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용(고려)

 

1. 개요
2. 생애
3. 평가

金景庸
(1041 ~ 1125)

1. 개요


고려의 문신.

2. 생애


경주 출신으로 원성왕의 후손. 경조현개국남 김인위의 손자이고, 병부상서 중추사를 지낸 김원황의 아들이다. 고려사의 김경용 열전에 임관 전 시절의 일화가 남아있다. 김경용은 용모와 거동이 위엄 있고 수려해 귀인의 풍채가 있었는데 음악과 여색에 빠져 방탕하게 지냈다. 어느 날 길에서 누군가와 다투다가 지나가던 송상이 그를 훑어보더니, "내가 사람들 관상 보기를 좋아하는데, 지금 그대의 관상을 보니 골격이 남다르므로 반드시 부귀해질 것이오. 부디 스스로를 아끼시오."[1]라며 관상을 봐준다. 김경용은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이후 관직에 나간다.
합문지후에 오르고 광주(廣州)에 판관으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존경을 받는다. 광주판관으로 있을 때 기이한 일화가 또 열전에 실려있다. 김경용이 겨울에 거하게 취해서 얼어붙은 한강을 말을 타고 달려갔다. 말이 얼음판을 밟을때마다 깨져서 물이 솟는데도 강에 빠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숙종 원년(1096) 어사중승에 올랐는데, 왕이 구경하는 활쏘기 경기에 참가해 가장 먼저 과녁의 중앙을 맞혀 은그릇과 말을 상으로 받는다. 숙종 시기 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 병부시랑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 판상서공부사 등 여러 관직을 지낸다.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태자태사 수사공에서 시작해 좌복야 참지정사, 검교태자태사 수사공, 개부의동삼사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역임한다. 예종 4년(1109) 2월 연등회날 왕이 여러 종친과 재상, 신하에게 베푼 연회에서 예종 본인이 술에 취해 신하들에게 앞에 나와서 춤을 추게 한다. 당시 평장사였던 김경용을 비롯한 여러 신하가 나와서 춤을 췄는데, 평장사면 중서문하성의 재상급 고위 관료인데도 불려나가서 장기자랑을 한 셈이다. 예종은 결국 같은 해 4월, 우간의대부 이재(李載)에게 여진 정벌이 한창인데 평장사에게 춤이나 추게 하는데 예(禮)는 어디로 갔냐는 비판을 듣는다.
예종조에 여진 정벌의 결과로 윤관동북 9성여진에 돌려주고 온다. 김경용 등 재상들은 예종 4년 6월과 예종 5년(1110) 5월 두 차례에 걸쳐 윤관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을 것을 왕에게 아뢴다. 앞은 갈라수 전투가 끝나고 복귀한 다음 달에 김경용과 최홍사 두 평장사와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가 논한 것이고, 뒤는 그 다음해에 두 평장사 이하 중서문하성의 대간들이 아뢴 것이다. 예종 5년 5월의 경우에는 평장사 이하 대간 모두가 중서문하성을 수십일동안 비우고 출근하지 않으며 강경하게 버티니, 예종이 근신을 보내 달래기 전까지는 문하시랑동평장사(정2품) 이오[2]와 중서사인(종4품) 이덕유가 숙직을 서야 했다. 그러나 여진 정벌 문서에서도 논하는 바와 같이 윤관의 패배는 본인 탓보다는 환경의 문제가 컸기에 당대 사람들도 윤관 탓만 하는 김경용 등을 비웃으며 비판한다.
예종 5년 12월에 문하시랑평장사 판형부사에 임명되는데 그렇게 물어뜯던 윤관은 같은 시기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로 복귀한다. 예종 7년(1112) 2월 수태보 판상서이부사에서 9월 문하시중에 오른다. 같은 해 건덕전에서 교지를 받고, 또 협모위사치리공신호를 받는다. 예종 8년(1113) 수태부 판상서이부사 낙랑백에 오르며 이듬해인 예종 9년(1114) 1월에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한다. 궤장을 받고 계속 정사를 보다 같은 해 3월에 74세의 나이로 참지정사 고영신과 함께 은퇴한다.
은퇴한 뒤에는 잔치나 행사에서 간간히 모습을 보인다. 예종 10년(1115) 상춘정의 연회에서 왕이 나라의 원로 중 남은 사람이 김경용 뿐이라며[3] 말을 건넨다. 김경용은 "노신이 은혜를 입음이 지극하고 두터우니, 가루가 된다 해도 갚기 어렵습니다."[4]라고 답한다. 또 이듬해 천수사 공사를 마치고 연 잔치에서 왕과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숙종과 명의태후의 이야기가 나와 예종과 좌우 신하 모두가 눈물을 흘린다.
예종 11년(1116) 수태사 낙랑후, 예종 17년(1122) 광국동덕익성공신 식읍 3천호 식실봉 7백호에 낙랑공으로 작위가 올라간다. 인종 3년(1125) 9월 14일 85세의 나이에 죽었으며 시호가 추증된다.

3. 평가


재상에 오른 뒤에는 권세에 의지해 재물을 늘렸고, 그 집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 세간의 평이 좋지 못했다. 아들 김인규가 너그럽고 후한 성격을 가져 권세를 믿고 교만하지 않았었던 것과 대비된다.

[1] 僕好相人, 今觀子相, 骨法秀異, 必富貴而壽, 請自愛.[2] 당시 69세로 이 해에 죽는다.[3] "나라의 원로 중 오직 경만이 있을 뿐이오." 國之元老惟卿在爾.[4] 老臣蒙恩至渥, 糜粉難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