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고려)

 

1. 개요
2. 생애
2.1. 임관 초
2.2. 숙종 시기
2.3. 예종 시기
3. 가족관계

任懿
(1041 ~ 1117)

1. 개요


고려의 문신. 자는 충공(忠恭)이고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2. 생애



2.1. 임관 초


문종 24년(1070) 4월의 복시에서 병과에 급제해 비서성교서랑으로 관직에 나간다. 곧 국원공부천첨으로 관직이 바뀌는데 이 때 왕자 국원공(훗날의 선종)의 눈에 든다. 고려시대 관료들은 중앙직에 있다가도 외직에 나갔다 오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문종 36년(1082) 충주목서기로 나간다. 1083년 문종이 죽고 태자(순종)도 즉위한지 3개월만에 병사하니 순종의 동생인 국원공이 왕위를 잇는다. 충주에 나가 있던 임의는 개경으로 불려가 신호위녹사참군 겸 직한림원에 임명되고 내시로 상주문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는다.
순종의 측근인 임의는 승진을 거듭해 3년이 채 되기도 전에 시합문지후에 오르고 예부원외랑, 우사원외랑 등을 지낸다. 선종 11년(1094)에는 이부낭중 어사잡단 지제고에서 중추원 우부승선이 된다. 이 해에 선종이 죽고 아들 헌종이 즉위하는데 당시 조정은 이자의를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과 계림공을 중심으로 한 종친 세력이 갈등을 빚고 있었다. 임의는 이즈음 중서사인으로 우승선이 돼 궁궐을 드나드는데 침착하게 말하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다. 이자의 등이 역적으로 몰려 축출되고 이듬해에 헌종이 숙부 계림공에게 양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고려 숙종이다.

2.2. 숙종 시기


자신을 아껴주던 왕의 아들이 쫓겨나고 그 숙부가 즉위한 셈이니, 비록 임의에게 다른 마음이 없더라도 주위에서 뜬소문이 오고갔을 것이다. 숙종 즉위 초에 임의는 오랜 원한을 가진 궁중의 나인에게 여러 차례 참소당한다. 임의가 헌종의 복위를 모의한다고 그럴듯하게 무고한다면 훗날의 사육신 꼴이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임의의 성품이 순진하고 정직하므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라며 끝내 참소를 듣지 않는다. 숙종 즉위년(1095) 10월 왕은 요나라에 '양위'의 정황을 보고하는 사신으로 형부시랑 임의를 보낸다. 같은 해 말에 긍정적인 답변을 가지고 돌아오니 숙종은 임의를 조산대부 형부시랑 충사관수찬으로 임명한다.
이듬해 숙종 원년(1096)에 사재경을 겸하다 전주목사로 나간다. 임기를 마치고는 개경에 돌아와 태복경 간의대부를 지낸다. 숙종 4년(1099) 좌간의대부에 오르는 한편 사돈 윤관[1]이 함께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에 임명되는데, 중서성 대간들의 탄핵으로 상피제에 따라 윤관 쪽이 해임된다. 숙종 5년(1100)에는 송철종의 조문을 위해 백가신과 함께 북송에 사신으로 가게 된다. 세간에서는 재물,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며 비난을 듣기도 했는데 청렴하고 조심하게 행동하니 송나라 사람들의 칭송을 듣는다. 임의는 북송에서 하사받은 의서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을 숙종에 바친다. 사신과 부사, 수행원 모두가 상을 받게 되고 임의는 어사대부에 임명된다.
숙종 시기 임의의 관직은 예부상서겸 사관수찬, 병부상서, 태자첨사를 역임하고는 판어사대사,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추밀원사 이부상서 겸 태자빈객 판삼사사에 오른다. 그 외에는 남경개창도감이 만들어진 뒤 최사추, 윤관 등 당시의 주요 신하들과 함께 남경에 다녀온 일이 있으며 이후 숙종의 남경 행차에 호종한다.

2.3. 예종 시기


예종 즉위년(1105) 임의는 검교사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추밀원사에 임명된다.
예종 원년(1106) 지공거로 동지공거 박경작[2]과 함께 응시자 600명 중에서 한즉유(韓卽由) 등 27명을 선발한다. 을과 급제는 한즉유 등 4명, 병과 급제는 이식(李湜) 등 8명, 동진사출신은 견유작(甄惟綽) 등 15명이고 공자의 글을 익힌 이양발(李揚發)은 이과(二科), 최경운(崔慶雲)은 삼과(三科) 급제했다. 안영조(安永祖), 임극일(林郄一), 송개(宋開) 셋은 과거에 응시한지 10년이 넘었기에 특별히 출신을 하사받는다.
임의의 관직은 개부의동삼사 주국으로 승진하고 판상서형부사를 겸하며 예종 4년(1109) 7월에 중서시랑평장사로 권판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를 겸한다. 당시는 윤관 등의 여진 정벌이 실패한 시점이었으니, 임의는 왕명에 따라 절월을 받들고 부사 우간의대부 김연(金緣)과 여진에 가서 동북 9성을 돌려주고 온다. 이 일화는 임의묘지명과 고려사 임의 열전의 서술이 다르다.
임의묘지명에 따르면 이미 장병기를 처리하고 퇴각을 준비하던 장수들을 임의가 제지하고[3] 여진 추장들이 다시 침략하지 못하게끔 타일러 고개숙이게 했다. 그리고는 퇴각 준비를 위해 군량을 모으고 (숭녕진과 통태진의) 성을 무너뜨린 뒤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한편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최홍정(崔弘正) 등 장수가 이미 병장기를 거두고 퇴각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는데 높으신 분이 행차한다고 해 오히려 행군이 지체됐다. 늦게 도착한 임의는 당연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으며, 전령들만 힘을 뺀 뻘짓이 되므로 당대 사람들의 비난을 듣는다.
동북면에서 돌아온 뒤에는 권판상서이부사가 된다. 같은 해 11월에는 다른 재상들과 함께 예종에게 윤관을 문책할 것을 청하기도 한다. 예종 5년(1110) 삼중대광 수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로 은퇴했으며 예종 9년(1114) 좌리공신호, 예종 10년(1115) 검교태부가 더해진다. 음력으로 예종 12년(1117) 5월 임자일(25일) 77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죽었으며 왕은 조회를 그치고 시호를 내린다. 같은 해 8월 개경 북쪽 팔덕산에서 장사된다. 인종 때 중서령이 추증된다.

3. 가족관계


  • 부: 임호
  • 모: 양원군대부인 이씨
    • 본인: 임의
    • 처: 낙랑군부인 이씨
부친 임호는 상서공부원외랑을 지내고 태자대부에 추증된다. 이제정(李齊頲)의 딸과 결혼해 2남 2녀를 둔다. 장남 임원숙은 평장사를 지냈고, 차남 임원애는 유력한 외척이 된다. 삼남 임원준도 평장사를 지낸다.

[1] 임의의 아들 임원후와 윤관의 딸이 결혼한 상태.[2] 朴景綽, 박인량의 장남으로 나중에 '박경인(朴景仁)'으로 개명한다.[3] 지금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면 나라에 근심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