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두
1. 소개
前 대한컬링경기연맹 부회장이다.
2. 생애
학창 시절에는 레슬링 선수였는데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거나 전국체전에서 메달도 여러 번 따는 등 실력은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 레슬링이 비교적 올림픽 메달을 딸 가능성이 높은 경량급에 집중하다 보니 중량급 선수였던 김경두는 국가대표 선발전에 뽑히고도 올림픽에 나갈 기회를 받지 못했다. 결국 당시의 경향 탓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선수 생활을 접고 체육교사로 레슬링 선수를 육성했다.
한편 대학원 과정 중 동계스포츠에 관심을 갖다가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컬링을 보고, 컬링이라면 우리나라 선수도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0년 동국전문대(현재의 경북과학대) 개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신생 학교에서 할 만한 스포츠에 대해 고민하다 외국의 컬링 교본을 찾아보며 컬링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1994년 대한컬링경기연맹의 창립을 주도했다. 연맹의 부회장을 맡아 1996년 컬링연맹을 대한체육회에 가입시켰고, 본격적으로 컬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교수로 있는 동국전문대에 컬링팀을 만들어, 1996년에는 당시 컬링팀 학생들과 일본에 컬링을 배우러 갔다오기도 하고 1997년에는 정식으로 캐나다[1] 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한편 대구빙상장을 위주로 강습회를 열었는데, 다른 종목에 치여 한밤중이나 새벽 시간이 돼서야 강습회를 열 정도라 컬링 전용 경기장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캐나다에서 직접 컬링장 도면을 구했고, 의성군에 있는 자신의 땅을 무상 기증하는 조건으로 경북도청과 의성군으로부터 건립비를 지원받아 2006년 의성종합운동장 부지에 경북컬링훈련원이 완공됐다. 컬링의 생활체육화와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만드는 걸 목표로 스포츠클럽 형태로 훈련원을 운영하며 의성 지역 학생들이 방과후 활동으로 컬링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2001년 우리나라 최초로 컬링 실업팀인 경북도청 컬링팀을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2003년 2월 기사에서는 컬링 실업팀이 강원도청[2] 1개 팀 뿐이라고 언급됐지만 실제로 경북도청 팀은 이후로도 존속했다.[3]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경북도청 팀은 아시안 게임 이후로는 번번이 국가대표를 놓치면서 2000년대 중반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이후 경북도청 팀은 경북체육회로 옮기면서 2007년에 남자팀이 재창단됐고, 2010년에는 여자팀이, 2016년에는 믹스더블팀이 공식 창단됐다. 우리나라 컬링 실업팀 중 한 팀에서 남자, 여자, 믹스더블 팀까지 모두 보유한 건 경북체육회 컬링팀이 유일하다. 2010년대 중반까지 팀의 감독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했었다.
2017년 6월 당시 대한컬링경기연맹 회장 선출 과정에서 자격 없는 선거인단이 참여한 것으로 드러나 회장 인준이 취소되어, 부회장이었던 김경두가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대한체육회는 차기 회장을 먼저 선출하라고 했으나 김경두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올림픽 준비를 우선하자고 주장하며 서로 입장 차이를 보이다가 결국 컬링연맹이 관리단체로 지정되면서 직무대행직에서 물러났다.[4]
선수들의 전횡 폭로에 더해 과거 선수들의 증언까지 더해지며 사면초가에 처한 상태다. 문체부는 감사에 들어가며 비리가 확인될 경우 엄중 처벌을 예고했는데, 감사 결과 선수들의 주장 대부분이 사실로 드러난데다 공공시설인 경북컬링훈련원을 사유화했던 사실마저 밝혀지면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3. 가족과 지인
- 김경두가 처음으로 컬링을 전파할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컬링 선수나 지도자가 있을리가 만무했고, 아예 컬링이란 종목 자체를 아는 사람도 적었다. 이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과 친구를 대상으로 컬링을 전파했다. 본인 부부는 물론이고 동생 부부도 컬링 지도자 자격을 갖추고 있다.
- 아내 양영선은 대구컬링연맹의 이사를 맡은 한편, 남편인 김경두 혼자 남녀 컬링 대표팀에 주니어팀까지 챙기기에는 무리였던지라 아내가 주니어팀을 인솔한 것을 시작으로 컬링 지도자가 됐다.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 때는 컬링장 건설 유치에 매달렸던 남편을 대신해 남자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이때 남자 대표팀은 금메달을 땄다. 이후 경북체육회 여자팀 감독을 맡았다가 딸인 김민정이 감독이 되고, 딸과 사위가 컬링팀에만 매진할 수 있게 대신 손자들을 돌보면서 일선에서 물러났다.
