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고등학교 야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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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소재 개성고등학교에 위치한 야구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부이다. 하지만 우승 횟수로는 경남고나 부산고에 밀리며 예전 상고 라이벌이던 부경고와 비슷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 지역 예선을 뚫고 1921년 고시엔에 출전해 8강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조선인으로 구성된 야구팀은 아니었고 조선인으로 구성된 고교야구 팀이 8강에 오른 것은 1923년 휘문고보가 유일하다.
개성고의 첫 우승은 아직 6-3-3 교육 시스템이 완성되기 전이라, 고등학교들이 중학교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부산상업중학은 1946년 초대 청룡기에서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 야구계의 전설이 된 경남중의 장태영, 광주서중의 김양중, 동산중의 박현식을 모두 제압하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부산상고-개성고 출신으로 야구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김응용이지만, 고교 시절에는 그리 인상적인 성적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부산상고는 김응용이 졸업한 후인 1960년에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모두 결승에 올랐다. 다만 당대 최강의 전력을 구축한 경동고에 패하면서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다. 부산상고의 두번째 전국 메이저 대회 우승은 4년 뒤에 강병철의 호투 속에 이루어졌다.
이후 고교야구의 전성기인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산상고는 1975년 노상수의 활약으로 중앙고를 1:0으로 제압하고 황금사자기 첫 우승에 성공했고, 다시 1976년에는 선린상고를 누르고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면서 전성기가 이어지나 싶었지만, 여기까지였다. 1979년 윤학길을 앞세워 대통령배 결승에 올랐지만, 고교야구의 아이돌 윤석환, 박노준, 김건우가 모인 선린상고에게 1:15라는 충격적인 점수로 대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이 준우승 이후, 다시 전국대회 결승에 올라가기까지는 20년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심지어 대회 성적은 부진해도 뭔가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라도 있어야 하는데, 1980년대 내내 이렇다 할 선수도 배출을 못했다.
오랜 침체기를 무너뜨린 것은 1999년으로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투타 모두에서 활약한 채태인을 앞세워 결승까지 올랐지만, 결승에서 만난 군산상고의 좌완투수 이승호에게 완투패를 당하며, 3-11로 패하면서 우승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이 때 우승 및 2003년 모교에서 대통령이 배출되면서 뭔가 활력을 찾은 부산상고 야구부는 2005년 일반고 전환과 함께[4] , 고교 무대에서 우수한 선수를 수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었던 김응용이 모교 야구부 후원회장을 맡아 직접 중학 무대의 우수한 선수를 끌어오기 시작[5] 한 것이다. 마산중에서 뛰다가 분당 매송중으로 전학간 좌완 김민식한테 개성고를 추천한 인물이 바로 김응용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전국대회에서 4강 정도로만 만족해야 했고[6] , 4번 타자이자 주전 포수로 활약했던 박동원을 바탕으로 다시 부흥기를 이끌었으며, 지방대회인 무등기와 화랑대기에서 2009년 우승을 차지한 것이 마지막이다.
가장 기대를 많이 걸었던 심재민의 고3 시즌인 2013년은 심재민이 부상으로 허무하게 시즌을 날리면서 결국 이렇다 할 성적 없이 끝나고 말았다.
2019년 청룡기에는 주축 투수 최세창의 활약을 앞세워 16강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야탑고를 꺾었고 8강전에서는 효천고에 콜드게임승을 거두며 2008년 이 대회 이후 11년 만에 전국대회 4강에 올랐다. 그러나 야탑고전에서 103구를 던진 최세창이 더 이상 등판하지 못한다는 핸디캡을 이겨내지 못하고 준결승에서 강릉고에 2-5로 패해 20년 만의 메이저 전국 대회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2020년 청룡기 32강전에서 서울디자인고등학교한테 1:11로 대패하며 탈락했다.
2. 여담
박동희 기자가 노무현 대통령과 이 학교 야구부에 관한 기사를 썼었다. ##
2014년 뜬금없이 해체 위기에 몰렸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3. 연도별 상세 성적
4. 출신 선수[7]
[1] 舊 부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2] 4대 메이저 + 협회장기[3] 나무위키 등록 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4] 학교 이름도 개성고로 바뀐다.[5] 최영환, 길태곤, 정민우, 김민식, 박세준, 신승철, 박준태, 전병우 등 부산-경남 지역 유망주 포함 전국 단위로 스카우트를 했다.[6] 당시 지휘봉을 잡은 김상재 감독이 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팀 분위기를 다 잡지 못했다는 평이 있다.[7] 나무위키 등록 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8] 원래 1984년 1차 지명 됐으나, 군입대 문제로 2년 연기되었다.[9] 개명 전은 이승화[10] 2013년 말 김민식에서 개명.[11] 2020년 12월 비공개 SNS 막말 논란으로 구단에서 방출.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