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모 줌왈트
'''Elmo Russell "Bud" Zumwalt, Jr.'''
1920년 11월 29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출생 ~ 2000년 1월 2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서 사망
1. 개요
미 해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베트남 전쟁기 동안 미 해군의 개혁을 이끈 진취적인 해군참모총장으로 평가받는 제독. 월남전 시기 미 해군을 통솔한 숨은 주역이자 오늘날 미 해군의 초강력 수상함대를 일궈낸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2. 커리어
의사 부부의 밑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엘모 줌왈트는 의사가 되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거절하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 졸업하였다. 원래 1943년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시기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급하던 시기라 해군에서 일찍 졸업시킨 듯.
이후 레이테 만 해전에서 동성무공훈장 수훈을 받는등 활약하였고, 중국 황푸 강에서 일본 해군의 아타카급 포함을 무장해제하는 작업을 하던 시기에 프랑스-러시아계 여성인 무자 쿠틀레-뒤-로쉬(Mouza Coutelais-du-Roche)를 꼬셔서 결혼하고 미국에 복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소령 계급으로 전함 USS 위스콘신에서 활동했고, 해군 보수교육기관인 해전대학(Naval War College) 과정을 수료한 뒤 제7함대에서 구축함장으로 근무했고, 태평양함대의 순양함-구축함 전대를 지휘했다. 이후 육상근무 보직도 두루 거치며 Legion of Merit 수훈을 받기도 했고, 1961년에는 제독으로 진급했다. 시기상으로는 해사 졸업 20년도 안되어 별을 단 꼴.
이후 주월해군사령관으로 영전하여 주월미군사령관이자 훗날 자신과 동시기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는(그러나 재임 중 세상을 떠나는) 크레이튼 에이브럼스를 보좌했다. 에이브람스는 그에게 꽤 살갑게 대해줬던지 줌왈트는 에이브람스를 "내가 만나본 가장 살뜰한 장교"였다고 회고했다.
줌왈트는 흔히 미 해군에서 일컫는 블루 네이비와 브라운 네이비 중 후자에 속하는 편이었다. 대양에서 싸우는 해군이 아닌 강이나 연안 지역에서 활동하는 해군, 아니 수군을 일컫는 표현이 바로 브라운 네이비인데, 줌왈트는 베트남에서 주로 강변, 해안경비, 항만경비 등의 임무에 치중했기 때문에 브라운 네이비로 평가받는다. 당시 휘하에는 자신의 아들 엘모 줌왈트 3세가 대위 계급으로 뛰고 있었고, 훗날 조지 워커 부시와 대선에서 격돌하고 국무장관이 되는 존 케리도 있었다고.
1970년 줌왈트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해군참모총장 임명으로 '''역대 최연소 해군참모총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30년도 안된, 50도 안된 나이에 해군의 1인자가 된 것을 어찌 위업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줌왈트는 그렇게 해군참모총장이 된 후 두고두고 회자될 강력한 개혁, 일명 Z-gram을 추진해나갔다. Z-gram이 뭔지는... 위키백과를 참조하자. 반년 조금 넘는 기간동안 벌여놓은 개혁안이 실로 징그럽게도 많다. 대개는 해군 수병, 부사관들과 CPO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인종차별을 없애는 등의 사병 복지를 위한 조치들이었지만, 해군 항공대의 비행대대장을 중령에서 소령 계급으로 낮추고 26, 31 구축함 전대를 해군본부 직속으로 창설하여 젊은 장교들에게 일찍부터 전투함 지휘 경험을 쌓게 해주는 등의 현명한 조치들도 있었다.
또한 해군의 함정 도입에 있어 하이로우 믹스의 개념을 도입하여 고가의 원자력 추진 군함들로 해군을 도배하는 대신 값싸면서도 실속있는 알짜 전투함들을 도입한다는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1] 당연히 자기 쪽에 배정될 예산이 줄어들게 생긴 하이먼 리코버는 노발대발했다만(...)[2][3] 이 시기 도입한 염가의 함정들로는 스프루언스급과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이 있다. 이들은 건조 당시에는 '덩치만 큰 배가 원자력 추진도 아니고 무장도 빈약하다'라는 까임을 당했지만, 오히려 재래식 추진이라는 점이 운용에 유연성을 높이고, 덩치가 커서 추후 새로운 무장들을 설치할 확장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으로 인해 알레이버크급이 도입되기 전까지 미 해군의 마당발 노릇을 톡톡히 해냈고, 오늘날에도 그 위치는 알레이버크급이 계승하고 있다.[4] "프로젝트 식스티" 구상 가운데 하나로 미 해군 수상함정의 타격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푼 대함미사일 개발에 속도를 붙인 것도 줌왈트 제독.
또한 줌왈트는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발하면 정규항공모함들이 소련을 직접 공격하는 데 동원된 사이 대서양 수송선단이 소련 잠수함대와 폭격기대의 공격에 취약해지는 점을 염려해, 2차대전 때의 호위항공모함과 비슷한 개념인 해리어 탑재 경항모인 제해함(sea control ship)을 구상했다. 제해함 개념은 뒷날의 아스널쉽 처럼 해군 항공대의 반발에 밀려 일단 취소되었으나 설계안이 스페인에 팔려 스페인에서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급이 건조되었으며, 미 해군도 결국 강습상륙함에 해병대 해리어를 탑재하여 유사시 호위항모 역할까지도 수행할 수 있도록 제해함 개념을 일부 받아들였다.
