해군 장병의 정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총력전의 영향으로 전쟁 종전 무렵 미 해군의 장병수는 400만명으로 확장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본래 지원제였던 해군과 해병대도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인력을 충원했다.)이것들을 지휘할 제독 보직의 수도 많아지면서 1943년 미 해군은 준장 계급을 신설하고 소장 진급까진 아니지만 연륜이 있는 대령들을 준장으로 진급시키기 시작했다. 다만 그 이상의 경력이 붙은 대령 세대는 1944년까지 소장으로 진급했고 그 이후로는 미 해군 대령의 장성 진급은 준장부터 시작하게 됐다.[9] 전후 미 국방부가 장설될 때도 국방부의 육방부화를 우려한 해군의 저항 탓에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10]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총리. 노동당 소속. 전임자는 윈스턴 처칠이었고 후임자도 처칠이었다.[11] 노동당 소속[12] 타군은 말할 것도 없고 해군의 군령권과 군정권은 모두 해군총사령관인 어니스트 킹에게 있었다.[13] 특히 킹과 다른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원인은 킹이 워낙 좌충우돌한 성격이라서.[14] 2차 대전 말 미 해군 태평양 함대사령부는 일본의 항구를 봉쇄하기 위해 일본 본토 근해에 기뢰살포 작업을 진행하고자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을 항구 봉쇄로 돌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당시 일본 각지를 공습하고 있던 폭격기 부대의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당연히 도시에 대한 폭격을 더 해야 하지, 항구 봉쇄해서 뭐에 써먹느냐고 툴툴대다가 상관인 아놀드 장군에게 기뢰살포 작업에서 기존 공습작전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아놀드 장군이 킹 제독과 담판을 지으려 했으나, 킹 제독은 '''"그럼 해군은 빠질 테니까 육군끼리 잘 해보시든지."'''라며 배째라 식으로 나갔고 아놀드 장군을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어찌됐든 기뢰 살포 작전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이후 태평양 함대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르메이 장군에게 협조해줘서 감사하다는 서신을 보냈다.[15] 니미츠, 맥아더, 아이젠하워 같은 전구 사령관들도 합참(리히, 킹, 아놀드, 마셜)에서 하달된 지침에 의해 전구 지휘를 수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