- 동생 김경석도 학창 시절에는 형과 마찬가지로 레슬링 선수였고, 대학 졸업 후 체육교사로 재직 중에 형의 영향으로 컬링을 시작해 한국 최초로 컬링 국제심판이 됐다. 그리고 형의 권유로 2006년 의성여고에 부임해 컬링부를 만들었다. 때마침 경북컬링훈련원이 완공됐고 그곳에서 컬링에 흥미를 가진 김은정에게 친구 1명을 데리고 오라고 해서 김영미가 컬링을 시작했고, 언니가 컬링을 하는 걸 보고 컬링에 흥미가 생긴 김경애에게도 컬링을 하고 싶다면 친구 1명을 데리고 오라고 해서 김선영이 컬링을 시작하게 되면서 지금의 팀 킴이 만들어졌다. 형이 컬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면 동생은 그 토대 위에 씨앗을 뿌리고 형제가 가꿔나간 셈. 이후로도 의성여고나 경북 선수들이 주니어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됐을 때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017년까지 의성여고 컬링부를 지도하다가 학교 내부 문제로 의성여고를 떠났다. 김경석의 아들이자 김경두에게는 조카인 김정태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 믹스더블팀 전력분석관을 맡았다.
- 딸 김민정은 경북체육회 여자팀 선수로 활동하다가 2015년에 선수에서 은퇴해 경북체육회 여자팀 감독을 맡고 있고, 사위 장반석은 믹스더블 팀[5] 감독을 맡고 있다. 아들 김민찬도 경북체육회 남자팀 선수로 활동했다.
- 김경두의 동갑내기 고향 친구인 오세정은 유도선수 출신으로 원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김경두의 부탁으로 컬링에 발을 담그게 되면서 그 역시 컬링에 빠졌다. 경북컬링협회장을 맡은 한편, 2003년에는 세계컬링연맹으로부터 아이스 메이커 자격증을 취득해 경북컬링훈련원의 수석 아이스 메이커도 맡고 있다. 오세정의 아들들도 컬링을 접했는데, 첫째 아들이 금방 선수 생활을 접은 것과 달리 둘째 오은수는 계속 컬링을 하면서 경북체육회 남자팀 선수로 활동 중이다.
- 처음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부족한 컬링 저변 확대를 위한 가족과 지인들의 참여로 해석됐지만, 경북체육회 컬링팀 지도부 폭로 사건으로 인한 문체부의 감사 결과 감독이나 전력분석관을 맡았던 김경두의 일가 사람들이 정당한 절차 없이 채용됐고, 대한컬링경기연맹의 20개 대의원 단체 중 10개를 자신의 친인척과 지인으로 채워 연맹 운영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사실상 연맹 조직도 사유화했던 셈인데, 비인기종목이라는 점 때문에 조직을 사유화해도 내부 견제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대외적으로는 이를 좋게 포장할 수 있었다.
4. 기타
- 레슬링 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만두귀다.
- 컬링 보급 초창기에는 웃픈 일화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외국에서 컬링 스톤을 들여오다가 세관에 걸려 이를 설명하는데 40분이 넘게 걸렸다거나, 그가 브룸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청소하러 다니냐는 질문을 했었다거나[6] , 대여한 빙상장에서 컬링 강습을 위해 하우스를 그리다가 빙판 위에 낙서한다고 쫓겨나기도 했다고. 1997년 캐나다에 전지훈련 갈 때에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컵라면을 박스째 챙겨서 저가 항공사를 이용해 여기 저기 경유해가며 20시간 넘게 걸려 캐나다로 가서 숙소비도 아낀다고 컬링장 2층을 숙소삼아 지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돈을 아낀다고 궁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시 컬링 여건상 해외 전지훈련을 했다는 것만으로 특혜라고 오해받았다.
- 딸과 사위가 감독을 맡으면서 감독에서는 물러났지만 선수들이 해외 대회에 출전할 때 단장으로 함께 하는데, 여자팀의 경우 단장부터 감독과 선수 5명 모두 김씨라서 '아버지와 딸 6명이 함께 컬링을 하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한다.
- 2014년 1월 인터뷰[7] 중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 컬링이 우리나라에서 사랑받는 종목이 될 거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사실이 됐다.
5. 관련 문서
[1] 2018년 세계 여자 컬링선수권 대회가 열린 노스베이였다.[2] 강원도청 컬링팀은 경북도청 팀보다 조금 늦은 2001년 10월에 창단됐다.[3] 당시 소속 선수들이 대학생이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강원도청 선수들은 다들 대학교를 졸업했었다.[4] 결과적으로 차기 회장 선출도 못했고, 컬링 대표팀도 올림픽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메달을 땄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5] 믹스더블 팀이 생기기 전에는 남자팀 감독을 맡았다.[6] 김경두 뿐만 아니라 다른 컬링선수들도 브룸 때문에 청소부로 오해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7] 기사 상단 사진에서 김경두 좌우에 있는 선수가 바로 김영미와 김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