3. 퇴역 이후
1974년 53세라는 젊은 나이(남들은 이 나이에 겨우 별 다는 사람들도 있다...)에 퇴역한 줌왈트는 1976년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버지니아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현직이었던 해리 버드 공화당 의원에게 패했고 대외활동이 뜸해지나 했지만... 좀 특이하면서도 가슴아픈 계기로 유명세를 다시 얻게된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함께 복무했던 아들인 엘모 줌왈트 3세가 전후 갑자기 암에 걸리고 말았다. 바로 '''악명높은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의 후유증'''으로 암이 발병한 것이다. 게다가 1977년 태어난 아들(줌왈트의 손자)도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기형아로 태어나면서 가족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이후 줌왈트는 아들이 필요로 하는 골수 기증의 활성화를 위해 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고 다녔고, 비록 아들은 여동생에게서 골수를 이식받긴 했지만 줌왈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미국 골수 기증 프로그램이 설립되어 줌왈트가 초대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공로로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86년에는 건강이 좀 나아지던 아들과 함께 <My Father, My Son>이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1988년 결국 아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줌왈트는 2000년 1월 2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의 듀크 대학교 의료원에서 희귀성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 근원은 해군 함정근무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들이킨 '''석면'''이었다. 해군사관학교 교회에서 영결식이 치뤄졌고 그의 유해는 해군사관학교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후 미 해군은 알레이버크급을 뛰어넘는 외계인 고문의 결정체인 차기 구축함 시리즈를 '''줌왈트급'''으로 명명하여 그의 헌신과 삶을 기리고 있다. 다만 줌왈트급이 워낙 흉악스러운 가격 때문에 3척만으로 마무리되고 다시 알레이버크급으로 회귀한게 문제라면 문제.[5] 줌왈트급 네임쉽 USS 줌왈트의 명명식에서는 줌왈트의 두 딸들이 참석하여 샴페인을 터뜨렸다. 줌왈트에게는 이외에 미 해병대 장교로 복무하여 중령까지 지낸 아들 제임스가 있다. 제임스의 아들인 제임스 줌왈트 주니어도 해군 EOD 팀에서 복무했는데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줌왈트 제독의 아버지인 줌왈트 1세도 세계대전기 육군 군의관으로 참전하여 동성무공훈장을 받은 전례가 있고 엘모 줌왈트 3세 또한 베트남에서 동성무공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직계는 아니지만) '''4대가 동성무공훈장을 받은''' 희대의 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1] 이때까지 미 해군은 원자력 추진 순양함에만 올인하는 바람에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까지 기어링급 구축함이 현역에 있을 정도였다.[2] 사실 이와는 무관하지만 리코버는 이미 중령 시절의 줌왈트가 면접을 보러 오자 몇 번씩이나 애간장을 녹이며 면전에서 똥멍청이 소리까지 했던 적이 있다! 좀 오래된 글에서 소개된 일화로, "니가 해사 교장이 되면 커리큘럼을 어떻게 짜보겠냐"는 리코버의 질문에 줌왈트가 현실성과 실용성을 강조하겠다는 의도로 "국어(영어)나 역사 좀 줄이고 수학 과학 같은거 늘릴까 합니다"라고 하자 똘빡새끼(stupid jerk)니 뭐니 하는 주옥 같은 참교육(...)이 이어지며 줌왈트의 면접 삼수는 안드로메다로... 이 이야기는 "완벽한 이상 추구"와 "현실 속에서의 실용성 추구"를 각각 중시하는 둘의 신조와도 일치하는 대화다.(플라톤의 국가를 들먹이며 과연 플라톤이 역사 과목을 없애자고 했겠냐, 플라톤은 이상향을 꿈꿨지만 우리의 현실은 시궁창이라느니 하는 얘기도 한다. 결과는 물론 줌왈트가 성깔과 짬밥으로 무장한 리코버에게 GG...) 실제로도 리코버는 제 맘에 안 들면 존 매케인 2세라던지 여러 거물급 인사들과도 척을 지며 완벽하고 안전한 원자력 해군 하나만을 추구했으나, 줌왈트는 이와 달리 효율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가진 인물이었으니 이 둘의 대화가 이상할 것은 아니다. [3] 유의할 점은, 이 글 후반부에서 일컫는 것처럼, 리코버 역시도 해사에서 너무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치느라 실용적인 교육을 충분히 실시하지 못하고 임관시킨다는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리코버가 주장하던 바는, 이것을 "생도들의 자발적인 인문학 공부를 통한 자아성찰, 인격도야"로 해결하자는 거였고, 그를 위해 "국가 차원의 공교육 내실화"(...) 같은 말이 쉽게 나올 정도로 스케일이 너무 컸다.(21세기에도 미국 공교육은 좀 많이 막장이다...) 모든 생도들과 모든 고딩들이 리코버 같은 인물일 수는 없을텐데... [4] 줌왈트의 개혁 조치 중에는 비용 절감을 위한 간부 정복 간소화(하정복, 동정복만 남기고 춘추정복을 폐지)까지 있었는데, 2010년대 들어 해군참모총장 마이크 멀린이 춘추정복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일선에서 줌왈트와 비교되어 욕만 먹고 백지화되었다.[5] 일각에서는 참모총장 시절 해군 전력을 경제적으로 강화시켰던 줌왈트에 대한 고인능욕이라는 비판까지 들을 정도. 죄다 최고성능으로만 떡칠을 하니 가격은 버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