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덕

 



'''이름'''
'''김건덕 (金建悳)'''
'''생년월일'''
1976년 6월 17일
'''출신지'''
정부 직할 부산시
'''사망'''
2016년 11월 17일(향년 40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학력'''
대신중-경남상고-한양대
'''포지션'''
투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
'''국가대표'''
대한민국 U-20 (1994년)
'''경력'''
춘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부경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부산 시상리틀야구단 감독
1. 개요
2. 생애
2.1. 초고교급 에이스가 되다
2.2. 불행의 시작
2.3. 대학 진학 이후
3. 사망
4.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및 야구코치.

2. 생애



2.1. 초고교급 에이스가 되다


1994년은 그에게 있어서 엄청난 한해였다. 이.해 이영민 타격상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경남상고는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과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 올라갔지만, 아쉽게도 두 번 모두 덕수상고에게 패하면서 정상을 밟지 못했다. 이 해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우승을 이끌고 대회 MVP가 되기도 했다.

2.2. 불행의 시작


이러한 활약 덕에 롯데, 대학 등 여러 곳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다. 졸업반 당시 김건덕은 내심 롯데 자이언츠 입단이나 연세대행을 바랐지만, 결국 한양대에 진학했다. 당시 롯데는 2억 5천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금액을 제안했으나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결국 대학 입학을 하게 된다.[1]
한편, 2012년 이승엽이 힐링캠프에 출연해 한 말에 따르면 이 당시 교육부의 규정에 따르면 체육특기자라 하더라도 수능시험 총점이 40점을[2] 넘지 못하면 대학 입학이 불가능했다. 이승엽과 김건덕 둘 다 한양대 입학을 위해서 합숙소에 잡혀 있었는데, 여기서 일부러 수능을 못보기로 의기투합해서 김건덕은 37점, 이승엽은 37.5점이 나왔다. 고의로 수능을 망친 후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아버지께 "죄송합니다. 지 시험 떨어졌으예"라고 말했는데, 아버지가 "무신 소리고? 건덕아, 니는 실업계라 내신 성적이 반영돼 커트라인은 크게 의미가 없다. 뭐 하노. 후딱 서울로 안 올라가고"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이승엽과는 달리 전문계 고등학교인 경남상고를 나온 김건덕은 수능 점수랑 상관이 없어서 결국 대학을 가야했다.
박동희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한양대는 “장학금과 경남상고 동기 2명을 받아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고교 진학 때처럼[3] 장학금에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 했던 김건덕은 생전 “장학금은 둘째치고 친구들이 마음에 걸려서 도저히 ‘김건덕만 받겠다’는 연세대로 갈 수 없었다.”라며 한양대행을 택했다.

2.3. 대학 진학 이후


고교시절의 혹사로 인해 김건덕의 어깨는 망가진 상태였고, 한양대 입학 후 1년 동안은 투수로 등판하지 않기로 했었지만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다시 공을 던지게 되었다. 결국 부상이 악화되어 2학년부터 어깨 통증을 호소했고, 더 이상 투수로 뛰지 못하고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4] 한편, 롯데는 99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김건덕의 투수로서의 가치가 사라지자 1차지명 때 그를 포기했고[5] 결국 김건덕은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6]
그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아까워 한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팀이 김건덕을 불러 경산 볼파크에서 5개월 정도 재활을 해보자며 제의를 했고, 김건덕도 감사한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훈련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군대 영장이 날아왔고, 김건덕은 군면제를 위해 체중을 131kg까지 늘리지만, 법이 바뀌면서 체중 과다로 면제되던 시절은 지나갔던지라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받게 되었다.
결국 어려웠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2000년에 방위산업체로 가게 되는데, 그것이 또 한 번의 비극을 낳게 된다. 그곳에서 손가락의 살점이 잘리는 부상을 입게 된다. 그나마 절단이나 신경 손상은 아니었지만 결국 이 부상때문에 선수 생활은 완전히 접게 된다. 여기에 부상으로 인해 산업체에서 일을 못하게 되면서 구청에서 추가로 공익근무를 해야 했다.[7] 이 시기에 4주 기본 군사훈련을 받으러 갔는데 거기서 부산지역 출신 후배였던 채태인을 만난다. 채태인은 훈련만 끝나면 찾아와 김건덕의 양말을 세탁해주고, 조교들로부터 얻은 초코파이도 선배님 드시라면서 갖다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나마 공익근무 10개월쯤 지났을 무렵에 제2국민역으로 편입되었다.[8] 사유는 생계곤란이었는데 생계곤란이면 이전에도 충분히 가능했었다.[9] 씁쓸하게도 면제 직후 유통회사에 취직했지만 회사는 부도나고 아버지도 이 시기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비록 선수 생활은 그만두게 되었으나 야구배트를 파는 영업사원으로 있으며 야구와의 인연을 놓지 않았고, 춘천고, 부경고 코치를 거쳐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지도자로 새로운 야구인생을 개척해 나갈 것으로 보였으나...

3. 사망


하늘 그라운드로 떠난 ‘비운의 천재’ 김건덕
2016년 11월 17일 오전 11시경 갑자기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혼자서 구급차까지 걸어갔고 병원이 멀지 않았기에 별 일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갑작스럽게 심장마비 증세가 악화되면서 김건덕은 병원 도착 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년 40세.

4. 여담


  • 보직은 투수였으나 타격 자질도 꽤 뛰어났던 선수로 1994년에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만 본인은 불운 등이 겹치며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를 피해가지 못했다.
  • 위에 나온 이승엽과의 일화는 꽤 유명해서 훗날 국내 최초의 야구 뮤지컬인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로 각색되기도 했다.

[1] 이후 김건덕의 아버지는 아들의 인생을 망쳤다며 이를 자책하면서 술만 마시다가 돌아가셨다.[2] 당시는 200점 만점이었다. 400점 만점으로 수능이 변경됐을 땐 80점이 커트라인이었다.[3] 중학교 시절부터 부경고 감독이 수시로 찾아와 챙겨줬고 동문회 회장이 회비 면제에 장학금까지 보장했다고 한다.[4] 당시 포지션은 지명타자.[5] 대신 지명한 선수는 부산상고(개성고) - 경성대 투수 정원욱이었다. 현재 모교인 개성고등학교 감독을 맡고 있다.[6] 안타까운 것은 입학 당시 재활하면 나을 정도의 상태였다는 점이었다.[7] 방위산업체는 1년 이내에 편입이 해제되면 이전 근무기간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8] 물론 자동으로 그리된건 아니고 20여가지 서류를 열심히 준비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면제를 받으려고 했던 이유는 집안 생계 문제 때문이었다.[9] 2008년에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박동희가 이를 언급하자 그걸 몰랐다며 씁쓸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